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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성도의 고난에 대한 칼빈의 신학적 이해(벧전 4:12-19) 2
안인섭(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기사입력: 2017/03/15 [10:40]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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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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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안인섭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베드로전서 4:12-19의 해석을 통해 성도의 고난에 대한 칼빈의 신학적 이해를 제시한다. 이를 통해 성도의 고난의 의미와 신학적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

III. 칼빈의 베드로전서 4장 인용의 신학적 의미

우리는 이상에서 칼빈이 베드로전서 4장을 그의 주석들에서 어떻게 인용하여 해석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이 조사에 근거할 때 아래와 같은 몇 가지의 주장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칼빈은 1546년부터 1563년, 즉 그가 세상을 떠나기 일 년 전까지도 지속적으로 베드로전서 4장을 인용하면서 고난에 대한 자신의 신학을 개진하고 있었다. 이 조사를 통해서 보면 칼빈이 1546년 이전에 자신의 주석에서 베드로전서 4장을 직접 인용하고 있는 기록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칼빈은 1536년 판 기독교강요와 1539년 판 기독교강요에서 이미 베드로전서 4장을 인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칼빈이 베드로전서 4장을 어디에서 어떤 의미로 해석하여 인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위의 분석에 의하면, 칼빈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그의 저작들에서 베드로전서 4장을 인용하면서 고난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해석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결국 베드로전서 4장에 대한 칼빈의 묵상과 해석은 칼빈의 고난에 대한 신학적 발전에 반영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로 위의 연구에 의하면 칼빈의 베드로전서 4장의 인용은 주로 구약 주석에 집중되어 있었다. 칼빈은 신약 주석에서는 4번에 걸처 베드로전서 4장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구약 주석에서는 칼빈은 14군데서 베드로전서 4장을 활용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물론 구약이 그 분량이 신약보다 많아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칼빈이 구약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에 대해서 묵상하고 해석할 때 베드로전서 4장을 자주 기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칼빈은 주로 그의 구약 주석들에서 베드로전서 “4장 17절”을 사용하여 주석에 활용하고 있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이 먼저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될 것인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베드로전서 4장 13절의 경우는 신약에서 오직 2회만 사용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하면서 이것은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즉 고린도후서 1장 5절(1546)과 사도행전 5장 41절(1554)에서 칼빈은 베드로전서 4장 13절을 인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칼빈의 구약 주석들에 나타난 그의 베드로전서 4장의 사용을 살펴보면, 칼빈은 베드로전서 4장 17절을 14번이나 사용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칼빈이 고난과 관련하여 베드로전서 4장을 인용했을 때 거의 대부분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고난,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들이 당하는 고난에 절대적인 비중을 두어 주석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도 고난을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백성인데도 이런 고난을 받게 된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은 얼마나 가혹한 고통을 겪을 것인지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내려다볼 수 있도록 의도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넷째로 본 논문에서 칼빈의 베드로전서 4장 인용을 검토해 볼 때, 하나의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칼빈은 베드로전서 4장 13절을 상대적으로 그의 인생의 초기에 주로 사용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4장 17절의 경우는 비교적 그의 후기에 집중적으로 사용하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칼빈이 베드로전서 4장 13절을 해석할 때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에 주된 관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칼빈은 신자들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영광과 연결시키고 있었다. 그 당시 프랑스와 네덜란드 남부 등에서는 로마카톨릭으로부터 개혁주의자들에 대한 가혹한 박해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 고난받는 종교개혁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며 결국 이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칼빈이 베드로전서 4장 17절을 언급할 때는 그는 주로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시작된다”는 부분을 강조하면서, 그렇다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어떻겠냐는 것에 주된 강조가 놓여있다. 이와같이 칼빈이 하나님의 집의 심판에 대한 인용 숫자를 급격하게 증가시키고 있는 것은 칼빈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칼빈 자신의 강조점이 하나님의 집의 심판과 관련된 면에 놓여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칼빈의 강조점이 베드로전서 4장 13절에서 17절로 옮겨간 것은 그의 제네바 사역 자체와 연결되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은 1538년에 스트라스부르그로 쫓겨나듯이 제네바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제네바로 돌아온 1541년 이후에는 제네바 도시 자체를 거룩한 신앙의 공동체로 세우는 일에 큰 관심을 가졌다. 당시 제네바는 외면적으로 보면 종교개혁을 선포한 도시로서 소위 거룩한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제네바 시민들의 삶은 그에 부합하지 못했다. 이런 맥락에서 칼빈은 제네바 시민들의 성화(sanctification)를 향한 삶을 더욱 격려하고 촉구했다. 경건한 삶을 목표로 가열차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 성도들에게 칼빈은 강력한 도전을 주려고 했다. 제네바 컨시스토리를 통한 교회 권징이 이 시기에 더욱 강화되었다는 것은 이것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제네바는 법적으로는 종교개혁을 선포한 “하나님의 집”이었지만, 그 안에서 아직도 경건하게 살고 있지 않고 있는 시민들에게 칼빈은 더욱 강력하게 성화의 삶을 촉구했다. 칼빈이 사역의 후반기로 갈수록 베드로전서 4장 17절을 압도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데에는 이런 배경도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첫째로 칼빈은 신자들의 고난이라는 난제를 “성육신”과 “성화”라는 신학적인 문맥에서 접근하여 해결을 도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칼빈은 주변의 지역들로부터 제네바로 들어오는 점증하는 난민들의 열악한 삶의 상황을 한 명의 목회자로서 바라보았다. 그는 이런 목회적 현실 속에서 “종합구빈원(General Hospital)”이라는 디아코니아사역을 통해서 그들을 돕기에 지체하지 않았다. 칼빈 자신은 더 나아가 “프렌치 구호기금(French Foundation)”을 창설하여 이 디아코니아 사역을 활성화시켰다. 이런 성육신적 목회의 방향은 칼빈이 실제 성도의 고난을 목도하면서 이것에 대해서 신학적 성찰을 통해 획득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제네바의 디아코니아 사역의 배경에는 고난과 성육신에 대한 칼빈의 신학적 성찰이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칼빈의 신자의 고난에 대한 개념을 생각할 때, 성화에 대한 그의 신학적 성찰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칼빈의 저작에서 점증하는 베드로전서 4장 17절 인용을 발견할 수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징계로서 하나님의 집에 대한 심판이 시작된다는 점을 계속 부각시키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칼빈의 이 개념을 더 확장한다면, 칼빈의 교회 공동체에서 성도의 성화를 위한 보다 효과 있고 강력한 권징을 실시하는 것이 긴요하다는 목회적 당위성과 강조점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또 논리적으로, 칼빈은 비록 권징이라 하더라도,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목적에 의해서 그것을 실행했다는것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도들이 성화되어 그 제네바 공동체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성도들을 위한 강력한 권징을 실천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 유익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칼빈의 베드로전서 4장 인용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칼빈의 성경 사용은 그의 목회적인 강조점의 방향이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를 반영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IV. 성도의 고난에 대한 칼빈의 이해가 차지하는 신학적 위치

인간의 고난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칼빈의 설명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신학적 이해에서 출발된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창조세계를 지키는 청지기로 살 책임을 지고 있었다. 이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자연을 보전하는 존재다. 그러나 아담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아담의 원죄는 모든 후손에게 전가되었다. 그 결과 이웃과의 신뢰도 무너지게 되었고 창조 세계의 질서도 혼돈되었으며 인간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칼빈에 의하면 창조 세계에 나타나는 비참한 일들은 죄의 결과이다. 개혁신학의 체계 안에서 분석해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고난들은 근원적으로 인간의 죄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인간이 타락하게 된 원인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있다. 인간에게 찾아오는 고난은 결국 인류의 죄의 결과이다.

칼빈은 이런 비참한 상태에 있는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셨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런 인간을 구속해 주셨다. 이 구속은 종말론적인 회복과 소망을 약속해주고 있다.

V. 고난과 성육신

칼빈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인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것은 성부가 결정한 가장 좋은 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인간의 본성을 지니고 성육신함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구속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간의 아들로서 그 구속사역을 완성했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진술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성육신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세계로 직접 들어오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이 되셨다. 성육신을 통해서 예수는 이 세상에서 주어진 시간과 장소에 사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과 화해하셨으며 우리 인간이 원래 창조되었던 그 평화와 교제를 제공해 주셨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역사의 목표이며 우주와 인간을그 자신 안에서 지탱하고 있다고 설명될 수 있는데, 성육신은 바울과 요한의 발전된 기독론적인 설명 안에서 해석된다.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세계 내려와서 완전한 인간이 되어 인간을 구원한다는 이 성육신의 신학은 인간의 고난에 대해 신학적 접근을 할 수 있는 중요한 길을 열어준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은 예수가 인간이 받는 고난으로 시험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를 도울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칼빈은 우리의 육신이 연약함 아래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하나님의 아들도 똑같은 고난을 경험했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한 것은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격려하시며 그런 고통에 의해서 우리가 압도당하지 않기 위함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성육신의 신학적 개념은 목회적 관점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예수는 성육신을 통해서 인간과 같은 고난을 스스로 겪으셨으며, 따라서 예수는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당할 때 그의 능력으로 우리가 그와 같은 고난에서 좌절하지 않도록 격려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칼빈의 신학에서 전망할 때 성육신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고난과 강력하게 연동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VI. 고난과 하나님의 숨어계심(Hiddenness of God)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사건은 구약의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에게 어떻게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이 발생했는가? 하나님의 백성이 겪는 잔인한 고난 가운데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칼빈은 하나님의 백성이 받는 고난에 대한 신학적 딜레마를 기독교강요의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다루고 있다. 성도들은 비록 고난 중에 불안과 공포와 근심에 빠진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떠나지 않고 권능으로 보존하시고 지배하시며 조정하신다고 하면서 이것이 바로 경건한 사람이 받는 위로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지만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자신의 한계 때문에 자신의 고난 가운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 그렇지만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백성을 훈련하신다. 칼빈은 1561년에 다니엘서의 주석을 그의 조국 프랑스 교회 성도들에게 헌정하고 있다. 이 시기에 프랑스 개혁교회 성도들은 가혹한 박해를 받고 있었다. 칼빈은 그들의 극심한 고난을 보고, 그것은 그들의 믿음을 입증하기 위함이며, 그들의 마음을 강하게 하여 어떤 폭풍우나 눈보라에도 약해지지 않고 넘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이라는 논제는 칼빈의 경우 성화와 신자들의 훈련이라는 문맥에 정초 된다. 칼빈에 의하면 성도의 고난 가운데도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떠나지 않으시며 여전히 숨어 계시면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1.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숨어계심

인간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근원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현실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들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일을 하시고 계시는지 다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피조물로서의 인간 자신의 본래적인 한계에 기인하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칼빈의 의도는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숨어 계시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이 그 하나님을 잘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소극적 은폐성”이라고도 지칭될 수 있다.

칼빈의 강조점은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을 자신의 규범에 따라 저울질하며, 그로 인해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 즉시 손을 뻗어 응답하지 않으시면 곧 용기를 잃고 심지어 절망하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결국고난 속에서 외치는 자신의 소리를 하나님이 듣지 않으신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간 사회에서 발생하는 고난들 또한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고 계시는지를 인간은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고난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비록 숨어 계시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여전히 그의 백성들과 이 창조 세계를 위해서 부지런히 일하신다고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2.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로 인해서 우리들에게 드러나지 않으시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감추시기도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적극적 은폐형”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인간이 자연세계와 인간 사회로부터 고난을 겪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 계시기도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시편 119편의 주석에서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의 얼굴을 구름에 가리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인생의 길을 잃고 헤맬 때 하나님은 숨어 계시기도 하지만 동시에 적으로부터 그 자녀들을 보호하시기도 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은폐하실 때 이 세상은 혼란을 야기하는 어둠 속에 있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의 얼굴을 다시 보여주실 때 질서가 회복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을 돕고 보호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일시적으로만 자신을 감추신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문맥에서 칼빈은 하나님이 진노의 표현으로 자신을 감추실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마치 왕이 그의 백성에게 화가 나서 은밀한 곳으로 물러나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화가 나서 은밀한 곳으로 물러나기도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본질에 따라 자비하신 분이기 때문에, 당신의 진노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스스로 일시적으로 모습을 감춰 이렇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벌은 동시에 사랑과 돌보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벌을 주신다는 것은 여전히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심을 의미한다.

3. 숨어 계시는 하나님의 의미

칼빈의 하나님의 숨어계심이라는 신학적 개념은 칼빈의 십자가 신학 위에 정초하고 있다.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의 옷을 입고 있었다. 칼빈이 이해하는 십자가의 신학은 이처럼 어떤 것의 반대적 모습으로 나타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때로는 당신이 의도하는 것의 정반대를 행하심으로써 당신의 행위의 목표를 감추신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의 고난을 도와주시기를 미루시는 것은 그의 백성을 눈물과 탄식으로 단련하시기 위함이다.

칼빈이 하나님의 숨어계심을 설명할 때 칼빈은 동시에 하나님의 모든 행위에 의도가 있음을 설명함으로써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칼빈은 하나님의 숨어계심을 묘사할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고난에 즉시 개입하신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삶에 너무 매달리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하나님이 자신의 은혜와 자신 그 자체까지도 우리 앞에서 은폐하시기도 한다고 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욱더 기도하게 하려고, 혹은 우리가 얼마나 순종하는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침묵하시기도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현존이 인간의 삶의 현장과 고난의 자리에 나타나지 않을 때 인간은 고통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은 이처럼 침묵하시고 숨어 계실 때조차도 긍정적인 일을 하시고자 하신다고 보고 있다. 하나님은 신자들의 고난 가운데서도 숨어 계시면서 자신의 섭리 속에서 여전히 자신의 자녀들을 돌보신다는 것을 교육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숨어계심은 교육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부당하게 고난을 받는 자들을 즉각적 도와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는 책임을 중지하지는 않으신다. 칼빈이 해석하는 바는, 하나님이 신자들의 고난 속에 숨어 계시면서 신자들의 인내를 훈련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고난 속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 모습을 감추고 있다 할지라도 인내하며 십자가를 지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4. 숨어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숨어 계신다고 할 때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의 숨어계심 때문에 하나님과의 거리가 하늘과 땅처럼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괴리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하늘과 나 사이에 거리가 있다는 의식을 버리고 내가 하늘로 올라가서 그곳으로부터 실제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것이다.

비록 현재의 고난으로 인해서 감추어져있다 하더라도,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간파할 수 있다. 칼빈에 의하면 믿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서 모습을 감추신 그 구름 위로 올라가서 평안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날개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인간이 이 높은 곳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다시 발견할 수 있으며 또 우리 인간이 어떤 상황 가운데 있는지를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극심한 고난을 겪고 있는데도 하나님이 모습을 감추고 계실 때 하나님을 믿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지만, 그것은 가능한 것이며, 또 그것을 통해서 고난의 자리에서 통과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믿음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부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숨어계심을 더 잘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VII. 나오는 글

칼빈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맞게 되는 고난에 대해서 묵상을 하였다. 특별히 그가 살았던 16세기는 인간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시대였다. 그 격변의 시대 속에서 성경에 근거한 종교개혁적인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곧 일련의 고난과 핍박을 받는다는 것을 이미 각오하는 것을 의미했다.

칼빈은 현실적으로 당시에 존재하고 있는 고난을 신학적으로 묵상하였다. 칼빈 자신도 박해의 위협 속에서 고국인 프랑스를 탈출했던 사람이었다. 고난에 대한 칼빈의 견해는 첫째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당하는 고난은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칼빈의 고난에 대한 신학은 스토아적인 사상과는 다르다. 둘째로 칼빈은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목회적인 마인드로 접근하면서, 고난 당하는 성도들을 위로 및 격려하고 있다. 셋째로 경건한 자들의 고난은 구원의 서정의 맥락에서 성화의 과정에 위치한다.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신앙의 성숙을 이룩하게 되어 고난은 성화와 관련된다. 넷째로 칼빈에게 있어서 신자들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독론적인 의미가 있다. 다섯째로 또한 칼빈은 신자의 고난을 종말론적인 맥락에서 해석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가치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결국 칼빈에게 있어서 고난은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 17절과 같이 먼저 성도가 고난을 당한 후에 최종적으로 경건하지 못한 자들의 최후의 심판이 있게 된다. 즉 칼빈은 고난은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는 필연적인 하나의 과정이라고 신학적으로 강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도들은 세상에서 온갖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당할 것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그것을 이길 수 있다. 왜냐하면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극심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이다. 종말론적으로 볼 때 성도들은 고난 중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세상에서 고난 당하는 성도들에 대한 최고의 위로와 소망이다. 산상수훈도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에게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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