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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인물/탐방
정읍성광교회 "교회설립 70주년 기념 간증집 출판"
현재 담임은 김기철 목사, 김도빈 목사는 예장합동 제84회 총회장으로 피선
기사입력: 2017/03/15 [14:49]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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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읍성광교회 설립 70주년 기념 간증집, 신국판 424     ©리폼드뉴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 산하 전라북도 정읍성광교회(김기철 목사)가 교회 살립7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 사진집을 출간한데 이어 성도들의 삶의 기록을 모은 간증집을 출간해 화재가 되고 있다.

1946년 10월 10일에 설립된 성광교회는 김도빈 목사를 제84회 총회 총회장으로 배출한 전북지역의 선교의 전진기지로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교회 설립 70주년 기념으로 출판된 이번 간증집은 <보석이 따로 없다>는 제목으로 성도들의 소중한 삶의 이야기를 간증형식으로 신국판 425쪽으로 출판됐다.

본 간증집은 모두 79명이 참여하였으며, 특히 총회임원과 기독신문 이사장, 총신대학교 법인이사 등을 역임한 고 양재열 장로에 대해 그의 아들인 양창삼 목사의 부부의 간증문을 비롯하여 성광교회 출신 목회자들을 비롯하여 교회 장로, 집사, 권사 및 교사, 성도들이 참여하고 있다.

▲ 담임 김기철 목사     © 리폼드뉴스

본서의 구성은 8개 주제인 부르심, 기도, 치유와 회복, 제자훈련, 은사, 가정, 헌신과 봉사, 선교와 섬김으로 분류됐다.

정읍성광교회의 오늘이 있기까지 먼저는 주님의 은혜요, 다음은 교회를 헌신적으로 섬기는 성도들일 것이다. 그 성도들이 하나님과 깊은 교제와 만남의 체험을 갖고 교회를 섬겼던 생생한 체험의 현장들과 그 간증들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은 또다른 형태의 전도일 것이다.

담임인 김기철 목사는 "우리 교회는 농촌 소도시에 있는 교회지만 성도들의 수준은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다고 믿는다"고 고백하며 "평균연령이 높아서 경제력이 넉넉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신앙심은 결코 시골 수준이 아니라고 믿으며, 신앙의 열정과 순수함은 대도시의 큰 교회와 비교할 수 없다고 자부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 글을 우리 자녀들이 꼭 읽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피력하기도 했다.

▲  정읍성광교회 전경   © 리폼드뉴스

아래 글은 양재열 장로의 아들인 양참삼 목사(한양대학교 경영학부 명예교수)의 간증 글을 여기에 옮겨본다.


▲     © 리폼드뉴스
  
"나의 아버지 양재열 장로님을 생각하며"

양재열 장로의 아들인 양참삼 목사(한양대학교 경영학부 명예교수)


아버님이 소천한지 16년이 지났다 20011119, 우리 식구는 아버지를 주님의 품으로 보내야 했다. 워싱턴중앙장로교회에서 드린 고별예배 때 이원상 목사님이 설교를 하셨고, 총회장을 지내신 정읍성광교회 김도빈 목사님이 미국까지 오셔서 추도사를 하셨다. 나는 가족대표로서 인사를 했다. 더 오래 사실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가셨다.


아버님은 김제 성덕면 출신으로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청년기는 만주에서 보내셨다.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집사로 섬기던 가목사(佳木斯)교회가 폐쇄되었고, 남으로 내려와 김제와 고창을 거쳐 정읍에 자리를 잡았다. 정읍에 있을 때 지금의 정읍성광교회를 집사와 장로롤 섬겼다.


정읍성광교회는 전에 정읍제이교회, 서부교회로 불리다 새로운 성전건축과 더불어 정읍성광교회로 이름을 바꿨다. 아버지는 역전 사거리 근처 금융조합 건물을 매입하여 교회에 헌납했다. 그때부터 교회는 비가 오면 물바다가 되곤 했던 적산 가옥 신세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 후 인쇄사업을 통해 얻은 부를 모아 군청 앞에 대지를 사고 2층으로 석조 예배당을 지어 헌납하였다. 물론 교인들의 눈물 어린 기도와 헌신이 함께했다.


역전에 있던 교회는 나의 어린 추억이 묻어 있다. 토요일이 되면 교회에 나가 나무로 된 바닥에 물걸레질을 하곤 했다. 크리스마스 때면 온 교인이 가득 모여 찬양예배를 드렸다. 나는 어려서 자주 독창을 하라며 불림을 받곤 했다. 청중 앞에 설 때 얼마나 다리가 후들거리던지 안 나가려는 나를 달래느라 송영자 선생님이 애를 많이 먹었다. 6·25땐 아버지와 박상채 장로님이 교회를 지키기 위해 피난도 가지 못했었다.


아버님이 교회에 열심이기도 했지만 더 열심을 내게 된 이유도 있다. 민물고기를 좋아하신 아버님이 기생충 감염으로 간질을 앓게 된 것이다. 발병할 때 아버지 모습과, 이를 보며 몹시 당황해하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버지는 주님께 매달리며 살려주신다면 주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헌금도 많이 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라고 서약했다. 전주예수병원에서 뇌수술을 받았고, 기적적으로 회생하셨다. 정읍성광교회와 서울의 새한교회를 헌당할 때 감격하며 눈물을 흘리시던 아버님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우리 식구 모두 서울로 옮겨 생활하게 되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정읍성광교회와 연결고리를 가지고 믿음생활을 했다. 김홍래 목사님이나 김도빈 목사님과도 자주 왕래하며 교회 문제를 숙의했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김의환 목사를 모시고 새한교회를 섬겼다. 총회의 회계, 총신대학교 이사, 기독신문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교단의 부족한 재정을 뒷받침했다. 나아가 기독실업인회(CBMC), 아시아엽합신학원(ACTS)의 설립 등에도 함께함으로써 초교파적으로 활동하셨다. 아버지는 환갑을 지난 후 자식들이 사는 미국으로 가셨다. 워싱턴에서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만 78세의 나이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아버지는 본인의 서원대로 열심히 주님의 교회를 섬겼다. 그리고 힘에 부치도록 헌금하고 구제하는 일에 앞장섰다. 교회가 필요하면 재산을 바쳤고, 예산이 부족하면 기꺼이 나머지를 부담했다. 신학생들을 도왔고, 수많은 교회에 헌금을 했다. 아버지는 늘 헌금하면 할수록 주님께서 더 부어주셨다고 고백했다.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분이다. 어려운 사정을 어느 누구보다 이해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도우셨다.


중국이 개방되자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하셨다. 가목사교회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아버님은 하루에 1~2달러만 쓰고 가져간 모든 여비를 교회에 헌금했다. 또한 교회에 나오지 않는 옛 성도들을 찾아가 설득했다. 2000년 내가 그 교회를 방문했을 때 집사님 한 분이 이렇게 고백했다.


장로님이 나의 아파트에 들어섰을 때 나는 당신을 모른다며 문전박대했습니다. 문화혁명 당시 저는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중국이 개방되었다고는 하지만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몰라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의 장로님을 생각하면 너무 죄송합니다.”

 

그분은 지금 교회에서 권사님으로서 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다. 아버지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한 분이었다. 아버지는 가목사교회를 힘써 도왔고, 나에게도 힘써 도우라 부탁하셨다. 지금 그 교회는 가목사 지역 복음화의 전진 기지가 되었다.


아버지는 한마디로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평생 사랑한 분이셨다. 힘든 일이 많았겠지만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쾌활하고 적극적이며 열정적이셨다. 열린 마음을 가지고 교인들을 사랑하고 도왔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바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엄한 면도 있었다는 말이다.


이제 그 아버님은 우리 곁에 없다. 아버님이 살아 계실 때 하신 말씀을 나의 아내가 기록한 것이 있다. 정읍성광교회에 관한 것이어서 그것을 소개하며 아버님의 삶과 신앙을 다시 한 번 새겨보고자 한다. 정읍성광교회를 지금까지 지키시고 날로 발전하게 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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