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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인물/탐방
3·1절에 독립운동 시인 윤동주를 기리다
삼일절을 맞이하여 KBS 특집에서 발췌
기사입력: 2017/03/01 [17:37]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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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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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은 우리 민족에게 천사의 나팔 같은 시인이었다.

KBS 1TV에서는 3·1절 특집으로 <시인과 독립운동>을 방송했다. 2017년 윤동주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인 윤동주의 다른 이름 저항시인 독립운동가 윤동주를 만나는 여행을 KBS는 시인 소강석 목사(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 소강석 목사 후원)와 함께 준비했다. "저항시인 윤동주와 행동하는 시인 역사의 자랑이 되다" 에서 그의 삶을 재조명하는 내용을 발췌하여 올린다.

민족의 절정의 수난기에 희생당한 청년 윤동주, 그가 남긴 아름답고 정결한 시의 언어에는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윤동주의 치열한 노력과 그가 이루고 싶었던 일에 대한 의지가 녹아있음을 본다. 시와 행동을 통해 윤동주가 보여준 독립운동과 바른 저항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 것이다.

“바른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 시대에는 용기 있는 일이라면,  윤동주는 바른 저항을 해 왔던 사람이었다.” -야나기하라 야스코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의 모임>

윤동주에게 바른 저항의 길이란 한글로 시를 쓴다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이 내건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구호 아래 행해진 민족말살정책은 그로 인해 우리 문학계는 암흑기를 맞는다. 그러나 훗날 어둠의 시절에 한글로 쓰인 저항시인들의 시들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면서 시인들의 독립운동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오직 한글로만 시를 썼고, 죽는 날까지 한글을 버리지 못했던 문학청년 윤동주의 시, 그가 고수해 온 한글을 향한 의지, 글을 쓰겠다는 의지는 정신과 문화를 잃지 않으려 했던 저항이었다.  1940년대 혼란의 시기에 글로써 나라와 민족을 향해 이루고자 했던 바가 굳건했던 윤동주는 일본 유학 결정하면서 불가피하게 창씨개명을 하게 된다.

그의 시 <참회록> 속에 이러한 상황이 담담하게 녹아 있는데... 참회록을 비롯한 십자가, 슬픈 족속은 물론 생전에 활자화되었던 그의 동시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시대의 저항정신을 집중 조명한다.

“죽을 때까지 한글을 버리지 않고 한글 씨를 썼다는 것, 차원 높은 저항을 보여 준 윤동주야말로 진정한 애국자이다.” -우에노 준 <시인, 교수>

윤동주가 유학했던 1940년대의 일본은 혼란의 땅이었다.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벌이고 있던 전쟁의 패운이 짙어지자 일본은 그야말로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다.이러한 시대 배경 아래 일본의 심장부에서 행해진 윤동주는 저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일본에서 만난 여러 사람의 증언과 기록을 통해 윤동주가 교련 수업을 거부했고 일본 경찰에 장시간 감시를 받아 왔음을 알 수 있었다. 혼란의 땅에서 보여준 저항의 행동이었다.[제 경도 조선인 유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 판결문의 정밀한 분석을 통해 당시 윤동주가 일본에서 행한 독립운동의 세세한 기록을 전한다.

“일본의 심장부에서 징병제 반대를 외쳤다는 점,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과 연대해서 활동 했다는 점, 이런 것들은 일본 입장에서 가장 섬뜩한 활동이었을 것이다.” -서동일 박사 <국가보훈처 연구원>

윤동주의 감성과 지성을 바탕으로 한 예언자적 저항시와 신심을 쏟은 온몸의 이행을 통해 투쟁의 의지를 보여준 이육사의 저항시, 저항의 방식은 달랐지만 두 시인 모두 문화를 통한 민족적인 자긍심을 지키려 노력했던 독립 운동가였다. 두 시인을 통해서 한글 말살 정책 아래 고통 받던 많은 문인들이 변절했던 시절, 끝까지 우리말로 저항한 시인들의 절의에 대한 가치를 재조명한다.

“시는 언어의 결정체의 문학 형태이다. 시에 우리 민족의 정신과 의식을 승화시킨 결정체야 말로 독립운동의 맥을 이어갈 수 있는 소중한 문화 의식 주체이다.” -윤동철 <성결대학교 총장>

시인의 고향에서 윤동주와 이육사의 유족이 직접 전하는 이야기이다. 윤동주의 외할아버지 김약연 선생이 식솔들을 이끌고 정착해 일궈낸 조선인의 마을 북간도 명동에서 태어났다. 당시 마을 곳곳에 세워진 교회를 통해서 신앙심을 길렀고 선교사들과 독립 운동가들의 수업으로 구성된 학교를 다니면서 선진화 된 교육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애국심을 배양 받았다. 

지금도 명동촌의 옛 건물에 남아있는 태극기와 무궁화가 새겨진 기와 막새와 풍경, [별 헤는 밤] 속 윤동주가 그리워한 고향 북간도의 모습을 윤동주의 유족 윤형주의 동행 취재 하였다.

“당시 어른들이 가르친 독립심과 애국심을 윤동주가 성장해가면서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일제 치하의 고통 받는 우리 역사를 보면서 젊은 윤동주의 안타까움과 내면의 느낌들이 시로써 표출되기 시작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 -윤형주 장로 <가수, 윤동주 6촌 동생>

혼란의 시대에 윤동주가 보여준 독립운동의 기록들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민족의 등불이 되어 우리들이 혼란을 겪을 때마다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이정표가 되어주고 있다. 윤동주 시인은 일제의 혼란 속에 있었던 우리 민족에게 천사의 나팔 같은 시인이었다.

이석봉 목사 /
목회학박사요 철학박사이며 신학박사이다. 총회신학교와 총회연합신학교에서 학장을 역임했다. 총회신학교(학장/전 국회부의장 황성수 박사, 현 국제대학원대학교)에서 5년, 샌프란시스코 크리스천 유니버시티 하와이 브렌치(학장/티모씨 한 박사)에서 13년, 수원신학교(학장/이근구 박사)에서 10년간 성경원어교수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가르쳤다. 리폼드뉴스(www.reformednews.co.kr)의 논설위원이며 이석봉 목사 칼럼의 칼럼리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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