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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설교실습을 위한 16세기 청교도 노르위치(Norwich) ‘설교연구회’(Prophesying) 규정 연구 1
박태현(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실천신학)
기사입력: 2017/02/22 [12:07]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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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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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박태현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16세기 청교도 노르위치 설교연구회의 규정을 연구하여 현대교회가 추구해야 할 설교에 대해 바른 길을 제시하고 있다.

I. 들어가는 글

21세기 한국교회의 설교자 훈련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를 맞고 있다. 한국교회 안팎으로 들리는 목회자들의 부도덕한 실패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본고에서 그 원인을 일일이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원인들은 단순하지 않을뿐더러 목회 현장의 상황마다 다양하고 복잡하기가 이루 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봉사자들을 길러내야 하는 설교학 교수로서 현재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책임감 때문에 본고를 쓰게 되었다. 즉 지난 짧은 3년간 신학대학원 학생들의 설교 실습을 진행하면서 필자가 수업 가운데 얻은 중요한 깨달음에서 연유한다.

필자는 약 10년의 네덜란드 유학시절 아펠도른(Apeldoorn) 신학대학교에서 직접 경험한 설교실습 이론이자 방법을 사용하여 수업을 진행해 왔다. 이 설교실습 이론과 방법은 기본적으로 설교자들의 설교 능력 함양을 위한 목적을 갖고 있으며, 형제들의 건덕을 세우는 건전하고도 겸손한 비평 방식을 따른다.

따라서 이 설교실습은 성숙한 신앙 인격을 기본 조건으로 하며,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함과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는 잠언 27장 17절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여 함께 동역하는 설교자들의 건덕을 세우기 위해 질서 있고 겸손한 태도의 설교비평에 주목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설교실습의 성패(成敗)를 가르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설교실습의 유래가 되는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의 설교자 훈련을 간략하게 살펴본 뒤에, 영국 청교도의 노르위치(Norwich)의 ‘설교연구회’(prophesying)의 규정에 대한 간략한 해설과 그 원문을 번역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 지침에서 무엇보다도 성숙한 인격과 질서 있는 설교 훈련의 모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II. 펴는 글

1. 16세기 개신교의 설교자 훈련

(1) 취리히(Züich)의 ‘프로페짜이’(Prophezei)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태어난 개신교는 설교자 훈련의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었다. 그래서 스위스 취리히(Zürich)의 개혁자 훌드리히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는 개신교 설교자들의 훈련을 위해 하나의 제도를 고안하였다. 그것은 1525년 6월 19일 대성당(Großmünster)에서 공식적으로 시작된 ‘프로페짜이’(Prophezei, ‘설교연구회’)다. ‘프로페짜이’는 고린도전서 14장 29-31절에 근거하여 성경을 강해하고 설교하는 ‘연속강해’(lectio continua) 형식의 목회자 설교 훈련 모임으로서, 그 핵심은 성경을 성경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연구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프로페짜이’는 개혁파 설교자들의 교육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제도로서 개혁파 교회의 중심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강해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었다. 16세기 당시 ‘예언’(Prophezei 혹은 prophesying)이란 용어는 주로 설교를 의미했다. 이 ‘프로페짜이’(‘설교연구회’)에는 일반 교인들도 참여할 수 있었지만, 목회자들과 목회자 후보생들의 성경 연구와 신학 훈련을 주된 목적으로 하였다. 황대우는 이 ‘프로페짜이’가 진행된 방식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소개한다.

‘예언연구회’ 모임은 예배일인 주일과 장날인 금요일을 제외한 나머지 평일 오전 7시(겨울에는 8시)에 시작되었는데, 모임순서는 먼저 츠빙글리가 강단에 올라가 기도한 후, 학생 한 명이 라틴어 번역 성경 불가타(Vulgata)를 낭독하면, 세 번째 사람이 동일한 본문의 히브리어 성경을 낭독하고, 네 번째 사람이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인 셉투아긴타(Septuaginta)의 본문을 낭독한 후 본문의 의미를 요약하고 간단한 설명을 덧붙인 다음, 다섯 번째 사람이 나와 낭독한 본문을 라틴어로 설명하면서 교육하고 나면, 여섯 번째 사람(대부분은 레오 유트(Leo Jud) 혹은 카스파르 메간더(Kaspar Megander)가 담당했지만, 때로는 츠빙글리 자신이 맡기도 했다)이 나와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일반 시민들을 위해 독일어로 설교하면서 구체적인 적용까지 제시했다.

‘프로페짜이’ 는 설교자들의 훈련으로 그치고 만 것이 아니라, 그 파생적 효과가 컸다. 즉 ‘프로페짜이’에서 취급된 성경 본문이 독일어 성경, Züricher Bible(1531), 네덜란드어 성경, Deuxaesbijbel(1562)으로 출판되었고, 일련의 성경 주석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요컨대, 종교개혁 초기에 개신교 설교자들을 돕기 위한 ‘프로페짜이’는 스위스 도시들과 독일 남부의 도시들, 네덜란드, 그리고 멀리 영국에까지 영향을 미쳐 유사한 설교훈련 제도와 기구들의 모델이 되었다.

(2) 제네바(Geneva)의 ‘꽁그레가시옹’(Congréations)

취리히의 ‘프로페짜이’는 약 10년 후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과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에 의해 스위스 제네바(Geneva)에도 도입되었다. 제네바에서는 ‘꽁그레가시옹’(Congrégations)이란 이름으로 매주 금요일마다 성 베드로(St. Pierre) 교회당에서 모였다. 이 모임은 취리히와 달리 모든 목회자들은 반드시 의무적으로 참석해야만 했다. 특히 제네바 교인들의 빈번하고도 자발적인 ‘꽁그레가시옹’ 참여는 미미하게 소극적으로만 참여했던 취리히 일반 교인들의 ‘프로페짜이’와는 대조적이다. 엘시 맥키(Elsie A. McKee)는 ‘꽁그레가시옹’을 “일종의 설교실습” 모임으로 이해하는데, 왜냐하면 여기에 참여한 목사들은 선택된 성경 본문을 강해하고 대중들에게 자국어로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제네바의 주간 성경연구이자 설교실습인 ‘꽁그레가시옹’이 지닌 목적과 절차는 1541년 ‘제네바 교회법’에서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졌고, 어느 정도 1561년의 ‘제네바 교회법’의 기초로까지 확대되었다. 이런 점에서 제네바의 ‘꽁그레가시옹’은 설교자들의 성경 연구와 설교 훈련을 제도화함으로써 더욱 공고히 하려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3) 영국의 ‘프로페사잉’(prophesying)

취리히의 ‘프로페짜이’는 다시금 영국 에드워드 6세(Edward VI, 1547-1553) 통치 하에 영국 런던의 피난민 교회에서 목회하였던 존 아 라스코(John àLasco, 1499-1560)를 통해 영국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청교도의 요람인 캠브리지(Cambridge)에서는 크라이스트 칼리지(Christ’s College)의 로렌스 채더톤(Laurence Chaderton, 1536-1640)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활발한 모임으로 발전하였다. 영국에서는 취리히의 ‘프로페짜이’를 그대로 영어로 번역한 ‘프로페사잉’(prophesying, ‘설교연구회’)이라는 이름으로 설교자 훈련이 시행되었는데, 이 ‘설교연구회’는 일차적으로 목회자들의 성경 연구를 진작시키고 설교 사역을 향상시키기 위한 제도였다. 16 세기 당시 영국개신교회의 형편은 그리 녹록하지 못하였다. 로마교를 숭배하였던 ‘피의 메리’(Bloody Mary, 1553-1558)의 통치 하에 많은 개신교 목사들이 추방되거나 처형되었기에 설교할 수 있는 목회자가 대단히 부족하였다. 또한 엘리자베스1세 (Elizabeth I, 1558-1603)는 자신의 정치적 의도를 따라 한 주(州, county)마다 출판된 설교문을 읽을 수 있는 서너 명의 설교자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목회자 훈련에 부정적이었다. 그녀는 캔터베리(Canterbury) 대주교인 에드먼드 그린달(Edmund Grindal, 1575-1583)에게 ‘설교연구회’를 억압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설교연구회’의 필요성과 그 유용성을 절감한 그린달은 오히려 “하늘의 하나님을 거역하느니 차라리 지상의 여왕을 거역하는 편을 택하겠다”고 고백함으로써 여왕에게 ‘설교연구회’의 존속을 호소하기까지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대주교직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따라서 성도들은 교회에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기에 자연스레 가장 기초적인 기독교 교리조차 알지 못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개선하기 위하여 청교도들은 ‘설교연구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2. 노르위치(Norwich)의 ‘설교연구회’ 규정 해설

‘주교 공석’(Sede Vacante)시에 시작된 1575년 노르위치(Norwich)의 설교연구회’ 규정은 이 모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이 규정에 따른 ‘설교연구회’의 모임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먼저 ‘설교연구회’ 자체이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설교연구회’ 끝난 뒤 모임이다.

‘설교연구회’는 노르위치(Norwich)의 크라이스트 처치(Christ’s church)에서 매주 월요일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개최되었고, 첫 번째 연사(speaker)에게는 45분이 할당되었고, 나머지 시간은 다른 연사들에게 할당되었다. ‘설교연구회’에서 설교하기에 적합하다고 평가를 받은 연사들의 이름이 ‘서판’(Table)에 기록되었고, 모든 연사들은 본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그들의 과제는 일차적으로 본문을 쪼개어 성령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들이 언제나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했던 것은 나중에 잘 적용될 수 있고, 설교에서 교리나 방법에 관하여 보다 상세하게 취급될 것들을 간단히, 요약적으로, 그리고 명백하게 관찰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본문은 성령의 뜻을 잘 드러내기 위해 적절하게 취급되어야 했다. 동시에 성경의 가르침은 반드시 삶을 위한 교리로서 거룩한 생활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설교에서의 하나님 말씀의 강해와 실천적 적용이 그 중심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즉 설교자는 본문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하며, 오직 본문의 의미를 쪼개어 성령의 의미를 드러내는데 집중해야만 한다.

동시에 그 본문의 강해는 반드시 청중들의 삶에 유익하고 거룩한 삶을 촉구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연사의 설교가 있은 후, ‘설교연구회’에 참석한 나머지 사람들은 동일한 본문에 대해 언급하되, 앞서 언급된 동일한 순서를 따라 행하되 반복을 피하고 무언가를 덧붙이는데 조심스럽고도 존중하는 마음으로 언급해야 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논쟁하거나 다툼을 일으키려는 태도를 버리고 오로지 진리가 옹호됨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이단들은 쓸데없이 언급할 필요가 없으며, 다시금 유행하는 이단들은 성경의 증거로 반드시 타도해야 했다. 특히 설교에서는 건설적 논의를 위한 경우를 제외하곤 라틴어나 헬라어, 히브리어를 쓰는 대신 반드시 영어로 말해야 했다. 이런 식으로 ‘설교연구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차례를 따라 질서 있게 말할 기회를 얻어 공손한 마음으로 발언해야 했다. 약속된 두 시간이 다 지났을 경우, 첫 번째 연사가 교회 전체와 모든 사회적 신분들, 여왕, 추밀원을 위해 간략하게 기도하고, 여왕과 이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자비하심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곧바로 끝내야 했다.

여기서 우리는 설교자의 설교를 비평하는 자들의 목적과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그 비평의 목적은 논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진리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비평하는 자들의 태도는 설교자의 설교를 존중하는 마음과 공손한 마음으로 발언하는 성숙한 자세를 요구하고 있다. 동시에 설교 비평에 있어서 형식적으로는 질서를 따라 발언해야 했다.

‘설교연구회’가 끝난 뒤, ‘설교연구회’의 의장은 첫 번째 연사의 설교에 관한 전반적인 요소들을 참여한 자들과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시간에는 ‘설교연구회’에 참여한 다른 연사들에 대한 토론도 포함되었는데, 그들은 형제들의 이름으로 주어진 권면을 하나님을 공경함으로 수용해야 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겸손한 태도로 형제들의 판단을 수용하고 신뢰해야 했다. 혹여나 교만하거나 무례한 태도로 응수할 경우에는 ‘설교연구회’의 서판에서 그 이름이 지워지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경우에는 더욱 엄격한 권징으로 다스려졌다.

여기서 우리는 ‘설교연구회’가 진행된 절차뿐만 아니라 참석한 자들의 경건한 태도를 목도할 수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협력하는 모습이다. 특히 형제간의 권면을 멸시하는 교만한 태도 혹은 무례한 태도를 시정하기 위한 엄격한 권징의 시행은 ‘설교연구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필수적 조처였음을 볼 수 있다.

형제들의 이름으로 주어진 권면이 있고 난 다음, 본문으로부터 정당하게 발생할 수도 있는 어떤 의심스런 문제는 학식 있는 형제들이 그 의혹을 풀어주어야 했다. 의혹이 충분히 풀리지 않았을 경우, 질문의 중대성에 비추어 형제들의 동의를 얻어 그 문제는 다음 시간까지 연기되어야 하고, 다음 ‘설교연구회’ 일자의 연사가 자신의 연설 초두에 그 문제를 다루어야 했다. 하지만 그가 충분히 다룰 수 없다고 판단되거나, 그렇게 중대한 문제 다루기를 겸손히 거절할 경우, 회합에서 형제들이 다시 검토해야 했다.

우리는 ‘설교연구회’에서 다룬 본문이 제기하는 정당한 문제 혹은 의혹은 가볍게 지나치거나 무시하지 않고, 참여한 형제들의 충분한 의논과 검토를 통해 확정하려는 조심스럽고도 신중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 어떤 개인적인 권위를 내세워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형제들의 협력을 통해 진리를 밝히고 옹호하려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1575년도에 노르위치(Norwich)의 ‘설교연구회’의 규정 원문을 직접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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