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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인의 성품 2
이상원(총신대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기사입력: 2016/12/28 [10:32]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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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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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상원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의 성품에 대해여 살피고, 이중적 형상론에 근거한 그리스도인의 품성의 개발에 대해여 제시하고 있다.

II. 이중적 형상론에 근거한 그리스도인의 품성의 계발

그리스도인의 품성을 계발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품성이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하게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형상이 이중적인 의미로 제시되었으므로 이중적으로 제시된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들이 품성의 계발의 방향을 어떻게 지도하는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넓은 의미의 형상은 두 가지 내용을 담지하고 있는데 하나는 인간은 영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영적 실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을 지닌 자로서 자신의 선택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고 또한 져야하는 책임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좁은 의미의 형상은 하나님과의 관련 안에서 참된 지식, 거룩성, 의로움을 추구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들이 각각 그리스도의 품성의 계발의 방향을 어떻게 지도하는가를 검토해 보자.

a. 영원에 뿌리를 둔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

현대인과 현대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는 유물론(materialism)이다. 유물론은 영적 실재이신 하나님의 실재나 인간의 영혼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고 인간을 오직 물질로만 구성된 존재로 파악하고자 하는 세계해석체계를 통칭하는 용어다. 그러면 유물론은 정신활동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유물론은 인간의 영혼활동 혹은 정신활동을 모두 물질적인 요소들의 상호작용의 결과 잠정적으로 생성된 가상현실로 설명해 버린다(환원론, reductionism). 정신활동을 물질들 가운데 어떤 요소들의 상호 작용으로 설명하는가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유물론이 존재한다. 프로이드처럼 정신활동을 심리적 기전으로 설명해 버리는 심리학적 환원론, 경제적 재화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해 버리는 마르크스의 유물사관, 사회적 구조의 메카니즘으로 설명해 버리는 뒤르껭식의 사회학적 환원론, 도킨스처럼 유전자의 작용으로 설명해 버리는 유전자 결정론 등이 그것이다.

유물론적 관점에서 인간과 사회를 보게 되면 인간과 사회의 정신적인 사막화가 초래되는 것은 필연이다. 인간은 동물이나 기계들과 다를 것이 없는 존재들로 격하되어 인간의 존엄성이 심각하게 훼손된다. 최근에 들어 와서 터미네이터 등과 같은 기계인간을 다룬 영화들이 인기를 끄는 것도 현대인들이 유물론적 인간관에 장악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유물론적 인간관의 관점에서 볼 때 물질들의 작용이 인간의 전부이기 때문에 물질들의 작용이 원활하지 않으면 인간으로서의 가치도 급격히 하락된다. 혼수상태의 환자나 자궁 속에 있는 태아들이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하여 안락사와 낙태가 버젓이 행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장애자, 노인들, 병자들이 정상적인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위기에 몰린다. 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쾌락을 누리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적으로 인식됨에 따라 사람들은 쾌락주의에 빠져 성적 방종, 도박, 마약 복용등이 만연하게 된다. 사람들은 맘모니즘(Mammonism)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인간과 사회는 황폐화된다. 그러나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파악하는 형상론은 인간을 외형적인 물질들의 상호작용으로만 보지 않고 물질적 작용의 배후에 영혼이 실재한다고 파악한다. 창세기2장7절은 하나님이 영혼을 창조하셔서 흙으로 된 몸 안에 불어 넣어 주신 순간부터 흙으로 된 몸이 생물학적 작동을 시작했음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몸의 생물학적 작용이 실재하는 영혼의 작용의 결과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의 몸이 작동한다는 것은 영혼이 실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다. 영혼의 실재를 전제하지 않는 한 몸의 작용을 설명할 수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주에서 이루어지는 물질들의 운동은 영이신 하나님의 실재를 전제하지 않고는 설명할 길이 없으며, 하나님의 실재가 없는 한 우주의 물질들의 운동도 없다. 인간의 영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인간의 영의 활동이 무궁무진할 정도로 풍부함을 뜻한다. 인류역사에 등장한 엄청난 규모의 철학서들, 문학서들, 미술과 예술 활동, 과학과 과학기술의 발전, 정치경제적 활동 등은 인간의 영혼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형상임을 시사한다.

더욱이 영적 존재인 인간은 하나님과 교통하며, 무엇보다도 인간은 영원히 존재하면서 영원을 추구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현대문화의 대세를 형성하고 있는 유물론에 의하여 사막화되고 비인간화되어 가고 있는 현대인들과 현대사회에 대응하여 영원에 뿌리박은 영적 존재로서의 자아관를 명확하게 확립하고 영원까지 맞닿아 있는 풍부한 정신적이고 영적인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물질의 세계가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며, 풍요로운 영적인 세계를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b. 책임적 존재로서의 인간

최근 한국 사회에서 화두로 떠오른 윤리적인 문제들 중에는 자살과 동성애 문제가 있다. 이 두 문제들에 대한 논쟁은 이 행위들이 윤리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이 논쟁에서 이 행위들이 윤리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변호하는 강력한 논증들이 등장한다. 자살에 대해서는 심리학적인 변호논증과 사회학적인 변호논증이 등장했다.

심리학적인 자살옹호논증은 프로이드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삶의 충동과 죽음의 충동이 본능적 충동으로 주어져 있다. 이 충동들이 본능적 충동으로 주어져 있다는 말은 이 충동들이 작동하면 인간은 어떤 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없고 이 충동에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삶에의 충동이 어떤 사람을 지배하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 수밖에 없고 죽음에의 충동이 그를 지배하면 역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살은 죽음에의 충동이 사람을 지배할 때 나타나는 행위이므로 도덕적인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학적인 자살옹호논증은 에밀 뒤르껭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뒤르껭에 따르면 사회로부터 소외되거나 사회에 대한 소속의식이 지나치게 강하거나 도덕적 규범을 생각할 여지가 없게 만드는 공황상태를 만나면 자신의 도덕적 의지와 상관없이 자살을 결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최근의 동성애주의자들은 동성애가 이성애와 다름없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성적 지향이므로 윤리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전개한다. 현대의 심리학, 사회학, 생명과학은 인간을 더 깊이 새롭게 이해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인간의 행동의 작동원인을 심리학적인 메카니즘이나 사회구조의 힘이나 생물학적인 기전 등으로 결정론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인간이 자기의 행동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점차 없애 버린다. 그 결과 인간이 비인간화되고 비도덕화된다.

그러나 형상론은 인간을 인격적 존재로서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이며, 따라서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엄중한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는 책임적 존재로 제시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출3:14)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은 하나님은 그 존재를 어떤 피조물에 의존하는 존재가 아니며, 또한 어떤 행동을 하실 때 피조물에게 기원한 어떤 원인에 결정론적으로 의존하여 행하시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 실재하시며 스스로 결단하여 행동하시는 주권적인 존재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주권성이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성에도 반영되어 있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신 것처럼 인간은 일정한 한계 안에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도덕적인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어떤 본능이나 기계작동의 원리에 따라서 움직이는 짐승이나 로봇과 같은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다. 하나님으로부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에 대한 설명을 들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느냐의 여부는 전적으로 아담과 하와의 선택의 능력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엄중한 책임을 물으셨다. 어떤 행동을 할 때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도 상실되지 않고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 곧, 넓은 의미의 형상이다.

타락한 인류는 죄를 범했다고 해서 죄수(罪獸)로 전락하지 않고 여전히 죄인(罪人)으로 남을 수 있는 이유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고 인간을 해방시킨다는 구실을 대면서 인간을 성장환경, 심리적인 메카니즘, 사회의 구조적인 힘, 유전적 정보 등에 의하여 결정론적으로 끌려 다니는 로봇이나 짐승과 같은 비도덕적인 존재로 전락시켜 가고 있는 현대의 이념적인 사조들에 대응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을 가진 자로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과 사회 앞에서 책임을 질 수 있고 또한 져야 하는 인격자라는 자아 정체성을 분명하게 확립해야 한다.

c.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참된 지식

로마서1장19절과 20절은 이렇게 말한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이 본문은 모든 인류 안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 곧 신 인식 능력이 주어져 있고 자연만물 안에는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 곧, 이 세계가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주어져 있어서, 적어도 모든 인간들은 신 인식능력과 자연만물 안에 있는 증거들에 정직하게 주목하기만 하면 이 세계가 인격적 창조주에 의하여 창조된 세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한다. 신인식 능력과 만물 안에 나타난 증거들이 있기 때문에 신 존재논증이 성립된다.

그러나 칼빈은 모든 인간 안에 내재해 있는 신 인식 능력의 기능이 두더쥐보다도 더 못한 맹인의 정도밖에는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한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말의 첫 번째 의미는 로마서1장21절과 23절을 반영하는 진술이다. 모든 인간에게 창조주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계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패하고 왜곡된 인간의 마음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피조물을 하나님으로 떠받드는 우상숭배 속에 빠져 들었다.

여하튼 우상숭배는 신이라는 실재가 –그 신에 대한 인식이 아무리 왜곡된 것이라 할지라도 –실재할 수 있음을 희미하게나마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 안에 신 인식 능력이 있음을 반증한다.

그러나 타락한 인류는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알아야 할 두 가지 신지식에 대해서는 아주 희미한 그림자조차도 발견해내지 못했다. 첫째로,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실재하신다. 그러나 어떤 종교가나 철학자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못했다. 둘째로,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인식은 모든 문명권에 보편화된 인식이며, 모든 인간은 육체적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은 보편적인 경험적 현실이다. 이로 인하여 모든 인류는 비참한 정죄에 빠져 있으며, 모든 인류는 이 비참한 정죄로부터 해방되기를 열망한다.

이 비참한 정죄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인식은 마음속에 있는 신 인식기능을 가지고는 그림자조차도 만날 수 없었다. 석가모니는 동양에서 가장 깊은 사색을 전개한 철인이라고 할 수 있고 임마누엘 칸트는 서양에서 가장 깊은 사색을 전개한 철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두 사람의 신에 관한 글에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십자가의 구원의 길에 대해서는 아주 작은 실마리조차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두 지식이 없으면 기독교신학과 윤리의 뚜껑조차도 열 수가 없다.

이 두 가지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점차 체험되고 획득되어 가는 신지식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인류가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길이 계시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시한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모든 인류가 받아 야 할 죄에 대한 형벌을 십자가 위에서 자기의 아들에게 쏟아부으시기로 계획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의 계획에 순종하여 실제로 십자가 위에서 인류가 받아야 할 죄에 대한 모든 형벌을 남김없이 대신 받으심으로써 온 인류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객관적 터전을 마련하셨다. 이제 성부와 성자께서는 이 객관적 구속사역에 근거하여 성령을 보내셔서 믿는 모든 자들을 주관적으로 구속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며, 성령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속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며, 의롭다 하시며, 양자로 삼으신 후에는 겉 사람 속에 들어오셔서 겉 사람을 성화시켜 가는 작업을 수행할 준비를 하신다. 성령세례를 통하여 거듭난 신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간단없이 사모하고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함으로써 속사람 속에 계신 성령께서 겉 사람의 영역까지도 죄의 잔재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모습으로 형성되어 가도록 해야 한다.

d.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참된 거룩성

거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다쉬와 헬라어 하기아제인의 기본적인 의미는 “구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거듭나고 그리스 도 안에 연합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과는 구별된 삶을 시작하며, 세상과 구별된 삶은 세상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삶에 임하는 태도와는 구별된 태도를 가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태도는 어떤 점에서 차별화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다양한 답변을 할 수가 있으나 가장 핵심적인 답변은 로마서12장2절에 축약되어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본문은 마음이 새롭게 되고 변화된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삶의 태도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요약한다. 변화된 삶의 태도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라면 변화되지 않는 이방 백성들의 삶의 태도는 무엇일까? 바로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다.

불신자들의 삶의 특징은 자기를 기쁘게 하고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자기성취를 추구하는 것이다. 철학적 윤리학의 특징은 “합리화하는 윤리”(rationalizing ethics)다. 합리화란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조건과 재화와 상황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활용하여 자기 자신의 삶의 계획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추구하는 태도를 뜻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철학적 윤리학은 자기중심적인 윤리학이라는 뜻이다. 철학적 윤리학에 나타나는 이와 같은 자기중심성은 현대의 정치경제의 영역까지도 장악하고 있다. 1900년대 초 공산주의 계획경제체제가 무너진 후 세계의 경제의 영역에서 사실상의 유일한 경제사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자유 시장경제는 아담 스미스의 경제관이 핵심을 이루고 있는데, 아담 스미스는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고 파악하고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라는 인간학적 토대 위에서 경제체제를 구축했다. 아담 스미스는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우회하는 경제체제는 성공할 수 없다고 보고 이기적인 욕구를 최대한 자유롭게 추구하는 것을 정당화시켜주는 방향으로 경제체제를 구축했다. 자유시장경제는 마르크스주의라는 최대의 난적과의 대결에서도 승리하고 3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살아남아 오늘날에는 세계경제를 지배하는 유일한 경제체제로 자리 잡았다. 또한 현대의 민주주의 정치구조의 주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시민들의 요구권(claim rights)을 보장해 주는 것인데, 요구권의 본질은 모든 시민들은 시민들 자신의 정치적 이익이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적어도 현대인과 현대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자기중심주의의 이념에 대응하여 성경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태도 곧, 자기의 이익을 희생하고 타인의 안녕을 추구하는 이타주의를 구별된 삶의 태도로서 제안한다. 이타주의는 성경이 말하는 사랑 곧 아가페의 본질 가운데 하나다. 로마서12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임을 밝힌 후에 그 삶의 본질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아가페 사랑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자기를 희생하고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태도는 인간의 자연적인 품성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태도는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연적인 품성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타주의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타주의의 완벽한 롤 모델을 보여 주셨는 바,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이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에서 발견되는 원리가 바로 아가페 곧, 이타주의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죽으실 필요가 전혀 없으셨고, 오직 그리고 전적으로 타인 곧 인류를 위해서 죽으셨다.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을 묵상하면서 이 죽으심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면 바로 아가페 사랑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이타주의의 원리를 자기 자신의 자질과 성품으로 내면화시켜야 한다. 아가페 사랑은 고린도전서13장4절에서 7절이 보여주는 것처럼 오래 참는 것을 본질로 하는 열다 섯 가지 내적인 태도들로 표현된다. 또한 갈라디아서5장22절과 23절에 등장하는 아홉 가지 열매는 아가페 사랑으로부터 시작된다. 곧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과 같은 여덟 가지 열매들이 아가페 사랑의 내용이다.

e.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참된 의

현실 속에서의 인간과 사회는 정의의 상황(the circumstances of justice)에 처해 있다. 정의의 상황이란 시민들이 필요로 하는 재화의 양에 비하여 공급이 가능한 재화의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공정한 분배를 위한 원리들과 이 원리들을 시행하는 권력기관을 요청하는 상황을 뜻한다. 정의의 상황은 두 가지 요인들에 의하여 형성된다. 하나는 객관적인 정의의 상황으로서 이른바 자원의 희소성(the scarcity of goods)이다. 시민들이 자신의 삶의 계획을 이루는 데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정치적 재화와 경제적 재화의 경우에 자원의 희소성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정치적 재화의 경우를 예로 들면,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삶의 계획을 가진 사람이 만 명인 반면에 대통령 자리는 하나밖에 없다. 시민들이 자신의 삶의 계획을 이루려면 돈이 필요한데, 돈은 항상 부족하다. 다른 하나는 주관적 정의의 상황으로서 주관적인 정의의 상황은 시민들의 상호무관심을 뜻한다. 가뜩이나 재화가 부족한 상황에서 시민들이라도 서로 양보하고 자신의 삶의 계획을 실현하는 것보다 타인의 삶의 계획을 실현하는 것을 더 배려한다면 숨통이 트일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은 이기주의자들이라서 단지 자기 자신들의 삶의 계획을 실현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을 뿐, 타인들의 삶의 계획을 이루는 일에는 무관심하다. 주관적인 정의의 상황은 사태를 가일층 악화시킨다. 따라서 정의의 상황을 자연 상태 그대로 방임해 두면 사회는 급속하게 불평등하고 불안정한 사회로 전락해 버린다. 부의 속성으로 볼 때 가진 자는 더욱 많은 것을 축적하게 되고 가지지 못한 자는 더 많은 것을 박탈당하게 되고, 시민들 상호간의 인격적인 신뢰는 무너지고 사회의 유기적인 연대성(solidarity)이 손상되고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게 된다.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대응은 무엇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어야 할 세 가지 하나님의 형상들 가운데 하나는 의다. 의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체데크와 헬라어 디카이오스는 기본적으로 어떤 이상적 규범에 부합하는 이상적인 상태를 뜻한다. 의는 신학적인 관점으로부터 정치 경제사회를 포함하는 삶의 전 영역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용어다.

신학적인 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을 핵심으로 하는 구속사건의 특징을 나타낸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아담과 하와를 포함한 모든 인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죄에 대한 책임과 오염으로 인하여 심각하게 손상되어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이상적인 상태에서 어긋난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이 왜곡된 상태를 원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이 범한 죄에 상응하는 형벌을 내리심으로써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키셔야만 했다. 온 인류가 범한 무한에 가까운 규모의 죄를 담당하실 수 있는 분은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뿐이었다. 마침내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 온 인류가 받아야 할 형벌을 쏟아 부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에게 순종하여 이 쏟아 부음을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다. 이 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자들에게 전가되었으며, 값없이 의를 전가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의를 롤-모델로 삼아 의를 구현하는 삶을 살아냄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야 할 소명이 부과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이 회복해야 할 의 안에는 개인의 삶 속에서 죄로 말미암아 왜곡된 모든 것들을 바람직한 바른 상태로 회복시켜야 할 의무가 포함되지만, 모든 인류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져 있는 정의의 감각을 예리하게 다듬고 회복시켜서 정치 및 경제사회에서 정의를 회복해야 할 의무도 포함된다. 정치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죄를 제어하기 위하여 주신 일반은총의 장치들인 마음의 도덕법, 기록된 도덕법, 실정법 등과 같은 포괄적인 신법(神法, the divine laws)체계들을 규범적인 표준으로 삼으면서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들을 공정하게 조정하여 공정하고 유지 가능한 사회로 형성시켜 가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경제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사회 안에 있는 약자들의 재정적 보호를 최우선적으로 배려했던 구약의 경제관련 시민법 규정들의 정신을 살려서 자기 힘으로 생계유지가 어려운 한계 계층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사회적 안전망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

나가는 말

하나님은 인간을 특별히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심으로써 다른 동물들로부터 차별화하는 동시에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가 가능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제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품성을 갖출 수 있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여 원죄가 형성되고 원죄에다가 모든 인류가 누적적으로 범하는 죄들이 축적되면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차별화된 인격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을 정도는 남아 있지만 그 이상의 풍부한 내용은 심각하게 손상되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품성도 상당부분 상실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형상의 상실은 타락한 이후의 세계의 전체적인 왜곡의 근원이다. 따라서 왜곡된 세계의 회복은 타락한 품성의 회복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지만 흐릿하게 인식되어 온 넓은 의미의 형상은 한층 더 밝고 예리하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모든 인류는 육체는 소멸되지만 영혼은 소멸되지 않고 영구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자명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인간의 영혼은 육체의 작용의 결과 떠 올랐다가 소멸되어 없어지는 환영인 것으로 오해하는 유물론적인 환원주의에 빠져 있으며, 영이신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명확한 증거들이 자신들의 마음과 자연만물 안에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질의 세계 외에는 어떤 영적 존재로서의 창조주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과 물질의 일부를 우상화하는 우상숭배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은 이와 같은 세계를 향하여 영혼은 실재하며 영존한다는 자아 정체성을 분명히 세워야 하며, 물질의 세계 뒤에는 영이신 인격적인 창조주가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변증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현대세계는 인간의 행위를 심리학적, 사회학적, 생물학적인 메카니즘으로 환원시켜 해명함으로써 인간과 사회를 비인격적 존재들의 집합으로 전락시키고 있으나, 하나님의 형상론은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을 지닌 자로서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임을 명확히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세계를 향하여 인간은 결코 물질적인 메카니즘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비록 타락하여 죄를 범했으나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인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을 여전히 지닌 책임적 존재임을 선언함으로써 인간을 비인격화시켜 가고 있는 현대의 물질문명에 대하여 도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과 연구, 성령의 충만한 능력과 인격적인 지도, 성도들과의 교제 등을 통하여 비그리스도인들과는 차별화된 영적인 품성을 견실하게 계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연구와 깊은 기도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십자가 위에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구속주를 깊고 넓게 알아가야 하며, 자기중심성에 따라서 살아가는 이방세계와는 차별화되는 아가페 사랑과 이에 뒤따르는 풍부한 인격적인 덕목들로써 자신의 품성들을 견실하게 채워가야 하며, 이와 같은 견실한 품성의 바탕 위에서 사회정의의 실천을 위하여 헌신하여 뒤틀려지고 약자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왜곡된 사회구조를 변혁시켜 가는 일에 앞장설 수 있어야 한다.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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