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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어거스틴의 중보자 그리스도의 인격 이해 2
문병호(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기사입력: 2016/11/02 [09:22]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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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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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    ©리폼드뉴스

이 글은 문병호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여기서 어거스틴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구체적으로 깊이 연구하여 제시하고 있다.

4. 신인양성의 위격적 연합: 한 인격 양성론

어거스틴은 성육신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양성의 인격을 논하기 전에 그가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확정한다. 성자는 성부와 함께 “나는 스스로 있는 자(Ego sum qui sum)”라고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이시다(출 3:14).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며 모든 것을 함께 보시고, 인식하시고, 뜻하시고, 행하신다(요 5:19). 그 동일하신 아들이 육신을 취하심으로 사람의 아들이 되셨으므로, 그가 신인양성의 중보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는 바가 아버지의 뜻하시는 바와 충돌되거나, 배치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
 
아들은 오직 “아버지의 말씀(Verbum Patris)”과 “아버지의 가르침(doctrina Patris)”으로서, 우리를 위한 “빛(lumen)”과 “진리(veritas)”와 “영생(vita aeterna)”이 되시기 때문이다. 성자에게 고유하게 돌려지는 위격적 특성이 사람이 되신 그의 신인양성의 인격에 동일하게 돌려진다. 그리하여 신인양성의 위격적 연합에 따른 그리스도의 중보가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이듯이 성도도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데 이르게 한다(요 10:30; 롬 8:17; 히 1:21).
 
어거스틴이 성자의 인격과 신인양성의 중보자의 인격이 동일함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구원론적 동기에 기인한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그 서장(序章)에서부터 두 나심을 말하는 요한복음의 가르침으로부터 주로 도출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도가 “승리자시며 패배자(victor et victima)”시고, “제사장이시며 제물(sacerdos et sacrificium)”이시며, “목자(pastor)”시며 “양”이시라는 사실이 부각된다.
 
그 요체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서 우리의 주(dominus)와 종(servus)이 되신다는 사실에 있다. 그는 아버지와 동일하신 주시나 우리를 위하여 종이 되셨다. 이는 오직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신 그 분에게만 돌려질 수 있다. 어거스틴은 여기에 기독론의 핵심이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우리가 제 2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앙고백의 신앙교육을 다룬 글에서조차, 성육신을 어떤 교리적 조목보다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정통기독론이 개진하는 위격적 연합 교리는 성육신에 있어서 영원히 신성으로 계시는 성자의 인격이 인성을 취하심으로 그 동일한 한 인격 가운에 신성과 인성이 함께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인격(persona)은 구체(具體, concretum) 혹은 기체(基體, suppositum)로서 주체(主體, subjectum)가 되나, 신성과 인성의 본성(natura)은 각각의 고유한 속성들을 지닌 추상(abstractum)으로서 독자적으로 인격이 되지는 못하고(anhypostasis) 언제나 인격 안에 존재한다.
 
이러한 입장에 서서 어거스틴은 위격적 연합을 성육신 교리의 핵심으로 개진한다. 중보자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에 따라서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며 그의 인성에 따라서는 타락한 피조물을 회복시킨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사람을 지으신 분이 사람이 되셨다고 한 것이나 “그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를 지으셨다(ipse creavit matrem suam)”고 한 것이 이를 전형적으로 대변한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입장은 그가 중보자 그리스도의 어떠하심과 사역을 “하나님의 본체에 따라서(secundum formam Dei)”와 “종의 형체에 따라서(secundum formam servi)”라는 말을 수사학적으로 반복함으로써 부각시키는 다음에 현저히 나타난다.

하나님의 본체에 따라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어졌다(요 1:3). 종의 형체에 따라서, 그 자신이 여자에게서 나셨다(갈 4:4). 하나님의 본체에 따라서, 그 자신과 성부는 하나이시다(요 10:30). 종의 형체에 따라서, 그가 오신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하심이었다(요 6:38-39). 하나님의 본체에 따라서,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요 5:26).
 
종의 형체에 따라서, 그는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고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신다(마 26:38-39). 하나님의 본체에 따라서,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다(요일 5:20). 종의 형체에 따라서, 그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하나님의 본체에 따라서, 성부에게 있는 것은 다 그의 것이며(요 16:15),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라 말씀하신다(요 17:10). 종의 형체에 따라서, 그의 교훈은 그의 것이 아니요 그를 보내신 이의 것이다(요 7:16).

여기에서 우리는 “동일하신 분이 신성에 있어서 완전하시고, 동일하신 분이 인성에 있어서 완전하시며, 동일하신 분이 참 하나님이시고 이성적인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참 사람이시며, 동일하신 분이 신성에 따라서 성부와 동일본질이시고, 인성에 따라서 우리와 동일본질이시며”라는 칼케돈신경의 성경적 용례를 확인하게 된다.
 
“하나님의 본체에 따라서” “처음”이시며(요 8:25, 불가타), 창세 전에 지혜로서 아버지와 함께 계시며(잠 8:22; 골 1:15, 17), 천지를 지으신 분이(창 1:1; 골 1:16), “종의 형체에 따라서”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리심으로 “교회의 머리”(골 1:18)가 되셨다. “하나님의 본체에 따라서” 성부와 동등하신(aequalis) 분이 “종의 형체에 따라서” 성부보다, 성령보다, 심지어 자기 자신보다 작으시다.
 
어거스틴은 이를 “정칙 규범(canonicam regulam)”이라고 일컫는다. 본성상(natura) 아버지로부터 영원히 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은혜로(gratia)”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는 두 나심에 대한 어거스틴의 언급도 이를 확정한다. 한 사람이 이전의 어떤 공로도 없이 사람으로서 존재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한 인격 가운데 연합되었다. 사람의 아들이셨던 바로 그 인격이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며,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바로 그 인격이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셨다(idem ipse esset filius Dei qui filius hominis, et filius hominis qui filius Dei). 그의 인성을 신성에 받아들이면서 은혜는 그 자체로 그 사람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서 죄가 들어 올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과 성육신한 그리스도가 동일하신 한 인격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가운데 그 영원한 인격이 인성을 취하심(asssumptio) 곧 위격적 연합을 성육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다만 주목되는 것은 그가 일종의 수사학적인 반복(rhetorical reiteration)의 기법으로 “하나님의 본체”와 “종의 형체”를 두운(頭韻)으로 삼아 이를 설명하는 경우, 전자와 후자가 각각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지칭하는 외에 성육신 전의 그의 인격과 성육신 후의 그의 인격을 지칭할 때도 있어 모호함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어거스틴이 “그는 종의 형체로 못 박히셨지만, 영광의 주가 못 박히셨다”고 말하는 경우, “종의 형체”는 인성을 지칭함이 분명하지만 “영광의 주”는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칭하는지 아니면 영원하신 성자의 인격을 지칭하는지 모호함이 있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입장은 그가 칼케돈신경의 정통기독론에 서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 이후 비잔티움의 레온티우스(Leontius of Byzantium, 485-543)가 체계적으로 전개한 enhypostasis와 anhypostasis의 교리에 대한 정교한 전개에는 이르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5. 위격적 연합과 신인양성의 속성교통

성육신의 비밀은 위격적 연합에 있다. 그것은 신성이 인성을 “직접적으로(directe)” 취하는데 있지 않고, 양성이 “간접적으로(indirecte)” 인격에 의해서, 인격 가운데 연합을 이루는데 있다. 칼케돈신경은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서 “혼합 없이, 변화 없이, 분할 없이, 분리 없이” 연합되어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그 가운데 양성은 속성교통을 한다. 개혁신학자들은 이를 세 가지로 파악한다.

첫째 종류(genus)는 ‘은혜의 교통(communicatio gratiarum)’ 혹은 ‘은사의 교통(communicatio charismatum)이다. 이는 성육신으로 인성이 얻는 ‘연합의 은혜(gratia unionis)’를 뜻한다. 인성이 모든 피조물보다 높아지므로 이는 ‘탁월함의 은혜(gratia eminentiae)’라고도 칭해진다. 둘째 종류는 ‘속성의 교통(communicatio idiomatum)’ 혹은 ‘특성의 교통(communicatio proprietatum)’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그의 신성과 인성에 속한 모든 속성들이 그의 한 인격(una persona) 곧 한 기체(基體, suppositum)에 돌려짐을 뜻한다.

셋째 종류는 ‘사역의 교통(communicatio apotelesmatum)’ 혹은 ‘작용의 교통(communicatio operationum)’이다. 이는 신성과 인성에 따른 일들이 그 자체로는 서로 양립할 수 없지만 모두 동일한 한 인격에 돌려짐을 뜻한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세 가지 종류의 교통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으나 자신의 저술들을 통하여 이를 여러모로 천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어거스틴은 성육신을 다루면서 성자 자신이 자신의 인격 안에 영혼과 육체의 몸을 세우신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그 인격 가운데 취해진 인성은 우리의 인성과 동일하나 우리가 지니지 않은 고유한 존귀함을 지님을 드러낸다. 이와 같이 “은혜로(gratia)”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aedificatio corporis Christi)”은 위에서 말한 ‘은사의 교통’에 해당한다.
 
성육신에 있어서 신인양성이 한 인격 안에서 ‘혼합 없이, 변화 없이, 분할 없이, 분리 없이’ 하나가 되는 것을 “결혼의 연합(conjunctio nuptialis)”이라고 칭하고, 동정녀의 몸을 마치 “신방(新房, thalamus)”과 여기며, “신랑과 신부(spnsus et sponsa)”가 하나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 이를 방증(傍證)한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은사의 교통’을 타락으로 인한 무능하고 부패한 인성이 회복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완성되는 유일한 길로 여긴다.

신인양성의 교통의 두 번째 양상인 ‘속성교통’은 신성과 인성에 각각 속한 속성들을 칼케돈신경에서와 같이 “신성에 따라서”와 “인성에 따라서”로 특정하되, 모든 속성들을 한 인격에 돌리는 것을 말한다. 그 전형적인 예를 우리는 위에서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본체에 따라서”와 “종의 형체에 따라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를 통하여 이미 살펴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어거스틴에게서 소위 초(超)칼빈주의(the so-called extra Calvinisticum)를 발견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주님의 성육신을 설명하면서, “그가 계셨던 곳을 떠나지 않으시고 오심(venire non recedendo ubi erat)”과 “오셨던 곳을 버리지 않고 떠나심(abire non deserendo quo venerat)”을 말하거나, “그 말씀이 우리의 지각에 드러나셨으나 그는 아버지를 떠나지 않으셨다(prolatum est sensui nostro, nec recessit a Patre suo)”고 하거나, “보라 그는 여기에 그리고 동시에 하늘에 계셨다(Ecce hic erat, et in coelo erat)”고 하는 경우가 그 예(例)가 된다. 여기에서 어거스틴은 주님의 인격은 모든 곳에 계시나 인성에 따라서는 그렇지 않음을 말하는 “ubique simul totus sed non totum”을 여기에서 거론하고 있다.

신인양성의 교통의 세 번째 양상인 ‘사역의 교통’은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 사역과 관련하여 현저히 드러난다. 주님이 인성에 따라서 우리의 자리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속죄의 제물이 되셨지만 그 주체는 신성을 포함한 그리스도의 인격이라는 사실이 이와 관련하여 특히 강조된다. 주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어떤 불의를 씻어버리시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큰 겸비함을 드러내고자(magna commendaretur humilitas)” 하심이었다는 어거스틴의 말과 그의 다음 말은 이를 뚜렷이 드러낸다.

우리를 의로 삼고자 그 자신이 죄가 되셨다. 우리의 것이 하나님의 것으로, 우리 안에서가 아니라 그 자신 안에서. 이렇듯, 그 자신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으로 죄가 되셨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대속이 원죄와 본죄를 씻는데 다 미치며, 그 의는 우리의 생명을 살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을 거룩하게 하는 은혜가 됨을 강조하는데, 그 배경에는 그것이 한 인격 속에서 신인양성의 교통 가운데 일어나는 사역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새겨져 있다. ‘속성의 교통’에서 현저히 나타나는 소위 초(超)칼빈주의는 ‘사역의 교통’에도 나타나는 바, 그리스도는 “말씀, 행하심, 죽음, 삶, [지옥에] 내려가심, [하늘에] 올라가심으로” 우리에게 돌아오신다고 일컫는다. 예컨대, “그는 떠나셨다. 그러나 보라 여기에 계신다”고 승천을 설명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중보자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가 되듯이 성도를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의와 가치가 여기에 있다.

6. 결론: 어거스틴 구원론의 기독론적 기초

어거스틴의 회심은 기독론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를 단지신적인 도움을 받아서 필멸의 존재가 불멸에 이르고자 애쓴 “뛰어난 지혜를 지닌 한 사람”으로 알았다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라는 말씀의 “비밀(sacramentum)”에 이끌려 “보편적인 신앙(fides catholica)”을 가지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으로서 유일하신 중보자가 되시는 주님이(딤전 2: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라고 “찬미하시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안을 때 비로소 위로를 얻고 젊은 날의 방황과 온갖 철학적 편을 그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어거스틴은 성육신을 제 2위 성자 하나님을 주체로 하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동사(同事)로 말미암는, 신인양성의 중보자의 인격이 형성되는 사건인 동시에 그 자체로 구속사건이 됨을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성육신 자체가 믿음으로 성경계시를 수납하여 구원에 이르는 인식론적 기초가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성육신을 다루면서,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과 연합함과 더불어 우리의 인성이 그 은혜를 함께 누리게 됨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뜻에서이다.
 
이와 관련하여 성육신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는데 작용하는 성령의 역사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작용하는 그것이 유비적으로 다루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리스도가 단지 한 인간으로서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신과 같이 되었다는 그릇된 영-기독론에 서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그가 추구한 삼위일체론적-기독론적 관점은 오히려 이를 가장 현저하게 배척하고 있기 때문이다.

워필드가 말하듯이, “종교개혁을 우리에게 준 사람은 어거스틴이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전적 주권이 그의 사랑에 있으며 그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역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무조건적 예정과 절대적 사랑과 전적 은혜가 함께 논의된다. 어거스틴은 오직 그리고 전적인 은혜의 구원론을 개진함에 있어서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에 우선 착념한다. 마리아의 몸이 마치 신방과 같아서 신랑과 신부가 그 안에서 하나가 됨을 성육신으로 이해하고, 그 가운데 대리적 속죄의 의의 완성과 전가(轉嫁, imputatio)를 설명한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과 성육신한 성자의 신인양성의 인격이 하나(una)이며 동일(eadem)하다는 사실, 성육신이 신인양성의 위격적 연합이라는 사실, 신인양성의 교통이 한 인격 안에서 ‘혼합 없이, 변화 없이, 분할 없이, 분리 없이’ 일어난다는 사실에 주안점이 두어졌다. 이러한 경향은 어거스틴의 신학 전체에 뚜렷이 나타난다.

어거스틴에게서 정치한 기독론적 전개와 진술을 찾기는 어렵다. 구체와 추상, 인격과 본성, 비하와 승귀에 대한 면밀한 구별이 없다. 인격이 아닌 신성이 인성을 취하셨다는 표현이 나타나기도 하고, 영혼(anima)을 인성과 동일시하기도 하며, 성육신한 그리스도가 사람을 취하셨다는 표현을 직설적으로 하여 마치 한 인격이 또 다른 인격을 취한 것과 같은 오해의 소지를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은 칼케돈신경의 한 인격 양성의 위격적 연합 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비하와 승귀의 양상에 대해서 면밀히 다루지는 않았지만 그 주체가 신인양성의 위격적 연합 가운데 계신 한분 그리스도로서 그 인격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인격과 동일함을 분명히 적시함으로 자신의 입장이 정통기독론의 입장에 서 있음을 드러내었다.

중보자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해서도 어거스틴은 포괄적인 진술에 머물 뿐 체계적이고 세부적인 고찰은 피한다. 당하신 순종(obedientia passiva)와 행하신 순종(obedientia activa)에 대한 면밀한 고찰을 찾아 볼 수 없다. 성도의 성화와 관련해서도 그리스도의 피만이 강조될 뿐 그가 모든 율법에 순종하신 의가 거론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의 거듭난 생명뿐만 아니라 거룩한 삶도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이 전체 구원과정에 역사하는 유일한 의가 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에 관한 어거스틴의 식견이 전혀 결여되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러한 여러 측면에 비추어, 우리는 “어거스틴이 칼케돈 이전의 칼케돈주의자(a Chalcedonian before Chalcedon)였다”고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구원론적 의미를 삼위일체론적-기독론적 관점에서 추구한 신학자였다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를 분리했다고 비판하는 라너(Karl Rahner)의 주장이나 어거스틴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논구하는 과정에서 삼위의 인격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정립하는데 실패했다는 군톤(Colin Gunton)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

영원히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립니다(Soli Deo gloria in aeternum)!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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