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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어거스틴의 중보자 그리스도의 인격 이해 1
문병호(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기사입력: 2016/10/26 [09:12]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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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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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   © 리폼드뉴스

이 글은 문병호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여기서 어거스틴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구체적으로 깊이 연구하여 제시하고 있다.

1. 들어가는 말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의 기독론에 대한 조명은 그리 활발치 않다. 삼위일체론을 비롯하여 인간론, 구원론, 교회론 등은 그의 인식론과 윤리관 혹은 문화관 등과 더불어 인구에 회자하는 바가 많으나 그의 기독론을 별도로 다룬 글은 드물다. 기독론을 다룬 몇몇 글들은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의의 연장선에서 다루어진다. 그의 사상이 갖는 현대적 의미를 논하는 자리에서도 기독론은 별도로 조명되지 않는다. 어거스틴의 신학은 초대교회의 교부신학과 중세신학의 가교(架橋)로 여겨지며, ‘원천으로 돌아가자(ad fontes)’는 종교개혁의 슬로건은 어거스틴의 길(via Augustini)을 다시 모색하자는 뜻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어거스틴주의(Augustinianism)의 부활이었다.
 
종교개혁이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의 인식론에 기초한 중세의 이성수위(理性首位)를 거부하고 신앙수위(信仰首位)를 주창하는 가운데 이성의 인식적 역할을 강조했다고 볼진대, 어거스틴은 그 선구적 위치를 점하는 교부로 자리매김 된다. 어거스틴이 일생동안 수행한 마니주의자들(Manichees), 도나투스주의자들(Donatists), 펠라기우스주의자들(Pelagians)에 대한 신학적 변증이 가장 신학적이면서도 논리적 호소력을 지닌 것은 그의 이러한 면모 때문이었다.

펠리칸이 말한 바, 어거스틴은 힐라리(Hilary of Poitiers, 310-367)를 이어 서방의 기독론을 한 단계 격상시킨 “가장 창의적인 해석자”였다. 어거스틴은 정통기독론에 서서 중보자 그리스도의 한 인격 양성의 위격과 대리적 속죄를 상세하고 명쾌하게 개진하였으며, 서방전통에 서서 성령의 출래에 있어서의 필리오케(Filioque)를 지지하는 입장을 분명히 개진하였다.
 
학자들은 어거스틴이 서방의 전통에 서서 동방신학자들과는 달리 중보자 그리스도의 위격의 단일성에 치중한 반면 신인양성의 속성교통과 그와 관련된 페리코레시스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관심을 쏟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이러한 어거스틴의 입장이 종교개혁자들 특히 개혁주의자들에게 계승되어 그들의 기독론이 이러한 부분에 취약함을 노정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그리하여 마치 어거스틴의 기독론이 칼케돈신경의 배후가 되었던 갑바도기아 교부들이나 알렉산더의 키릴(Cyril of Alexandria, 376-444) 등과는 괴리가 있는 반면에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6-450)의 경향을 잠재하고 있다고 여기기도 한다.

과연 그러한가? 어거스틴은 교리사적 의미를 갖는 당대의 기독론 논쟁에 직접 휘말린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불후의 대작 『삼위일체론(De Trinitate)』에서 보듯이, 그리스도의 신격(deitas)에 관한 삼위일체론적 논의가 신인양성의 위격적 연합에 관한 기독론적 논의에 기초해서 교호적으로 행해지며, 다수 그의 변증적 작품들에 뚜렷이 노정되는 바, ‘오직 그리고 전적인 은혜로 인한(gratia sola et tota)’ 성도의 영원한 선택과 구원서정(救援序程) 그리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는 교회의 본질에 관한 교리가 그가 지상의 생애 동안에 다 이루신 대리적 속죄의 의를 전제하는 가운데 개진된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어거스틴 신학의 요체를 그의 기독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중보자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어거스틴의 이해를 위격적 연합과 그에 따른 신인양성의 교통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이어지는 제 2장에서는 어거스틴의 신경적 작품들을 중심으로 그의 기독론 체계를 전체적으로 고찰하는 가운데 우리의 논제가 지닌 의의와 가치를 파악한다. 제 3장에서는 어거스틴이 삼위일체론적-기독론적 관점에서 성육신을 신인양성의 위격적 연합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살펴본다. 여기에서는 영원한 나심 곧 성자의 신격과 역사상 나심 곧 성육신의 상관성과 위격적 연합에 따른 신인양성의 속성교통에 주목한다. 제 4장에서는 이러한 속성교통에 따른 중보자 그리스도의 사역이 그의 비하와 승귀의 상태 가운데 어떻게 수행되었으며 그가 다 이루신 의가 어떻게 성도에게 지금도 전가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그리고 마지막 제 5장은 결론에 할애된다.

2. 사도신경에 기초한 기독론 체계

워필드(Benjamin B. Warfield)는 여러 논쟁들을 거쳐서 수립된 어거스틴 신학의 근간이 되는 오직 그리고 전적은혜 교리를 지탱하는 주축(主軸)으로서 그의 ‘오직 성경(sola Scriptura)’과 ‘오직 그리스도(solo Christo)’에 따른 성경해석을 들었다. 어거스틴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할 때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만나게 되며 그것이 성도들의 신앙고백으로 새겨진다는 사실을 줄곧 강조하였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로마서 10장 8-10, 17절을 상기하게 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관련하여 “즐기는 것”과 “사용하는 것”을 구별한다. 전자는 하나님 자신을 영접하고 그의 말씀을 내적으로 새기며 그 말씀대로 자신을 형성시켜 나가는 열매(fructus) 맺는 지식을 의미한다.

후자는 전자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단지 무엇을 지각하고 인지하는 외적 지식을 뜻한다.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경륜을 믿고 그 믿음으로부터 성자의 성육신에 이르는 지식에 “frui”의 본질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내적 고백의 지식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 신앙고백서와 신앙교육서라고 할 것이다. 어거스틴은 기독론 자체를 체계적으로 다룬 별도의 작품을 저술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종의 신앙고백서라고 볼 수 있는 『믿음과 신경(De fide et symbolo)』과 일종의 신앙교육서라고 볼 수 있는 『라우렌티우스에게 보내는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한 교본』을 통하여우리는 이를 일목요연하게 조망해 볼 수 있다. 이하 이 두 작품을 함께 다루는 가운데 우리는 어거스틴의 기독론이 사도신경에 기초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라우렌티우스에게 보내는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한 교본』에 나타나는 기독론의 체계를 살펴본다. 여기에서 어거스틴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요 1:14) “신성이 육신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신성에 의해서 육신이 취해졌다는 것(a divinitate carne suscepta, non in carnem divinitate mutata)”을 뜻한다고 단정한다. 이 부분에서 “육신”은 부분이 전체를 표현하는 방식(제유법, synecdoche)으로 사용되어 “몸”을 지칭한다. 그의 “몸”은 우리와 동일하나 그것은 “모든 죄의 오염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운 본성”이다. 그는 “본성상(natura)”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는데 “은혜로(gratia)” 사람의 아들이 되셔서, 종으로서 우리의 자리에서 모든 역할과 사역을 다하셨다. 그는 자신을 비우셨지만 여전히 아버지와 “동동하신(aequalis)” 아들이시다. “그는 그만 못하게 되셨으며 동시에 동등하게 남으셨다(minor est factus, et mansit aequalis).” “말씀으로서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사람으로서 그는 아버지보다 적으시다(propter Verbum aequalis Patri, propter hominem minor).” 영원히 성부와 성자와 동일한 본질로 계시는—곧 신성으로 계시는—제 2위 성자의 한 인격 가운데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진 인성이 취해졌다.
 
그리하여 말씀과 사람의 한 인격이 되셨다. 두 인격이 아니라 한 인격이므로 사람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인성을 취하신 것이다. “본성상”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은혜로” 사람의 아들이 되신 것은 그 자신이 우리를 위한 은혜의 원천이 되시고자 함에 있다. 어거스틴은 성육신을 인성이 신성에 취해진 사건으로서 이로부터 우리 인성이 신성에 동참할 길이 열렸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죄사함을 받고 자녀로서 거듭나는 의를 전가받는 구원의 은혜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세례의 인침으로써 부각된다. 이러한 인침은 새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가 죄를 떠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의 삶 가운데 수행함으로써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을 이루는 거룩한 삶을 사는 은혜에 전부 미친다. 이는 오직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다. 어거스틴은 성도의 구원 과정에 미치는 이러한 모든 은혜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장사, 부활, 승천, 재위(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 재림의 사건에 부합하며, 단지 “신비주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작용한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가 단지 주관적이지 않으며 객관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자신이 인정하고 있음을 표명하고 있다.

이러한 기독론 체계는 『믿음과 신경』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다만 이곳에서는 성육신의 의의 및 가치와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의 관계가 더욱 심층적으로 다루어짐으로써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시간상(ex tempore)” 시작이 없으시며 아버지로부터 나셨으나(genitus) 만들어지지(creatus) 않으신 분이시다. 그는 아버지와 동등하신 분으로서 종의 형체(forma servi)를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다(빌 2:6). 그는 본성상(natura) 하나님의 아들이시나 하나님의 은혜로(gratia)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 그가 영혼과 육체의 “순수한(integrum)” “전인(全人, totum hominem)”이 되신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심이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은 물론 육체와 함께 인성을 이루는 영혼 역시 그 무엇으로도 “더럽혀지지(maculata)” 않았다.

그리스도의 “비하(humilitas)”는 이러한 신인양성의 인격 가운데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을 드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구원의 의를 다 이루심에 있다(빌 2:8). 그가 죽으시고 장사되심은 그와 함께 우리가 죽음으로 우리도 그와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ad vitae novitatem)” 부활할 것임을 드러낸다. 이것이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심을 뜻한다(롬 8:17). 부활하신 주님이 하늘의 거룩한 땅으로 오르심으로 우리도 그와 함께 신령한 몸으로 영원히 살 것을 확정하셨다. 주님의 몸이 “하늘의 처소에(coelesti habitationi)” 적합하게 되신 것과 같이 우리도 흠이 없는 몸으로 변화되었다. 더 이상 세상의 연약함과 지상의 결핍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늘의 순수함과 온전함을 지닌 “영적인 몸(spirituale corpus)”을 지니게 되었다. 주님이 보좌 우편에 앉으심은 어떤 몸의 자세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법적 권세를(judiciariam potestatem)” 지니시고 구원할 자를 구원하시고 심판하실 자를 심판하시는 것을 뜻한다. 재림은 다름 아닌 그 완성을 의미한다.

이 두 작품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어거스틴의 기독론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성육신을 다룸에 있어서 한 인격 가운데 일어난 신인양성의 연합 그 자체보다 그가 성부와 성령과 동일본질이시며 동등하신 분으로서 우리와 동일한 영혼과 육체의 인성을 취하셨음을 부각시킨다. 둘째, 우리의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본성상” 하나님의 아들이시나 “은혜로” 우리와 동일한 사람이 되셔서 그 무죄함과 순수함 가운데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써 대속의 의를 다 이루셨음을 강조한다.
 
이와 관련하여 아들의 영원한 나심인 성자의 신격(deitas)과 역사상 나심인 성육신(incarnatio)이 함께 조명된다. 셋째, 이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가 다루어진다. 비록 비하와 승귀의 두 상태(status)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으나 아들이 다 이루신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주심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사는 구원서정의 전(全) 은혜를 누림을 부각시킨다. 넷째,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그리스도의 보좌 우편에 계심과 재림을 심판의 권세라는 측면에서 다룬다고 해서 그가 단지 초대교회의 사탄배상설을 지지하는데 그치고 대리적 속죄를 개진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이하에서 우리는 이러한 점들을 다른 작품들을 통하여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본다.

3. 영원한 나심과 역사상 나심: 삼위일체론적-기독론적 관점

어거스틴은 성육신을 다룸에 있어서 단지 철학적이거나 사변적 관조에 머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성도의 구원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주안점을 두었다. 사람은 타락 이후 사망의 형벌에 속하고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부패해서 더 이상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행할 의지를 지니지 못하므로, 죄가 없고 인식하는 것이나 의지하는 것이 순수하며 완전하여 “자유의지(liberum arbitrium)” 가운데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libenter) 인격적 순종을 드릴 새로운 사람이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첫 아담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고(posse non peccare)” “죽지 않을 수 있는(posse non mori)” 사람이었다면, 이제는 “죄를 지을 수도 없고(non posse peccare)” “죽을 수도 없는(non posse mori)” 분이 오셔야했다.

이러한 입장에 서서 어거스틴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무죄한 인성을 취하시고 사람의 아들로 오셔야 될 필연성(necessitas)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에서는 주님의 성육신이 은혜에 따른 것이듯이 우리의 거듭남도 그러함을 강조한다.

[주님의] 그 탄생은 절대적으로 거저 베푸시는 은총에 따른 것으로서 인격의 하나됨 가운데 사람을 하나님에, 육신을 말씀에 결합시키는 것이다! 선행은 그 탄생을 뒤따른다. 선행은 그 탄생에 대해서 아무 공로가 없다. 그러므로 그 형언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취해져 인격의 하나됨을 이루는 인성이 자유로운 의지의 선택으로 죄를 지으리라는 우려는 결코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취해진 인성은 그 자체로 어떤 사악한 뜻도 용납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중보자를 통하여 그가 그의 피로써 죄로부터 구속하신 사람들을 영원히 선하게 만드심과 자신이 택하신 그가 죄로부터 조성되지 아니하셨으므로 결코 죄 가운데 계실 수 없으며 항상 선하심을 드러내신다.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서 창조되신 것도 아니고 일시적으로 나신 것도 아니시다. 그러므로 그를 피조물과 동일시하는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창조하다(creare)”가 아니라 “형성하다(condere)”는 단어가 적합하다. 그는 “피조물(creatura)”이 아니시므로 “피조된”이나 “피조”라는 말은 사용할 수 없다. 영원히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을 취하심으로써(homine indutus)” 우리가 하나님께 이를 길이 열렸다. 그는 영원한 지혜(sapientia aeterna)로서 “본성상(natura 혹은 naturalis)” 하나님의 아들이시나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하나님으로서의 그의 신격은 전혀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과거형이나 미래형으로 말하지 않고 현재형으로, “스스로 있는 자(Qui est)”라고 일컫는다.

어거스틴은 『삼위일체론』에서 성자의 두 나심(duae nativitates)이라고도 불리는 영원한 나심—‘Filius est genitus a Patre(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셨다)’—과 역사상 나심 곧 성육신(incarnatio)—‘Deus manifestatus in carne(육신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을 다루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두 나심이 있으니 하나는 신적이며 하나는 인간적이다. 전자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음을 받았고 후자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롭게 되었다. 모두 놀라운 것이니, 전자는 어머니 없이 후자는 아버지 없이 되었다.

성육신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사람의 아들로서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셔서 대속의 제물이 되셨다(빌 2:7-8). 여기서, “자기 그 자신은 하나님의 본체로는 자기 자신보다 크실 뿐만 아니라, 그러나, 종의 형체로는 또한 자기 자신보다 작으시다(in forma Dei etiam ipse se ipso major est, in forma autem servi etiam se ipso minor est).”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보다 크신 아버지와 동일하신 분으로서 자기 자신보다 작은 사람이 되셨다. “이렇듯 그는 하나님의 본체로 사람을 지으셨고, 종의 형체로 사람이 되셨다(Proinde in forma Dei fecit hominem; in forma servi factus est homo).” 그는 피조물이 되심으로 창조주이심을 그치지 아니하시고 영원한 창조주로서 피조물이 되셨다. 그리하여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의 중보의 직분을 수행하셨다. 성부는 성자보다 크시나(요 14:28) 성부와 동일하시다(요 10:30).
 
어거스틴은 이러한 진술이 삼위일체론적이며 동시에 기독론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여긴다. 성육신한 그리스도는 신성에 따라서는 아버지와 구별되시고 동일하시나, 인성에 따라서는 아버지보다 작으시다. 그 인성에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께 기도드리시나, 신성에 따라서는 그 기도를 함께 받으신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이렇듯 아들은 아버지보다 작으시므로 간구하시지만 아버지와 동등하시므로 아버지와 함께 들으신다(Ex hoc enim rogat, quo minor est Patre: quo vero aequalis est, exaudit cum Patre).”

어거스틴은 빌립보서 2장 6절의 “하나님의 본체”는 삼위의 동일본질을, 2:7의 “종의 형체(morfh, dou,lou)”는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위격을, 달리 말하면, 각각 “하나님의 아들(神子, Filius Dei)”과 “사람의 아들(人子, Filius hominis)”을 지칭한다고 여긴다. 그렇지 않다면 영광의 주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말씀(고전 2:8)이 불가하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든다. “종의 형체”를 “사람의 아들의 형체(forma filii hominis)”로 특정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어거스틴은 “종의 형체”를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신인양성의 위격에 뿐만 아니라 성부와 동일 본질이시나 그 위격적 특성에 있어서 구별되는 자성(子性, filiatio)을 지니신 성자의 인격에도 적용시킨다는 점이다.

곧, 이를 삼위일체론적으로 뿐만 아니라 기독론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어거스틴이 빌립보서 2장 6절의 “하나님의 본체”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이 삼위일체가 아니라 성부를 지칭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러한 입장에 서서 어거스틴은 성육신하신 주님이 참 하나님이시고 참사람이시나 영원히 동일하신 한 인격이심을 강조하는 가운데, 성육신한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볼 때, 그것이 성부와 성자의 삼위일체론적 관계를 지칭하고 있는지 한 분 동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를 지칭하고 있는지를 올바로 분별해야 함을 지적한다. 예컨대, 아버지가 자기 속에 생명이 있듯이 아들에게도 이를 부어주셨다거나(요 5:26), 아들은 아버지가 하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거나(요 5:19), 아들의 교훈은 아들의 것이 아니요 아버지의 것이라고 하거나(요 7:16), 하는 말씀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관한 말씀으로서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신성에만 관계되므로, 이를 신성과 인성의 관계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을 긴밀하게 다루면서도 양자를 엄격하게 구별하고 있다.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의 긴밀성은 성자의 인격이 영원히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부각된다. 어거스틴은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이 보내심을 받았다(est missus ille qui in ea carne apparuit)”는 말과 “육신으로 나타나지 않으신 분이 보내셨다(misisse ille qui in ea non apparuit)”는 말이 모두 한 인격을 지칭한다고 보는 바, 이는 성자가 보내심을 받았다고 해서 성부와 동등됨을 버리지 아니하셨음을 환기시키기 위함이다. 어거스틴은 “삼위일체의 인격(persona Trinitatis)”은 “성부의 인격(persona Patris)”에 뿐만 아니라 “성자의 인격(persona Filii)”에도 항상 돌려진다는 점을 들어,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서(딤전 2:5) “신성의 하나됨을 통하여서는 아버지와 동등하시고 인성을 취하심으로 우리의 동참자(aequalis Patri per divinitatis unitatem, et particeps noster per humanitatis susceptionem)”가 되심을 강조한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가 “생명의 중보자(mediator vitae)”로서 “우리를 고치는 치료약(noster medicina emendationis)”이 되신다는 사실은, 아버지와 다를 바 없이 아들 속에도 생명이 있다는(요 1:4; 5:26; 요일 5:11)—그리하여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시라는(요일 1:1)—사실을 도외시하고는 다루어질 수 없음을 역설하고 있다(요일 5:12).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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