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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교회 개혁 원리로서의 “오직 성경으로” 2
김요섭(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기사입력: 2016/10/08 [08:56]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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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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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김요섭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교회의 개혁원리로서 오직 성경이라는 관점에서 성경의 권위, 교회의 권세, 교회 회의 권세를 중심으로 다루었다.


III. 교회의 권세

1. 종말론적 교회 이해: “교회는 아직 완전하지 않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이 갖는 충족적이며 절대적인 권위를 기초로 삼아 교회의 권세를 성경 위에 놓으려는 로마 가톨릭의 논리를 반박한다. 로마 가톨릭이 내세우는 첫째 논리는 개인이 아닌 교회의 전체 회의는 “성령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으며 따라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을 바탕으로 이들은 “자기들의 결정에 의해서” 만들어진 교리와 신조에 따라 신자들의 “믿음의 성패가 결정된다”고 말한다. 칼빈은 이와 같은 논리의 바탕에는 로마 가톨릭이 “교회는 결코 그 남편인 그리스도에게서 버림을 받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를 받으리라는 훌륭한 약속을 받았다”는 신비적 교회론이 놓여 있다고 분석한다. 칼빈은 특별히 교리 제정과 관련한 이와 같은 교황주의자들의 주장을 자신의 종말론적인 교회 이해를 적용하여 반박한다.

그러나 교회는 우리의 논적들이 자랑하는 것과 같은 완전 무결한 상태와는 항상 거리가 멀다. 이것은 교회가 어떤 점에서나 부족하여 그 가진 것이 불충분하다는 뜻이 아니다. 교회에 필요한 것을 주께서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교회가 겸손하고 경건한 조심스러운 태도를 지니도록 하시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이상은 교회에 주시지 않았다.

칼빈의 종말론적인 교회 이해를 따르면, 교회는 주께서 필요한 것을 모두 주셨다는 점에서 이미(already) 충분한 영적인 권세를 가지고 있지만 아직(yet) 완전 무결한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

교회의 거룩함에 관련해 칼빈은 『기독교강요』(1559) 4권 1장에서 재세례파의 분파주의를 비판하면서 지상 교회의 종말론적인 성격을 제시했다. “그러나 주께서 주름 잡힌 것을 펴며 티를 씻기 위해서 매일 수고하시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교회는 아직 완전히 거룩하지 않다. 그러므로 교회는 매일 전진하면서도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거룩하다. 즉 하루하루 전진하지만 아직은 거룩이라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교회의 거룩성에 대한 종말론적인 이해는 도덕적 흠결을 이유로 기존 교회를 정죄하는 분파주의를 거절하게 한다. 이와 동시에 종말론적 교회 이해는 모든 교회가 스스로 아직 완전하지 않다는 한계를 인정하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개혁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무를 일깨워 준다.

칼빈은 성도 개인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전체 교회의 한계는 부인하는 교황주의자들의 교회론을 거부한다. 이와 관련해 그는 택함 받은 신자가 이 땅에서 받은 은사의 종말론적인 성격을 전체 교회의 권세가 갖는 종말론적인 특징과 병행해 설명한다. 신자들이 이 지상에서 받아 행사하는 은사는 성령의 은사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까지도 육신으로 살 동안에는 성령의 처음 열매를 받으며 그것을 약간 맛볼 뿐이다.” 이와 같은 은사의 종말론적인 특징은 모든 신자들이 “자신의 무력을 앎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정한 한도 내에서 신중하게” 머무르며 “완전하다고 자랑하지 않고 매일 전진하려고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개개의 신자들이 소유한 은사와 마찬가지로 전체 교회가 소유한 권세 역시 종말론적인 특징을 가진다. 교회가 온전하다는 것은 교황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신비한 그리스도의 신부인 지상 교회가 스스로 절대적 권세를 가졌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의 온전함은 그 안에 늘 오류와 불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이 교회를 매일 거룩하게 만들어주시며 그 사역들을 사용하신다는 의미에서의 온전함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교회의 거룩한 사역은 곧 진리를 가르치고 성도들을 양육하는 사도적 직무이다.

칼빈은 종말론적 교회 이해를 바탕으로 전체 교회는 오류가 없다는 로마 가톨릭의 주장은 “어리석고 미련한 이야기”라고 비판한다. 교회의 모든 신자가 흠이 있으며 불결한 점이 있는데 교회가 모든 점에서 완전히 거룩하며 흠이 없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이야기인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성결하게 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성화의 시초가 보일 뿐이며, 그 최종적인 완성은 지성소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거룩하심으로 교회를 완전히 충만하게 하실 때에 나타날 것이다.

신자 개인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그 권세가 하나님의 은사이며 종말론적인 완성의 과정에서 쓰임 받고 있음을 잘 인식해야 한다. 이런 인식은 교회가 그 권세를 사용함에 있어 스스로를 자랑하거나 힘을 남용하지 않고, 다만 말씀이 정한 한도 내에서 항상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고자 최선을 다하는 실천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말씀에 순종하는지 여부가 교회의 현재적 건전함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그리고 진리의 보관이 이와 같이 예언자적 및 사도적 직무에 있다면 진리의 보존은 주의 말씀이 순수하게 또 충실하게 보존되느냐 보존되지 않느냐 하는 데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2. 교회 권세의 한계: “교회는 말씀을 위해 존재한다.”

둘째, 칼빈은 로마 가톨릭이 교회가 성령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말씀이 없어도, 또 말씀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한 교리를 제정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칼빈은 이 주장과 관련해 성령과 성경의 관계를 다시 언급한다. 성령께서는 “가장 훌륭한 인도자”로서 교회와 늘 함께 하셔서 교회를 바른길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여러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영에게서 “우리가 기대할 것은 그[그리스도]가 가르치는 진리를 우리의 마음에 비추어 주시는 것뿐임”을 분명히 한다. 칼빈은 크리소스톰을 인용하면서 “복음과 관계없이 성령의 이름만으로 제시되는 것을 일체 믿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율법과 예언자의 완성이심과 같이 성령은 복음의 완성”이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만을 조명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이 “끊을 수 없는 유대로 하나님의 말씀과 결합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성령의 뜻을 인정한다면 말씀과 별개로 교회를 인도하시는 성령을 주장하며 말씀 이상의 권세를 주장하는 것을 옳지 않다. 도리어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근신하며 항상 신중한 태도를 취하여야 하고 특히 교리를 제정함에 있어 말씀에 무엇을 가감하지 않는 것이 교회가 가져야 할 바른 태도이다.

성령께서는 말씀의 기초 위에서 교회를 세우셨고 그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서 교회의 사역들을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말씀으로부터 떠난 교회의 권세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의 권세는 말씀에 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말씀에서 분리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칼빈은 교회가 만일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제자라면 “그 남편과 선생에게 복종해서 그 말씀을 항상 깊이 유의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교리 제정과 해석에 있어 교회의 결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매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매임은 속박이 아니라 교회가 진리를 가르칠 때 그 내용을 확신하며 확고부동한 일관성을 가지게 하는 기초이다.

셋째, 로마 가톨릭은 기록된 성경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후 교회가 확언한 교리와 전통을 통해 보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이런 주장에 맞서 기록된 성경의 충족성을 다시 강조한다. 성령의 감동으로 인해 완전하고 분명한 지식이 충족적으로 기록되었다는 칼빈의 성경 이해는 또 다른 첨가나 해석을 통한 보충을 모두 거절하게 한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의 충족성을 설명한 칼빈은 로마 가톨릭의 주장에 대해 구체적인 반론을 제시하기 않고 성경의 충족성에 대해서는 “어린 학생들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쓸모없는 일을 가지고 논쟁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넷째, 로마 가톨릭은 마태복음 18장 17절이 교회가 가르치는 것과 명령하는 것을 반대하는 자는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신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 말씀의 의미는 곧 교회가 정한 모든 교리와 명령은 논쟁의 대상이 아님을 확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칼빈은 본문의 말씀은 교리 제정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교회가 견책으로 죄를 시정하는 사법적 권세에 대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사람이 교회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것은 교회 스스로의 권세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교회에게 맡기신 말씀을 전파의 역할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이는 교회는 그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할 때에만 교리와 권징에 있어 영적 권세를 가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리를 제정하고 가르치는 권세가 말씀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교회는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내서는 안 된다. 즉 주의 말씀에 계시되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치며 주장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섯째, 로마 가톨릭은 여러 역사적인 사례들을 거론하면서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지 않은 많은 교리들을 교회가 가진 스스로의 권세에 따라 제정했다고 주장한다. 그 대표적인 교리가 유아세례와 니케아 신조의 “동일본질” 교리이다. 칼빈은 유아세례의 타당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유아세례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구약시대 할례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과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참으로 여호와께서 옛날에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옛날 유대인들에게 못지않게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유효하며 이 말씀이 유대인들에게 관계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관계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니케아 신조의 “동일본질” 교리에 대해서 칼빈은 이 용어가 성경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고대 교부들이 성경이 명백하게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하나인 참된 영원한 하나님이라고 자주 부르는” 그 본래의 뜻을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권위를 갖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유아세례와 동일본질 교리의 합법성은 교회가 이 교리를 결정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교리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했다는 사실에 있다.

정리하면 칼빈은 로마 가톨릭의 신비적 교회론에 맞서 종말론적 교회 이해를 제시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교회의 권세와 사역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종속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교황주의자들의 문제는 성경의 권세에 비해 상대적이며 의존적인 교회의 권세를 고의적으로 무시한 데서 출발한다. 물론 신자들은 교회가 성경에 충실한 교리를 확증하고 가르칠 때 교회의 영적 권위를 존중하고 그 지도에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스스로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상대적인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말씀이 정한 한계를 지키며 오직 하나님 말씀의 진리만을 전하기 위해 날마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


IV. 교회 회의의 권세

1. 교회 회의의 권세와 그 근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회의만 합법적이다.”

『기독교강요』(1559) 4권 9장은 교회 회의들의 의의와 그 권세에 대해 논의한다. 이미 8장 10절에서 논의한 이 주제를 칼빈이 독립된 장으로 다시 다루는 것은 두 가지 목적 때문이다. 첫째, 칼빈은 자신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해 왔던 합법적인 교회 회의를 통한 종교개혁을 다시 한 번 제안하려한다. 둘째, 칼빈은 종교개혁을 위해 소집될 교회 회의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 무엇인지 설명하려 한다. 그 원칙은 교회 회의가 교리를 제정할 때 “오직 성경으로”라는 해석학적 원리를 교회 개혁을 위해 바르게 적용하는 것이다.

칼빈은 먼저 자신이 교회 회의의 권세와 의의를 부인하지 않음을 명확히 한다. “내가 여기에서 엄격한 태도를 취하려 하는 것은 내가 고대의 회의들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충심으로 존경하며 또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기 원한다.” 특히 그는 심각한 교리적 분쟁이 발생했을 때에는 교회 회의를 통한 문제 해결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존중을 받아 마땅한 교회 회의라 할지라도 모든 회의는 항상 더 근본적인 규범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 규범은 교회 회의가 “그리스도의 권위를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합법적으로 소집된 회의는 곧 모든 결정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처리하는 회의이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결정대로 일을 처리하는 자들과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 즉 완전한 지혜의 유일한 표준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들의 두뇌로써 신기한 것을 조작하는 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칼빈은 이 기준에 따라 평가할 때 모든 교회 회의가 다 합법적 권세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합법적 교회 회의를 분별할 수 있는 “특별 표지”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을 표준으로 삼았는가이다. 구체적으로 교회 회의는 세 가지 점에서 성경을 표준으로 검토되어야만 한다. “다만 나는 어느 회의의 결정이 있을 때마다 회의는 언제, 무슨 문제로, 무슨 목적으로 열리고 또 어떤 사람들이 출석했는가를 사람들이 우선 깊이 생각하기를 바란다. 그다음에 회의에서 취급할 문제를 성경을 표준으로 검토하기 바란다. 그리고 그 회의의 결정이 자체의 중요성을 지니고 또 이전의 판단에 비추어 고려되어야 하지만 내가 언급한 검토를 방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2. 합법적인 교회 회의의 기준: 성령과 역사의 사례들

교회의 권세와 관련해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말 공의회주의자들의 주장에 더 가까웠다고 평가할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사제 위계체제의 정점에 있는 교황 개인이 아니라 전체 교회의 회의가 궁극적인 교리 제정과 입법의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종교개혁자들과 공의회주의자들의 명백한 신학적 이해의 차이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칼빈은 교황주의자들이든 공의회주의자들이든 성경의 절대적 권위에 종속되지 않는다면 모두 잘못된 입장이라고 비판한다. 칼빈은 공의회주의자들의 기본적인 주장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그들은 목자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으면 교회 안에 진리가 머무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또 교회 자체도 총회의에서 나타내 보여야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칼빈은 먼저 교회 자체가 공의회를 통해 드러나며 모든 신자들은 이 공의회를 구성한 교회 인도자들의 결정에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공의회주의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일단 공의회를 구성하여 교리적 결정을 내리는 교회 지도자들의 권세를 인정한다. 그러나 아무나 인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율법에서 이쪽으로나 저쪽으로나 치우치지 않는 사람들만이 우리의 영적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교회의 지도자들 역시 그 이름이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오직 성경으로” 원칙의 개혁적 적용에 의해 평가받아야 할 대상일 뿐이다. 칼빈은 진리가 교회 지도자들의 의견 일치에 따라 결정된다는 공의회주의자들의 견해를 반박하기 위해 다양한 성경의 사례들을 제시한다. 먼저 구약에서 당시 교회의 목자였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목자였던 제사장들을 비판했고 이런 비판은 선지서에 너무 빈번하게 나타난다. 신약 시대에도 사도들은 자주 교회 안의 거짓 선지자들의 등장을 경고했고 목자들이 교회에 대해 가장 큰 위험인물들이라고 여러 곳에서 예언했다. 이렇게 목자들의 오류 가능성을 성경이 많이 경고한 것은 진리와 교회의 건전성이 교회 지도자들의 합의와 일치에 근거한다는 공의회주의자들의 주장을 아무런 제한 없이 받아들일 수 없게 한다.

칼빈은 교회의 목자들은 진리를 충실하게 가르침으로써 교회를 보존하기 위해 임명된 일꾼들이며 이렇게 교회의 평화와 안전을 수호해야 할 책임을 맡았다는 점에서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목자들은 그들의 책임을 권리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책임을 잘 감당하지 못한 목자는 목자라고 할 수 없다. 목자라는 이름 자체가 권세의 근거가 아니기 때문에 교회 안의 목자들 역시 말씀의 절대 기준에 따라 판단 받아야 할 대상일 뿐이다.

칼빈은 성경의 기준에 따라 평가할 때 교황과 그의 측근 주교들은 바른 목자라고 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이런 비판의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목자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순종하지 않고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뒤섞어 버리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교회 전체의 회의 역시 동일한 기준에 따른 판단을 피할 수 없다. 아무리 교회의 대표자들이 교회 전체의 이름으로 모였다고 해도 그 자체로 합법성과 권세를 소유하지 못한다. 성경은 많은 사례들을 통해 목자들의 회의가 부패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목자들의 회의로 성립된다는 생각을 우리는 결코 인정해서는 안 된다. 주께서는 어느 곳에서도 목자들이 영원히 선하리라고 말씀한 일이 없고 오히려 그들이 악하게 되는 때가 있으리라고 언명하셨다.” 따라서 교회를 대표하는 목자들이 모인 회의의 합법성과 권세는 목자들의 완전성이나 그 대표성에 근거하지 않는다.

회의의 합법적 권세는 오직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종속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주권을 드러낼 때에만 확보된다. 칼빈은 교회 회의들의 권세는 “오직 성경으로”의 원리에 종속되어야 함을 논증하기 위해 역사적 사례들을 검토한다.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이 교회 역사에 나타났던 교회 회의들의 권세를 존중한다고 밝힌다. “우리는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과 제1차 에베소 회의와 칼케돈과 그 밖의 이와 같은 초기의 회의들을 거룩한 회의들로서 기꺼이 공경하며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가 이 회의들을 공경하며 거룩하다고 인정하는 이유는 “성경에 대한 순수하고 진지한 해석”이 있었고 거룩한 교부들이 신앙의 원수들을 반박하기 위해 “영적인 지혜로 이 해석들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초대교회의 모든 회의들이 다 이 거룩한 모범을 따르지 않았음을 예로 들면서 교회 회의 자체가 스스로 권세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타나시우스와 바실이나 키릴루스 같은 진정한 교리의 옹호자들이 주께서 모든 시대와 모든 곳에서 일으키신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참으로 우리는 제2차 에베소 종교 회의에서의 일을 생각해야 한다.” 또 두 회의가 서로 충돌하는 결정을 한 경우도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900년 전 레오 황제 때 열린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교회 안에 세운 형상들을 전부 끌어내어 부수어 버리기로 결정했다. 곧이어 이 회의에 대한 적개심으로 이레네 여왕이 소집한 니케아 회의에서는 형상들을 복구하도록 판결했다. 우리는 이 두 회의 중 어느 쪽을 합법적이라고 인정할 것인가?” 교회 회의의 잘못된 결정을 분별하여 거절하고 서로 충돌하는 두 회의의 결정들 사이에 진위를 판단하는 기준은 다름 아닌 성경이다. “만일 내가 속은 것이 아니라면 표준은 하나이다. 즉 성경에 의해서 어느 쪽 교령이 정통적이 아닌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만이 가부를 구별하는 확실한 원칙이다.”

칼빈은 교회 회의의 역사를 검토하면서 교회 회의에 대해서도 그의 종말론적 이해를 적용한다. 초대 교회의 회의들이 교리 결정에 있어 권세를 발휘한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한 결정을 했기 때문이며 이 결정 과정에서 성령이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 사역을 위한 성령의 역사가 곧 교회 권세의 자족성이나 교회 지도자들의 완전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완전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바른 교리를 결정했다는 의미에서 교회 회의가 거룩하며 합법적이지만 그 교회 회의에도 여전히 오류가 있었다. 칼빈은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의 오류와 싸우는 가운데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갈등을 있었음을 지적한다. 칼케돈 회의 역시 정통 기독론을 확립한 합법적 회의였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감독 레오에 따르면 그 회의 가운데 “지각없는 경솔과 야심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칼빈이 이 회의들의 도덕적 결함들을 지적하는 것은 이 회의의 결정을 거부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는 다만 공의회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모든 교회 회의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반박하려 한다.

그러므로 가시적 교회의 종말론적 특징과 동일하게 교회 회의가 지닌 종말론적인 한계는 곧 교회 회의의 권세가 가진 한계와 상대적인 권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잘못된 회의의 결정에 의해 진리가 사라지거나 교회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권세에 의해 진리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가 권세가 있고 교회가 그 권세 위에 서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교회 안에서 죽지 않는다고 나는 확신하기 때문이다. 한 회의가 진리를 억압할지라도 주의 놀라운 보호를 받아 때가 오면 진리는 다시 일어나 승리한다.”

3. 교회와 성경 진리의 우선순위: “성경이 회의를 판단해야 한다.”

칼빈은 교회 지도자들의 합의에 따라 진리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진리에 의해 교회 회의의 결정이 판단을 받아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성경의 진리는 교회의 인정을 통해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 자체의 증거에 따라 확정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교리의 저자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확신하기 전에는 교리에 대한 신앙이 수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성경에 대한 최고의 증거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사실에서 얻게 된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은 성령의 증거를 의미한다. “우리는 인간의 이성이나 판단 그리고 억측에서가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 높은 근원 곧 성령의 은밀한 증거에서 우리의 확신을 찾아야 한다.” 즉 교회의 권세에 의한 확정이 아니라 성경의 자기 증거와 성령의 내적 증거가 하나님의 말씀 진리로서의 성경의 권위의 근거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진심으로 성경을 신뢰한다는 것, 그리고 성경은 자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증거나 이성에 종속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성경이 마땅히 지녀야 할 확실성은 성령의 증거에 의해서 얻게 된다.”

교황주의자들은 전체 교회의 회의가 합의해서 정경을 확정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교회가 여전히 성경을 해석할 독점적인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성경이 스스로를 증명함을 근거로 삼아 이 주장을 반박한다. “그러나 교회의 승인을 얻을 때에만 비로소 성경은 그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고 하는 가장 유해한 오류가 현재 널리 유행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영원하시며 침범할 수 없는 진리가 인간의 결정에 의해 좌우된다는 말과 같은 것이 아닌가!” 이와 관련해 칼빈은 교회와 성경 사이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처음부터 선지자들의 글과 사도들의 교훈에 기초를 두었다고 하면(엡 2:20), 그 교리가 어디에서 발견되더라도 이 교리의 수납은 분명히 교회보다 앞서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교리가 없이는 교회 자체가 결코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독교강요』(1559) 4권 9장에서 칼빈은 로마 가톨릭의 독점적 해석 권리 주장을 성경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판한다. “나는 성경 인정권이라는 것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무시하겠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판단에 굴복시키며 하나님의 말씀의 타당성을 사람의 변덕에 의존하게 만든다는 것은 입에 담을 수 없는 모독이다.”

그러므로 교회 회의의 결정이 곧 논란의 여지가 없는 최종적인 “성경 해석”이라는 공의회주의자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교회 회의의 상대적 권세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교회 회의의 권세를 빙자해 연옥과 성자들의 중보기도와 은밀한 고백 등 여러 잘못된 교리들을 “합의”와 “해석”이라며 정당화한다. 그러나 교회 회의의 역할은 성경의 권위를 규정하거나 성경을 초월해 공동의 교리를 확정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해석은 다만 “성경을 하나님의 진리로 인정하기 때문에 경건의 의무로서 성경을 존중하여” 설명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판단하는 권세가 교회에 속하며 성경의 확실성이 교회의 찬동에 좌우된다는 것은 참으로 거짓된 견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가 성경을 받아들여 이를 승인의 재가를 내리는 것은 의심스러운 점과 논쟁점들을 합법화하는 것이 아니다.”


V. 결론: “오직 성경으로” 원리의 실천적 의의

“오직 성경으로”라는 종교개혁의 원리는 칼빈이 보기에 무엇보다 교회의 법적 권세의 오해와 남용을 개혁하기 위한 실천적 원리였다. “성경의 제자가 되지 않고는 아무도 참되고 건전한 교리를 극히 일부분이라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칼빈은 교회 개혁을 위해 이 원칙을 적용하는 논의에서 하나님 말씀인 성경의 절대적 권위와 이에 비해 상대적인 교회 권세의 종말론적 특징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교황이나 교회 회의의 권세를 성경 위에 놓았던 로마 가톨릭의 교황주의자들과 공의회주의자들의 오류를 모두 비판했다.

칼빈이 교회의 권세를 설명하면서 강조했던 성경의 종말론적 교회 권세 이해는 오늘날 교회 개혁의 과제를 위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위해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명을 받았다는 점에서 영적인 권세를 소유한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어떤 공동체에게도 주신 바 없는 이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많은 은사들을 교회에 주셨으며, 교회의 사역을 통해 많은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셨다. 이 과정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교회가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와 은사 그리고 그 열매들을 자신의 성취로 오인해 비교하여 자랑하거나 함부로 남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리스도를 유일한 주인이며 교사로 모신 교회는 그 권세와 모든 사역들이 하나님의 은사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교회의 구성원들과 교회의 회의들은 항상 그 권세를 성경이 정한 한도 내에서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여 그 가르침에 순종하는 교회는 항상 교회의 권세가 상대적이며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스스로 인식하며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한계와 오류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겸손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영적인 권세의 사용과 있어 교회가 가져야 할 합당한 태도이다.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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