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개혁신학
[제101회 총회47] 세계교단교류위, 남아공 교단
기사입력: 2016/10/01 [08:18]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리폼드뉴스
배너
▲     ©리폼드뉴스

제101회 총회에서 '세계교회교류협력위원회'가  보고한 내용 일부이다. 김효시 교수의 "남아공 교단"의 글을 전문 게재한다.
  
 
남아공 교단 김효시 교수

남아공에는 세 개의 ‘개혁교회’ 교단이 존재한다. NGK(화란개혁교회, Nederduitse Gereformeerde Kerk/The Dutch Reformed Church in South Africa)와 NHK (Nederduitsch Hervormde Kerk/The Durch Reformed Church in South Africa, 남아공 국교회(the state church of the South African Republic), 포스트만에 의해 설립된 GK (Gereformeerde Kerke/The Reformed Churches in South Africa) 등이 세 자매 개혁교회가 존재한다.

그동안 남아공의 여러 화란개혁교회의 지파들을 연합하려는 노력들이 행해져 왔다. 2006년 11원 6일부터 8일까지, 127명의 NGK, NHK, GK, 대표자들이 크루거스도르프(Krugersdorp) 근처의 아키터베르그(Achterbergh)에 모여 연합에 대해 토의했다. 2008년 남아공 국회의 화란개혁교회 법률안의 목표들 중 하나는 “NGK, NHK, GK의 연합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특별한 법적 조정 없이도 제거할 수 있는 것”이었다.

1. NGK(Nederduitse Gereformeerde Kerk/The Dutch Reformed Church in South Africa/남아공의 화란개혁교회)

신학교:스텔렌보쉬 대학(Stellenbosch Uni.) 2015년 기준 약 3만 명의 학생. 신학교는 지금까지 약2000여 목회자를 배출했고, 신학은 신구약, 실천과 선교, 조직과 교회사 등 세 분야로 구분하여 가르치고 있다.

블름폰테인 대학(Bloemfontein Uni),
프레토리아 대학(Pretoria Uni) 1908년 설립하였고 6만 2천여 학생(2011년 통계)

1) 역사와 규모

NGK (Nederduitse Gereformeerde Kerk)로 불리는 화란개혁교회 교단은 남아공의 개혁교단 규모로서는 가장 큰 교세를 형성하고 있다. 남아공 뿐 아니라, 인근 주변의 나라들, 즉 남미비아, 스와질랜드, 보츠와나에도 화란개혁교단이 진출해 있으며, 모두 1162 교회와 110만 성도, 1626명의 목회자를 가지고 있다. (2015년 통계)

화란개혁교회는 동인도회사가 1652년에 파견한 식민지 사령관인 얀 반 리베이크(Jan van Riebeeck)와 군인과 관리들을 위해 세운 화란개혁교회(NGK) 공동체로 시작됐다. 맨 처음의 교회는 암스테르담의 장로감독회의가 요한 반 아아클(Johan van Arckel)를 첫 목회자로 파견함으로써 1665년에 설립되었다. 리베이크와 함께 온 사람들은 후에 케이프타운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웠는데 이들 네덜란드계 사람들과 그의 후손들은 보어인(Boer:농부) 또는 부르인(아프리칸스어), 혹은 아프리카너(Afrikaner)로 불리웠다.

1688년에, 200명의 위그노들이 종교 박해를 피해 프랑스에서 케이프타운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프랑스어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허용되었으나 결국은 네덜란드어를 쓰는 사람들과 병합되었고 네덜란드 회사가 관리하는 지역을 독점하고 있는 화란개혁교회의 멤버들이 되었다. 이들과의 병합에 오직 예외가 있었다면 회사 직원의 대부분이 독일사람들이었던 케이프타운의 루터교회였다.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었던 1795년에 영국은 프랑스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도록 케이프 지역을 점령하였다. 프랑스는 네덜란드를 점령하였고 그 결과로 암스테르담과 케이프 식민지의 교회 사이의 연합이 깨져 버렸다. 영국의 점령은 처음에는 일시적인 것이었으나, 1806년에 장기적인 점령이 자행되었다.

다음 세기동안 케이프 지역에서의 영국의 식민지배가 계속되었다. 1824년, 케이프타운에서는 네덜란드의 관할에서 벗어나 영국의 관할 하에서 자생적인 노회가 결성되었고 이 노회가 NGK가 되었다.

NGK는 장로교회 조직체로서, 노회, 장로회와 신도대표위원회로 이루어져 있다. 신도대표위원회는 지역의 신도들을 관리한다. 현재 지역 교회들은 지역에 따라 146개의 장로회로 조직되어 있고 이들이 연합하여 노회가 된다. 매 4년마다 10개의 노회들이 함께 총회로 모이는데 총회 사무실은 프리토리아(Pretoria)와 가우텡(Gauteng) 지방에 있다.

10개의 노회들은 남아공과 남미비아의 지방의 교회들의 조직으로서, 남서케이프 노회, 동케이프 노회, 북케이프 노회, 나탈 노회, 자유연방노회, 트란스바알 노회, 북노회, 하이벨드 노회, 동노회, 남미비아 노회 등이다.

2) 교리와 신학

NGK는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에서 형성된 벨직 고백서(the Belgic Confession), 하이델베르그 교리서(the Heidelberg Catechism), 도르트 신경(the Canons of Dordt)를 채택하였다. 신학교로는 스텔렌보쉬 대학, 블름폰테인 대학, 프레토리아 대학에 있는 신학대학에서 교단 목회자를 양성하고 있다.

NGK 안에서는 자유주의 신학과 보수신학 사이에서 심각한 논쟁이 있었다. 1848년에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에 의해 진행되었던 복음주의 부흥운동은 신학적 자유주의로부터의 변화를 가져왔다. 부흥운동의 결과로서 많은 젊은이들이 목회의 부르심을 받았고, 이에 부응하여 스텔렌보쉬에 신학교가 세워졌다. NGK는 더 이상 목회자들의 공급을 해외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고, 목회자 모집의 대부분이 부흥운동으로 인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부흥운동으로 인해 생겨난 특징들 중의 하나로서 개혁주의 사순절(예수 승천일과 오순절 사이)이 NGK에서뿐 아니라 널리 일반적인 관례처럼 지켜지게 되었다.

부흥운동은 유색인들을 위한 화란개혁선교교회(he Dutch Reformed Mission Church for coloureds)와 흑인들을 위한 화란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 in Africa for blacks)의 설립으로도 이어졌다. 이 교회들은 백인 교회들로부터 철저하게 분리되었지만 결국은 남아공연합개혁교단(Uniting Reformed Church in Southern Africa)으로 단일화 되었다. NGK는 케이프 식민지로부터 확장되어 나탈과 오렌지 공화국, 트란스바알 공화국에 교회회의들을 설립했는데, 이들은 처음에는 연합의 도가 약했지만 후에 점차 더 가까운 관계를 갖게 되었다.

3) 실제 이슈들

개개의 신도대표위원회들은 6개의 공식적인 믿음의 고백록에 다뤄지지 않은 특별한 이슈들을 신자들과 함께 어떻게 풀어 갈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즉, 결혼 도박, 성생활, 일반적으로 죄로 여겨지는 것들, 사회적 이슈 등에 대해 아주 다양한 해결책을 모색한다. 총회와 지역 노회는 지역의 신도대표위원회가 광범위하게 적용하고 따를 수 있도록 몇몇 이슈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을 공표할 수 있다. 노회들 간에는 어떤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현저하게 다른 견해가 존재할 수 있다. 이렇듯 현격한 의견의 차이가 있는 이슈에 대해서는 때면 노회와 총회가 ‘토론 문서’를 작성하여 신도들의 의견을 모을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a) 동성애
동성애에 관한 중대한 결정은 1967, 1982, 1986, 2004년 그리고 2015년에 내려졌다. 1986년과 2004년의 결정들은 대략 서로 비슷한데, 2004년의 결정은 조금 더 연민이 느껴지게끔 서술되어 있다 2015년의 결정은 ‘이제 NG 교회는 게이들을 환영한다’라는 극적인 표현으로 서술되었는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동성애는 1982년에 이미 교회에서 받아들여졌다.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나기 전 NGK 교회는 전통적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동성애를 정신적인 건강의 문제 혹은 죄로 여겼다. 동성애와 동성애적 행위는 모두 심리적 질병이나 죄의 행동으로 단정 지었다. 1982년 총회는 성관계의 유무에 상관없이 동성애란 죄며 동성애자들은 성만찬에 참여할 수 없고 장로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1986년 총회는 동성연애나 동성 간의 성관계는 죄이긴 하나, 동성애자들은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고 장로나 집사나 목사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1986년의 결정은 동성연애를 성적지향의 문제이며 다른 형태의 성생활로 확정지은 것이다.

1990년까지 분위기가 바뀌어 갔는데, 1990년에 총회는 위원회를 조직하여 1986년의 결정의 유효성에 대해 조사하도록 하였다. 1994년과 1998년에 총회는 이 문제를 다루지 않았고, 2002년까지 총회와 노회는 1986년의 결정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다. 1986년의 결정은 2004년에 공식적으로 철회되었고 2004년의 결정으로 1986년의 결정을 대체시켰는데, 사실은 2004년과 1986년의 결정은 그 내용에 변화가 없었다.

2004년에 동성애에 관한 교회의 지금까지의 입장이 출판되었고 이는 2007년과 2013년에 총회에 의해 확증되었다.2004년에 동성애란 일탈한 성생활의 형태가 아니며 동성애자는 교회의 활동적인 멤버가 될 수 있다고 (목사는 되는 것 포함)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결정은 결혼의 문제에 있어서는 동성끼리 결혼 할 수 없으며 결혼생활 밖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성생활을 죄라고 못 박았다. 남아공의 결혼과 합법적 동성결혼에 관한 법의 변화에 따라, 2007년 총회는 동성 간의 결혼을 결혼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동성애자가 섹스를 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만 목사가 될 수 있다고 정리하였다.

2004년의 결정은 2015년에 공식적으로 철회되었다. 2015년 총회는 두 파트너가 기독교적 선한 생활을 영위하며 둘 사이에 서로 헌신한다면 결혼생활 밖의 성생활은 더 이상 죄가 아니라고 결정하였다. 이는 동성애와 이성에 모두에 적용되는 것이었다. 교회는 남아공 정부의 법에 근거한 동성합법결혼을 인정하기는 하되 성경적으로는 이를 정식 결혼으로 간주하지 않고, 대신 합법적으로 결혼한 동성애자들의 성관계를 공식화하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b) 낙태
1994년 이전의 낙태에 관한 교회의 입장은 남아공의 법과 그 맥을 같이 했다, 즉 낙태는 오직 태아로 인해 산모의 생명이 위급한 경우나 경찰에 신고 된 강간의 경우에만 행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82년 총회는 낙태는 성경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보나 ‘생명을 박탈하는 것‘으로서의 변명의 여지가 없음을 선언하였다. 교회는 생명이란 임신과 함께 시작되며 피임기구를 사용하여 수정된 난자를 제거하는 것은 죄라고 믿었다.

1986년 총회에서는 낙태를 허용할 수 있는 예외의 경우들에 대한 제안이 논의되었다. 의학 전문가들을 포함한 여러 전문가들의 자문을 바탕으로 노회는 낙태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의학적 입장이나 예외의 경우가 아닌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정리하였다.

1994년, 새로운 정부가 선출되고 새로운 헌법이 제정된 이후. ‘임신 중절권’ (abortion on demand= 임신 기간중 언제라도 중절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합법화가 명백해졌고, 교회는 이에 대한 견해를 재검토하고 재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1997년 남아공 정부는 ‘임신 중절권’을 합법화하였다.

교회의 낙태에 관한 결정은 1994년 총회에 의해 이루어졌다. 교회는 원하지 않는 낙태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종류의 낙태를 죄로 간주하였으며, 낙태를 돕는 것도 죄로 여겼다. 그러나 낙태가 불가피할 경우, 어머니는 낙태 금지에 저항할 수 있다고 천명하였다.

1999년의 공식적인 출판물인 ‘신앙고백서’는 다양한 실제적 이슈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임신중절권’은 도덕적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으며, 낙태는 ‘두 가지 나쁜 것 중에서 덜 나쁜 것을 택하는 경우’에만 거절당하지 않아야 한다.

4) 아파르트헤이트 (Apartheid/인종분리정책)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소수 백인 정부가 오랫동안 시행했던 인종분리정책이다. 분리정책은 정치 경제 교육 등 여러 방면에서의 차별을 정당화하였다. 교회는 인종차별과 차별 타파에 모두 큰 구심점 역할을 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부 시절 백인들이 세운 신학교와 교회에서는 백인정부의 정책을 지지하였으며 신학교수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은 그 종류대로 분리하여 창조하셨다고 하면서 백인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를 지지하였다. 식민주의 일환으로 세워진 화란개혁교회는 흑인들을 덜 떨어진 인종과 타고난 ‘노예’로 취급, 지난 몇 세기 동안 강력한 인종차별 정신을 심었다.

아파르트헤이트의 신학적 근거로서 19세기 독일의 유명한 선교학자인 구스타브 베르넥(Gustav Warneck)의 주장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복음이란 보편적인 인류 전체에게 선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각 민족과 종족에게 각자의 문화적 상황에 맞게 전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선교관은 결과적으로 민족적인 배타성을 더욱 부추겨 인종주의를 정당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에 더해서 기존의 화란 개혁교회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칼빈주의에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특별히 카이퍼의 영역주권(spheres of sovereignty) 이론은 남아공 민족주의자들의 분리주의 정책에 신학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또한 19세기 절정에 달했던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 제국주의적 세계관이 남아공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렇듯 종교적 근본주의, 화란 정착민들의 민족주의, 서양의 제국주의가 결합되면서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카이퍼의 영역주권론이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은 단순히 수직적인 차원의 영역분리(pillarization)로 인한 정책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경제적인 요소들의 복합적인 작용에 의한 것으로 카이퍼가 인종주의자였다는 주장은 그리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960년대부터 아파르트헤이트는 주민을 반투(아프리카 흑인), 유색인, 아시아인, 그리고 백인으로 구분하는 1950년도의 주민등록법으로 시행되었다. 1950년에 만들어진 집단지역법에 의하면 도시에 각 인종의 거주 구역과 업무 구역, 공공시설 등을 따로 정했고, 신분소지증(pass)법을 강화했으며, 별도의 교육 기준에 의해 인종에 따라 특정 직업을 갖는 것을 제한하고, 유색인종이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법적으로 엄격한 제제를 가했다.

백인정부는 1959년에 흑인들이 거주하는 구역을 정했고 1970년에는 모든 아프리카 흑인들이 흑인거주구역의 시민이며 남아공의 시민권에서는 제외시켜버렸다. 또한 모든 흑인들에게 백인들의 언어인 아프리칸스를 의무적으로 배우도록 강요함으로서 1976년 소웨토 폭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국제적으로 큰 비난을 받게 되었고 1985년 미국과 영국에 의해 제재 조치를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결국 1990년 마지막 백인 대통령인 드 클라크(F. W. de Klerk) 대통령은 아파르트헤이트의 법률을 대부분 폐지하게 되었고, 1993년 신헌법이 제정됨으로 흑인들에게도 참정권이 주어지고, 1994년 넬슨 만델라가 최초의 흑인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써 법률적으로는 아파르트헤이트는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개혁신학은 아파르트헤이트를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예언자적 신학의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 칼빈과 카이퍼의 신학은 아파르트헤이트를 지지하는 신학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이를 반대하는 신학으로 이용되기도 하는 역설이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의 복잡성과 모호함은 개혁신학 자체가 전유하는 전통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외부에 의한 갈등과 투쟁, 그리고 전통들 사이의 경합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들은 화란개혁교회에 대한 반감으로 대다수가 영국계인 감리교나 성공회를 믿었다.

교회는 1982년에 아파르트헤이트’를 죄로 규정하는 세계개혁교회연합에서 제명당하기에 이르렀다. 1986년에 열린 총회에서 교회는 인종차별정책에 대한 공개적 입장을 바꾸고 모든 인종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 다양한 과정을 거친 후 교회는 다시 세계개혁교회연합에 의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5) 평가

NGK는 남아공의 오랜 역사를 가진 개혁교단으로 훌륭한 점들이 많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서로 분열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인종차별정책(Apartheid)을 찬성했던 과거역사가 있다.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신학적인 입장이 애매모호한 점이 있다. 예를 들면 동성결혼에 대하여 사회적 합의(South African civil unions)에 따라 2015년 전통적 입장을 바꿔 죄가 아니라고 결정하였다(물론 동성 간의 결혼은 성경적으로 합법적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는 하다). 낙태에 대해서도 조건부 찬성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총회와의 교류는 사안에 따라 선별적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사료된다.

2. 남아공 개혁교단(Gereformeerde Kerke/The Reformed Churches in South Africa, GKSA)
신학교:포체스트롬 대학(Potchefstroom University), 노쓰웨스트 대학(North West University)

1) 교단의 역사

19세기 초, 케이프 지역의 화란개혁교회에서는 네덜란드의 교회에서 새로 개정한 찬송가를 도입하여 쓰게 되었다. 그러나 이 중 많은 찬송가들이 1618/1619년의 도르트 교회회의 (the Synod of Dort)에서 채택되었던 세 가지 신조들의 (하이델베르그 신조, 벨직 신조, 도르트 신조) 신학적 교리들과 맞지 않았고, 일부 신자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이 새찬송가를 부르기를 거부했을 때 그들은 출교당할 위험에 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견해는 확고했다:하나님의 집에서는 하나님의 노래를 부르라
 
GK는 1859년 새로 개정된 찬송가에 수록된 여러 찬송들을 초대교회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신성모독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이유로 부르기를 거절하여 출교당할 위험에 처해있던 멤버들에 의해 결성되었다. 즉 대이동을 감행했던 트래커들 안에서도 종교적 분열이 있었는데, 그들 중 아주 보수적이며 엄격한 칼빈파에 속하는 백인회원들로서 도퍼(Doppers)라고 불리웠던 이들은 성경적으로 순수하다고 판단되어지지 않는 찬송을 부르는 것에 대해 반대하였다. 이 때 더크 포스트마(Dirk Postma)가 네덜란드에서 남아공으로 건너가 NHK목사로 부임하였고 그는 검증되지 않은 찬송들을 불러야만 한다는 것에 반발하여 1859년에 도퍼들과 더불어 국교회에서 분리하여 개혁교회(GK)를 설립하였다.

1859년 2월, 15명의 사람들이 화란개혁교단에서 나와 독립할 것을 결정하여 루스텐버그의 한 나무아래 모여 새로운 교단을 설립하였고, 이 때 300명의 사람들이 개혁교단(Gereformeerde Kerke=Reformed Churches)의 멤버로 그 자리에 함께 했다.

개혁교단은 이스턴케이프에 신학교육과 교사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신학교는 20세기 초에 포체스트롬으로 이전되어 보다 나은 기독교 교육을 지향하는 포체스트롬 대학(Potchefstroom University)이 되었고, 지금의 노쓰웨스트 대학(North West University)으로 발전하였다.

2) 규모

개혁교단의 공식적인 이름은 남아공개혁교단으로 GKSA(Die Gereformeerde Kerke in Suid-Afrika) 혹은 RCSA(Reformed Churches in South Africa)으로 불리운다.

GK는 현재 415교회에서 남아공 공식적인 11개의 언어를 쓰는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짐바브웨 남미비아, 레소토와 같은 인근 국가에도 GK에 속한 신자들이 있다.
교인 수 약 20만 명이며 목회자 수는 약 276명이다.

GK는 또한, 세계개혁교회연합회의의 회원이기도 하다. 총회는 포체스트롬에서 3년에 한 번씩 열리며 전 세계 교회들과 세계교회주의로 연합되어 있다.

3) 신학적 입장

신학은 하이델베르그(Heidelberg)의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 위에서 형성된 사도신경(Apostles Creeds), 아타나시오스 신경(Athanasian Creed), 니케아 신경(Nicene Creed)을 따르고 있으며, 벨직 고백서(the Belgic Confession), 하이델베르그 교리서(the Heidelberg Catechism), 도르트 신경(the Canons of Dordt)를 채택하고 있다.

교단은 오늘날에도 성경 속의 찬송, 즉 시편 찬송가와 성경 구절에 곡을 붙인 ‘말씀찬송’이라 불리우는 찬송만을 쓰고 있다.

4) 교회 정치 체제와 사역

개혁교단은 교회 정치 제도에서는 장로교회 체제를 따르고 있으며, 동노회와 부쉬웰드 노회, 북서노회, 쿠와줄루나탈 지역노회, 남노회, 랜드발 지역노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아공의 개혁교회들은 성장하고 있다, 보츠와나와 모잠비크에서 봉사활동을 펼치며, 브룬디의 선교사들을 후원하고 있다. 루스텐버그의 개혁교회들은 한국의 고신측 교회들과 함께 복음전도를 후원하며 루스텐버그에 다문화 교회들을 설립하기로 서로 동의하였다 앙골라와 모잠비크 선교를 위해 브라질의 장로교회와 협력 사업을 할 뿐 아니라, 베트남의 하노이에 개혁 교회를 세웠다. 또한 전 세계 개혁교단협회의 친목을 통해 WRF이 주관하는 사업들, 예를 들면 국제이슬람연구기관 등과 협력하고 있다.

다른 개혁교회들과의 관계

남아공의 개혁교회들은 세계개혁교회단체와 국제개혁교회학회의 회원이다.
네덜란드의 기독개혁교회, 개혁교회, 화란개혁신도, 보츠와나의 개혁교회, 콩고의 개혁교회연합, 북아메리카의 기독개혁교회, 호주의 정통장로교회, 스코틀랜드의 자유교회, 뉴질랜드의 개혁교회 일본의 개혁교회, 한국의 고신장로교회 등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5) 아파르트헤이트 (Apartheid/인종분리정책)

GK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GK는 16만 5천~20만 명의 신자를 거느리고 있는데 성경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견해를 갖는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NGK와 달리 GK는 신학을 보다 융통성있게 적용함으로써 정치인들에게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신학적 부담감으로부터 보다 자유롭게 해주었다. NGK가 아파르트헤이트가 잘못된 것이었다고 시인하기 20년 전에 GK는 성경의 근거를 대지 않은 채 아파르트헤이트를 죄라고 선언하였다.

6) 평가

이 교단은 Protestant, Evangelical Reformed, Calvinist, Presbyterian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남아공의 18개 교단이 동성결혼을 지지하고 있지만, 이 교단은 아직 이에 대하여 반대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외국의 많은 개혁교단들과 교류하고 있는데, 특히 한국의 고신 교단과 오래 전부터 교류해 왔으며, 고려신학대학의 많은 교수들이 이곳 대학에서 수학한 바 있다. 이 교단과의 교류는 세계화를 지향하는 차원에서 신학의 교류 및 학생들의 유치 등 교단 차원에서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3. NHK(Nederduitsch Hervormde Kerk/The Durch Reformed Church in South Africa/남아공의 화란개혁교회)

1) 역사와 규모

영국의 식민지는 케이프 반도를 넘어 북쪽과 동쪽으로 더욱 확장되었고, 동쪽의 경계선에서 보어인 농부들은 코사 언어를 사용하는 원주민으로서 소를 치는 목축인들과 대면하게 되었다. 그들 사이에서 소들이 풀을 뜯고 물을 먹는 등의 문제로 갈등이 생겼다. 농부들은 이 상황에 대한 케이프 타운 식민 정부의 해결방식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또한 1834년 영국에선 노예제도가 폐지되었고 영국인들은 원주민을 노예로 쓰는 보어인들을 압박하였고 이는 또 다른 논쟁거리를 불러 왔다.

아프리카너(보어인) 칼빈주의는 영국의 식민지배에 대해 다른 입장을 발전시켰고, 영국 정부에 반발하여 많은 농부들이 케이프 식민지를 떠났다. 보어인들은 1836~1845년 영국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레이트 트렉(Great Trek)(보어인의 케이프 식민지로부터의 대이동)을 감행하여 북쪽으로 대이동하였다.

보어인 농부들은 케이프 식민지를 떠나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자유국 등 독립적인 공화국들을 건설하였고 트란스바알 지역을 넘어선 땅에 세워진 여러 공화국들이 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탄생으로 연결된 것이다. 그 후, 보아 전쟁 결과 양 공화국은 영국령이 되고 1910년 남아프리카 연방이 성립하여 1961년에 현재의 공화국으로 발전하였다.

트레커(영국인의 지배를 피해 대이동한 보어인)들은 화란개혁교회(NGK)의 목사들과 특사들을 믿지 않았다. 트래커들의 눈에는 화란개혁교회의 사람들이 케이프 정부의 대리인으로 보였고 그들의 행동은 케이프 정부가 다시금 정치적 지배를 시도하려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1853년, 네덜란드의 더크 반 더 호프 (Dirk Van der Hoff)가 보아인들이 정착한 트란스바알 지역으로 가서 NHK 라고 불리우는 화란개혁교회를 세웠다. 즉 NHK는 17세기 케이프 식민지가 성립하면서 남아프리카에 이주해 온 네덜란드인들의 후손들인 ‘보어인’ 또는 ‘아프리카너’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후에 남아공을 식민지화한 영국에 대항하여 대이동한 그레이트 트랙으로 인해 생긴 자생적 개혁교회라고 할 수 있다. 이 후 NHK는 1860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국교회가 되었다.

NHK에는 200개의 교회와 13만 명의 신도가 속해 있으며, 38개의 지역 노회가 매년 열리고 총회는 3년에 한 번씩 열린다. 이 교회의 멤버들은 대부분 아프리칸스 언어를 사용한다. 남미비아와 보츠와나, 잠비아, 짐바브웨 등의 인근 국가에도 NHK 교단의 교회들이 있으며 이 교단은 세계개혁교단협의회의 회원이기도 하다.

2) 교리와 신학

신학적으로 화란개혁교회는 신교인 프로테스탄티즘의 지파이다. 교회는 성경을 모든 교리를 판단할 수 있는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인다.

이 교단은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 아타나시우스 신조(Athanasian Creed), 니케아 신조(Nicene Creed),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Heidelberg Catechism), 도르트 신조(Canons of Dort)와 벨직 신앙고백(the Belgic Confession, 네덜란드 신앙고백)을 신조로 인정한다. 또한 칼빈의 5대 Sola인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 Soli Deo Gloria (오직 주만 영광 받으심)을 채택하고 있다.

3) 평가

NHK는 화란의 후예들이 세운 자생적 교단으로 개혁주의 신학의 토대를 가지고 있으나, 교단의 역사에 비해 규모가 크지 않으며, 아프리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국제적인 교류가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