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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통신
GMS '2016 일본 선교대회' 성료 "건너와서 도우라"
일본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소서
기사입력: 2016/09/10 [22:12]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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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지역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특송     © 리폼드뉴스
▲일본선교위원장 옥성석 목사가 환영사를 하고 있다.     © 리폼드뉴스
▲제자교회 담임인 권호욱 목사가 인사하고 있다.     © 리폼드뉴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산하 총회세계선교회(GMS) 소속 '2016일본선교대회'가 지난 9월 5일부터 7일까지 목동제자교회(권호욱 목사)와 제자교회 파주수양관에서 진행되어 은혜 가운데 마쳤다.
 
개회예배는 GMS일본지역장인 서강태 선교사의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설교는 총회장 박무용 목사가 담담했다. 이날 예배에서 옥성석 목사(충정교회, 일본선교회원장)의 환영사, 축사에 GMS 이사장인 김찬곤 목사, 김창수 총회 총무가 맡았다.
 
일본예수교단 이사장 나까지마슈이티 목사의 사죄와 일본지역 선교사 일동이 특송을 하였으며, GMS 직전 이사장인 김재호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개회예배에 앞서 일본제자교회 가나쟈와 목사가 일본 선교사역에 대한 간증이 있었다. 6일 저녁 집회는 GMS 일본선교위원장 옥성석 목사가 담당했다.
 
일정에 따라 7일은 선교유적지 방문이 있었으며, 이번 '2016일본선교대회'에서 일본선교사 숙식 및 관광일치 비용은 제자교회가 맡아 봉사했다.

▲ 총회장 박무용 목사가 설교하고 있다.    © 리폼드뉴스

다음 글은 '2016년 일본선교대회에서 발표된 윤종헌 선교사의 일본선교 역사에 관한 논문 전문을 게재한다.

GMS일본선교역사 윤종헌 선교사(관서지부)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가 2015년 12월에 발표한 자료(171개국 2만 7205명)에 의하면 일본은 10대 파송국가 가운데 네 번째로 한국선교사가 많은 나라이다. 하지만 일본선교는 아직도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만만치 않는 환경과 여건 속에서 지금까지 많은 선배 선교사들이 헌신과 수고를 다하였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수고하신 선배 선교사들님의 노고에 대해서 감사와 함께 깊은 존경을 표하는 바이다. 진심으로 머리를 숙여서 선배선교사들의 헌신에 대해서 감사를 드린다.
 
그런데 한가지 아쉬운 것은 선교역사가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신임선교사들의 정착 프로그램이 없어서 많은 신임선교사들이 선배들의 시행착오를 그대로 경험하면서 수많은 시간과 물질을 허비하고 선교도 시작하기 전부터 맥이 빠진 상태에서 선교를 시작하고 있는 점은 다소 아쉬운 점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GMS선교역사에 대해서 연대별로 정리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GMS본부의 자료에 의하면 2016년 3월 현재 GMS지역부 선교사는 6개 지부에 76가정, 139명 정도이다. 그러면 본 연구를 통하여 GMS 일본선교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보고 일본선교가 어려운 이유와 그 대책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일본에수교단 이사장인 나까지마슈이치 목사 사죄하고 있다.     © 리폼드뉴스

I. GMS일본선교의 어제와 오늘

1. 일제 강점기의 일본선교

가. 1883~1913년까지의 일본선교 : 1890년부터 1900년까지 일본은 민족주의 및 국가주의 대두로 인하여 일본교회의 성장 둔화의 시기였는데,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으로 예배하는 국가 신도(神道)를 기초로 하는 국가 절대주의 칙령(1890)은 교회를 억압하였는데, 국가 자체가 기독교와 대결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중상류층 사이의 구미 주의 풍조가 사라졌는데, 대다수의 국민들이 구미 주의를 반대했다. 이는 반기독교 운동으로 인해서 상류 계층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사라지게 되자 교회는 힘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했는데, 독일에서 들어온 자유주의 신학은 전도열을 식혔고 국가주의와 타협 함으로서 성경적 신앙을 파괴하는 작용을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1900년에 일본 기독교 신자를 4만 여명을 넘어서게 하셨다. 그리고 1900년-1930년은 일본 개신교회의 영적 각성 운동 즉 부흥 시기였는데, 이 시기에는 어느 정도의 민주화 바람과 더불어 전도 활동이 자유롭게 되었다. 이때 기도회를 시작하여 사경회가 자발적으로 일어났고 대규모 전도가 전개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일본에 의해 국권을 찬탈 당한 민족적 불행 속에서도 한인교회는 선교한 1900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교회는 255명의 교포 선교사를 8군데의 선교지에 파송하였는데 일본에는 32명을 파송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선교시작을 언제부터 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필자는 1883년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공식적인 선교사는 아니지만 한국인으로서 일본에서의 선교사역을 최초로 시작한 사람은 이수정(李樹庭)이다. 이수정은 일본에서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접한 개화파 지식인들 중에 대표적인 한 사람이다. 1883년 4월 동경의 쓰유게쓰초(露月町)교회에서 미국인 선교사 녹스(G. W. Knox)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 이수정의 선교의 시작은 1883년 6월 24일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수정에게 전도를 받고 세례를 받은 한인 유학생들을 모아 한문 요리문답서를 교재로 하는 주일학교를 열었다. 이런 노력으로 요리문답반 주일학교가 점차 발전하여 1883년 말에는 이미 7, 8명의 한국인 수세자들이 모여 선교사들이 가르치는 성경연구반으로 확대되었다. 주일마다 설교자를 초청하여 정기적인 예배를 드리던 이 신앙공동체는 1883년 말 동경에 세워진 최초의 한인교회가 되었다. 1908년에 평양장태현교회의 정익로 장로가 국한문옥편을 편찬하려고 도쿄에 오게 되어, 김정식 동경조선YMCA총무와 15명의 유학생이 예배 후에 모여 YMCA와는 별도로 교회를 설립하자는 데 의견이 일치되어 동경연합교회가 설립되었다.
 
1909년 10월에 GMS 전신인 독노회 전도국(이하 GMS)은 평양장로회신학교 제1회(1907년 9월) 졸업생인 한석진 목사를 일본 선교사로 파송한다.이로 인해서 동경교회는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고, 일본에 파송 받은 한석진 목사는 김정식, 조만식, 오순형을 영수로, 백남훈, 장원용, 장혜순, 김현수를 집사로 임명하고 교회를 설립한 후 3개월 뒤에 귀국했다. 1910년 박영일 장로가 파송을 받았으나 건강 문제로 귀국하고 말았다. 1912년 임종순 목사가 일본의 유학생 뿐만 아니라 일본에 살고 있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선교사역을 하도록 파송을 받아 고베(神戸신학교에 유학 중인 정덕생 목사의 활동으로 일본 선교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베신학교에 유학 중이던 김영구, 양태승, 박상동, 김병우, 김우현, 전필순도 일본선교를 지원하며 동경, 오사카(大阪),고베에서 한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활발히 선교했다.

그런데 1912년에 아주 선교역사에 아주 중요한 일은 장로교와 감리교가 공조하여 일본선교를 하였다는 점이다. 일본의 선교사역이 확장됨에 따라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장로교가 처음 시작한 일본선교를 연합사업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동경의 선교는 일찍부터 장감이 연합으로 사역했는데, 1912년 8월 감리교인들이 동경 사역을 연합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일본에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연합선교사역을 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같은 지역에서 장감이 교회를 따로 세우는 것은 일본인에게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졌고 둘째는 이미 조선에서는 장감이 지역분계위원회를 구성하여 협력하여 사역을 잘 중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연합사역을 위하여 감리교회 대표 3인과 장로교회 대표 3인, 총 6명의 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각 교파가 2년씩 맡기로 하고 위원회가 원하면 2년을 더 일할 수 있도록 하고 비용도 똑같이 부담했다.
 
그리고 이 연합된 교회를 ‘조선예수교연합교회’라 불렀다. 교회의 모든 일들은 교단의 차이가 나타나지 않도록 사역에 통일을 기하도록 노력했다. 교회 행정과 교육에 대해서는 목회자에게 최종 권위를 부여했다. 이 아름다운 협력사역 정신은 오늘날 우리의 선교현장에 훌륭한 귀감이 될 수 있다. 이 연합사역의 결과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주관으로 일본선교는 동경(東京), 간사이(関�), 큐슈(九州) 세 지방으로 구분되어 추진되었다. 1932년 총회 보고에 의하면 일본 내에 시무하는 목사가 18명, 기타 교역자가 7명, 신자2,414명, 세례교인 826명, 교회는 46개처, 면려회와 여전도회가 여러 곳에 설립되었으며, 1934년에는 두 교회가 더 설립되어 48개의 연합교회가 자치할 수 있게 되었다. 1912년 장로교가 주도하던 일본선교를 인계를 받은 장감(長監)연합공회는 주공삼(朱孔三) 목사를 파송하면서 새로운 협력시대를 열었고, 협력정신을 일본에 심어 주었는데 주공삼 목사는 1914년까지 사역하게 하였다.

▲제자교회 찬양대가 찬양하고 있다.     © 리폼드뉴스

나. 1914~1929년까지의 일본선교 : 세계 제1차대전 이후에 일본의 경제가 호경기를 맞이하여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의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농지, 토지 등을 수탈당한 수많은 한인들이 일감을 찾아 고베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도일하여 관서지방을 중심으로 전국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에 동포의 전도의 대상도 유학생에서 노동자로, 도쿄에서 전국에서 그 대상과 지역이 확장되어 갔다. 1914년에 감리교 선교사 오기선 목사가 파송을 받아 1917년까지 3년 간 사역했다. 1917년에 장로교 선교사 이여한 목사가 파송을 받아 1918년까지 1년 간 사역했다. 1918년에 장로교 선교사 임종순 목사가 파송을 받아 1921년까지 사역했다.

1920년대에는 30만명이 넘는 한국의 남녀 노동자들이 일본으로 건너왔는데 한인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관서지역에도 교회가 설립되었다. 한편 1920년 총회에서는 총회석상에서 최초로 일본선교를 위해서 헌금을 했다는 점은 상당한 고무적인 일이었다. 또한 1월 셋째 주일을 일본과 해삼위(시베리아)를 위해 총회 소속 전국 교회가 헌금을 하도록 결정했으며, 1922년 총회에서는 일본 코오베 선교사 파송을 위하여 음력 정월 둘째 주일을 헌금하기로 결의했다. 점차적으로 일본 선교가 발전되어 1933년 총회에서는 일본 선교비를 감하여 400만원을보내기로 결의하였다. 1921년에 감리교 선교사 오기선 목사가 다시 파송 받아 1924년까지 3년 간 사역했다. 1924년에 장로교 선교사 서상현 목사가 1927년까지 사역을 했다. 1927년에 감리교 선교사 신공숙 목사가 1929년까지 사역을 했다.
 
1929년에 장로교 선교사 김기창 목사가 1931년까지 사역했다. 1931년 현재, 총회록이 밝히는 일본의 교세는 장로교 목사와 전도인 17명, 전체 교인 2,416명, 교회 46개, 세례교인 826명, 19개 YMCA 청년회 회원 540명, 유치원 5개, 학생 119명, 부인회 14개에 280명 회원이었다. 이러한 일본 선교의 결과 세워진 일본 내의 교회는 일제시대 일본에 거주하는 소망 잃은 한국인들에게 민족정신의 산실이었고, 고난 속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였다.

그런데 한국장로교회의 초기 일본 선교의 특징은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한국장로교회의 초기 일본 선교의 특징은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유학생들과 재일교포들이 사역했다. 둘째, 교파를 초월한 장감 연합선교사역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다. 셋째,사회봉사 사역을 동반하면서도 전도와 교회개척에 열심을 다했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통치하고 있을 때 가난한 조선인들이 정처 없이 일본에 건너왔다. 그들은 재일 조선인 교회의 도움이 필요했을 때 비록 가난한 조선 유학생들과 노동자들이 모였지만 조선인 교회는 구제를 아끼지 아니했다. 넷째, 일본인들이 조선을 식민통치하고 있을 때 일본에 선교를 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둘 수 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일본선교를 위하여 전국 교회가 선교헌금을 아끼지 아니하였고, 조선 내에도 교회 사역자들이 많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안디옥 교회처럼 훌륭한 일군들을 내어 놓았던 것이다.

▲ GMS 이사장 김찬곤 목사가 축사하고 있다.    © 리폼드뉴스

다. 1930~1944년까지의 일본선교 : 1931년에 감리교 선교사 김응태 목사가 파송을 받아 1933년까지 2년간 사역했다. 1933년에 감리교 선교사 김수철 목사가 파송을 받아 1934년까지 1년간 사역했다. 1933년에 장로교 선교사 오택간 목사가 파송을 받아 1935년까지 2년간 사역했다. 1935년에 장로교 선교사 김치선 목사 파송을 받아 1944년까지 일본선교를 계승하면서 해방 전까지 9년동안 계속해서 사역했다. 그런데 이 시기는 세계 대전 중이었기에 일본 교회도 한국교회도 침체기였다. 당시의 일본 정부는 치안유지법을 만들고 집회 금지령을 내리고 일본 특유의 두 가지 핍박을 했다. 그 하나는 정부에 의한 핍박으로서 고문을 동반한 감옥 생활이었고 또 하나는 기독교인을 “비국민”이라 지칭하여 고립화시킨 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1932년은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세 교파가 연합하여 1934년에는 재일대한기독교단을 창설한다. GMS는 해방될 때까지 14명 이상의 공식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장로교에서 계속해서 일본으로 선교사를 파송했는 박병훈(1940), 김창렬(1929) 김치선(1936), 배신환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정부는 일본교회에 대해 전쟁의 승리를 바라는 마음을 한곳에 모은다는 명분 아래 교단을 통폐합하는 종교단체법이 1939년에 성립되고, 재일한인교회는 존속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재일한국교회는 1940년에는 "일본기독교회"에 흡수 합병되고, 1941년에 "일본기독교단"에 일부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1945년 해방을 맞이하게 될 때까지 재일조선기독교회라는 명칭은 없어지고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 돌입하는 가운데 교회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지고 말았다. 설교나 공식 기록에 일본어 사용이 강요되어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희생과 고난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도 본 총회에서는 일본으로 선교사를 계속해서 파송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고등계형사들에 의해 탄압을 받고, 1940년 당시 일본 전국에 한인교회가 60개가 넘었던 교회가 수난을 맞이했고, 결국 많은 교회가 폐쇄를 당하고 모국어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해방이 되어 많은 동포들이 귀국을 하였다. 교회 지도자들도 귀국을 하여 얼마 남지 않는 교회(21개 교회)와 신자들은 몇 명의 지도자들과 함께 재일대한기독교회를 재건하였다.

2. 8.15 해방 이후의 일본선교

가. 1945~1964년까지의 일본선교 : 해방과 함께 한국의 개신교회는 신사참배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신앙을 확장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월남 특수와 중동 경기를 맞이한 경제개발의 시대 속에서 한국의 개신교회는 눈부신 성장을 하게 되었으며 21세기를 맞이하여 세계선교국가로 등장하게 되었다. 정이 많고 활달한 한국인 특유의 감성으로 탁월한 영성과 복음의 지성을 갖춘 한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죽으면 죽으리다’라는 뜨거운 순교적 신앙을 품고 일본 선교에 임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일본교회는 교파별 자주적 전도 활동을 통한 성장 시기였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 패하자 1945년 11월 4일 종교 단체법이 폐지되고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었다. 전후의 궁핍과 천황의 "인간 선언"으로 인해 육체적, 정신적 궁핍을 느꼈던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그렇다면 재일한국교회는 어떠했는가? 1945년 11월 15일에 창립총회를 열고 강제적으로 편입되었던 구일본기독교단으로부터의 탈퇴를 결의하고 통고문을 발송한 후 "재일조선기독교연합회"를 새롭게 조직하였다. 그리고 1948년에는 "재일대한기독교회총회"라고 명칭을 변경하였다. 그 후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아픔은 일본에 사는 한인사회에 크나큰 문제를 안겨주었다.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일본의 한인사회에서도 이데올로기의 이해 차이로 이분화 현상이 계속되었다. 남과 북이 분단된 조국의 현실이 일본의 한인사회에서도 역력히 나타난 것이었다. 이러한 불행의 실태 속에 재일대한기독교회는 화해자로서 책임 있는 태도를 취하지 못했다는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해방과 함께 한국의 개신교회는 신사참배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신앙을 확장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1959년 교단 분열(합동과 통합) 이후에 1970년까지 공식적으로 3가정만 총회파송선교사로 있었다. 그리고 이때의 선교의 공식적인 자료가 거의 전무한 점이다. 통합과 분열 후 장로교회는 분열이후 “백만신도부흥운동 십개년계획” 결의하고, 1966년 9일 26일 토마스 선교사 순교 100주년 기념예배를 드렸고, 그 해 예장 총회는 선교사를 파송했다.

나. 1965~1974년까지의 일본선교 : 이 시기는 일본의 경제적 번영과 도시화 현상으로 일본교회의 혼란이 초래된 시대였다. 이때 시골 교인이 도시로 이동되면서 두 가지 현상이 발생했다. 첫째는 시골 교인이 도시에 적응을 제대로 잘못하여 신앙생활마저 중단케 되었다. 둘째는 도시 생활과 경제적 번영으로 자유주의적 신앙과 무교회주의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1970년에 20만 명을 넘었다가 1978년에는 18만 명 선으로 하향 곡선을 그었다. 그런데 GMS는 1970년도부터 2000년까지 놀라운 선교의 발전을 가져왔는데, 1970년대 들어와서 GMS는 파송선교사가 점점 늘어나 2016년 현재 133명의 선교사들이 일본에서 사역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지금 일본을 떠나지 않고 남아서 사역하시는 선배 은퇴선교사가 5가정(10명)이 있다. 이 시기에 파송을 받은 GMS선교사는 김형탁(1974년9월)와 백병수(강정숙)(1974. 6.30) 선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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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1975~2000년까지의 일본선교 : 이 시기는 일본교회의 성장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974년 제1회 일본전도회의로 인해 전도의 폭넓은 이해와 의욕적 전도 사역이 전개되었다. 이때 교회 성장의 이유는 첫째로, 새 시대에 알맞는 전도와 목회가 효과를 보았다. 둘째로, 전후에 신학 교육을 받은 시람들의 활동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셋째로, 학생, 방송, 문서 등을 전도 단체와 협력하여 교회는 건전하게 성장하였다. 넷째로, 해외 선교의 열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교단은 1980년대에 선교 지역마다 지부를 조직하고 선교본부에서도 해외선교위원회를 조직, 운영하고 선교훈련원과 같은 선교기구를 확장, 정비. 선교는 84개 국가 900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그리고 1998년에 들어와 국내 전도와 세계선교의 문이 활짝 열려 교단 선교부는 세계선교부국으로 확대하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세계선교회(Global Mission Society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Korea: 약칭 GMS)로 이름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게 이르렀다.

1980년대에는 이성우 외에 16가정(이성우/김영순A, 정환구/박원숙, 박영창, 임도신/정정자, 이응주/권영자, 유대지, 김신호/문옥남, 김웅규, 조태권/고화자, 박기수, 이철우A/박남주, 이정오/최원순, 홍덕자, 김순옥A, 김영숙B, 박영호/이기순, 최영신/이무옥)을 파송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박기수 선교사는 통일교에 빠진 일본인들을 전도하여 특수교회를 개척하여 훌륭한 사역을 수행했으나 여 전도사로서 목사안수를 임의로 받은 관계로 1992년 3월 총회선교부터 어쩔 수 없이 면직을 받은 일은 유감스런 일이었다.

1990년대에는22가정(정지문/김은옥,이정희A,강명주/오혜명,장인상/이현숙A,박상영A/도정희,정강용/조영주,박승희/최은희,공재봉/고선봉,서강태/박경희C,송균호/고소정,김해규/김정수,안효명/장정숙,엄기영/문희영,서정복/김천숙,김동수/이혜숙, 장철호/정명신, 박희덕/이옥란, 마영렬/한진명,정창영, 황석천/이은정A, 이경숙A, 문병원 )을 파송했다.

이 시기에 몇 가지 괄목할 것들이 있었다.첫 번째는 1986년 12월 31일 파송을 받은 이정오 목사가 1987년 9월 29일 평안교회를 개척하여 헌당한 것과 2002년 오사카에서 일본장로회신학대학, 신학대원을 개교하고, 2004년 1월 26일에 GMS지역선교부에서 인증을 받고 지금까지 종교개혁자 존 칼빈의 개혁신앙을 계승하고, 이 시대에 성경에 입각한 그리도스인의 신앙을 항상 희구하며, 그것을 일상 생활에 살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는 점이다. 두 번째는 1990년 2월 25일에 파송을 받은 조남수 목사가 가와사키초대교회를 개척하여 지금까지 사역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데, 교회가 폭발적인 부흥하여 일본동맹교단의 교역자들만 아니라 다른 일본인 목사들에게 좋은 호평을 듣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2006년 8월부터 가정교회 사역을 시작했는데 지금 32개의 목장을 운영하는 것은 일본선교의 새로운 모델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택에서 성경공부를 통한 개인 전도로 통하여 예배당 건축도 세 번이나 건축한 점은 후배들에게 많은 도전을 주고 있다.
 
세 번째는 1993년 4월 25일에 파송을 받은 서강태 목사가 교회를 개척하여 야쿠자에게 복음을 전하여 9명의 야쿠자가 예수를 믿게 한 점과 야쿠자 3명이 목회자된 점이다. 이때에 서강태 목사는 야쿠자출신의 목회자와 함께 JWM(Japan World Mission, 일본세계선교회)을 설립하여 선교 활동를 한 것도 주목할 점이었다. 네 번째는 1994년 3월 13일에 파송받은 안효명 선교사가 일본인교단 복음자유연합협의회 소속 우지교회에서 협력선교사로 사역하다가 호소노 챠펠을 개척하여 2008년 9월까지 담임하면서 섬기면서 지금까지 복음자유연합협의회의 일본인 목사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남겼고, 모범적인 선교의 모델이 되었다.
 
다섯 번째는 일본선교지부 제4차 총회 및 선교전략회의를 1997년 2월 3일-5일간 동경의 고이와교회에서 주제 “세계에서 함께 협력하는 선교사들” (부주제: 바른 선교신학을 정립하자) 이란 기치를 들고 40여명이 참여하여 선언문을 채택한 점이다. 여섯 번째는 기독신문의 24번째 오사카 해외지사가 1998년 10월 9일 오사까 루터호텔에서 설립되었다. 이사장으로는 이성우목사(무코가와교회)를 위촉하고, 지사장에는 서강태목사(후세교회)를 임명을 받았다. 이로서 본국의 교계 소식을 신문을 통하여 접하게 되었고, 일본선교지의 사역을 본국에 알리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일곱 번째는 관서지부 설립총회가 1999년 2월 15일부터 17일까지 오사까에서 열려 박승희 선교사를 초대 지부장으로 선임하는 등 조직을 결성했다.(지부장:박승희 선교사 서기:정강용 선교사 회계:안효명 선교사) 한국에서는 김활영 선교사(총회세계선교회 사무총장)와 제자교회 정삼지 목사가 참석하고, 선교사 회의와 세미나를 인도했다. 그리고 당시의 관서지부 소속 선교사는 이성우 선교사, 김영숙 선교사, 최영신 선교사, 정강용 선교사 박승희 선교사, 서강태 선교사, 안효명 선교사 등이었다.

라. 2000년~현재까지의 일본선교 : 드디어 새로운 세기의 막을 열었다. 20세기는 전쟁의 세기이고, 침략과 가해, 피해의 역사였다. 두번의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걸프전으로 많은 병사와 민간인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지역분쟁과 내전이 잇따랐고, 많은 난민이 비참한 생활을 강요 받아 왔다. 핵무기의 등장은 인류 절멸의 위협을 가져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21세기야말로 화해와 평화의 세기가 되기를 기대했다. 이것은 우리의 바람에 그쳤다. 일본정부는 사회, 경제적 양극화 문제와 의료,복지 체제의 정체 현상은 개혁정책에도 불구하고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육의 우경화도 뚜렷해졌다.
 
2000년이라는 새로운 천년기의 시작을 맞이하여 일본 기독교계는 다양하고 활발한 전도활동을 펼쳤다. 이에 걸맞게 GMS에서도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했는데, 63가정(안중식/손인자, 강영진/김유진, 권요섭/정진이, 조성모/민성자, 이준호A/정명옥, 이근배/김옥기A, 황득용/이성아, 양경운/김인아, 김용민/최상옥, 하차봉/손은주, 정영철/이복순, 김병철/이은주B, 이상렬/이옥선B, 고영수/김정숙C, 박상준/서경진, 김돈영/이춘화, 김안신/정정원, 김우영/박경옥, 황영국/이정화, 선명수/주덕남, 강성신, 오현, 송재욱/전순임B, 장경태/박주은, 최태준/유봉렬, 이용택/박창숙,조남수/오금환, 김기호B/변성자, 신복규/김양근, 하성혜/홍성화, 이관행/장명숙, 김환기/박남옥, 이승렬/민희선, 박충훈/이순옥, 임동호/조인경, 김병구/강영숙, 장청익/한다 미요꼬, 이동준/토다 카오리, 황수인, 이도현/오은주, 천수경/김희숙C, 이현우, 정연택/야부자 끼유우꼬, 이유라, 정규화/조주은, 전승대/김신애, 장성준/신경순, 김경희E, 김새롬,김 준기, 신현아, 윤종헌/김필희, 박철/이진아, 강기두/천행화, 설진복/김광자, 최성철/권주현, 전재근, 이광혁, 최복규, 정해영B, 권상균/박경란, 이영숙C, 이우영B/카와가미 지혜) 이 현장에서 열심히 사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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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시기에 상당히 주목할 일이 몇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총회세계선교회(GMS)가 1998년에 총회로부터 분리된 이후 처음으로 일본에 안중식 선교사 파송한 일이다. 안중식 선교사는 2000년 10월 27일에 일본에 파송을 받아 지금까지 센다이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설립하여 열심히 선교하고 있다. 두 번째는 1982년 1월 12일에 파송 받은 당시 무꼬가와교회를 담임하던 이성우 목사가 2005년 10월 11일에 재일대한기독교회 제48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2년동안 재임하면서 GMS선교사의 위상을 높인 점에 대해서는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세번 번째는 산정현교회에서 주기철 목사 순교 100주년 기념으로 하차봉 선교사를 2006년 1월 6일에 일본으로 파송하고, 광복 70주년을 맞는 해, 2015년 8월 29일에 오사카부 야호시에 있는 일본복음주의자유협의회 그레이스선교회와 함께 나라현에 리조교회를 건립하여 헌당한 점이다.
 
네 번째는 서남부 후쿠오카를 중심으로 사역 중인 GMS일본 주재 선교사들이 2005년 11월 1일부터 3일까지 오끼나와 기노왕시의 오끼나와교회(서강태 목사 시무)에 모여 수련회를 가졌는데, 그때에 일본서남지부의 창립 예배를 드렸다. 당시의 서남지부에는 총 6가정 11명의 정회원 선교사와 2가정 4명의 준회원 선교사(15명)가 선교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서서 GMS 일본지역부는 관동, 관서, 서남의 3개 지부로 나누어서 사역을 하게 되었다. 다섯 번째는 2005년 9월 27일에 제90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에서 26년만에 예장합동(총회장 황승기 목사)과 예장개혁의 역사적인 교단통합이 이루어진 데에 이어서, 일본에서도 2005년 12월 12일부터 14일까지 닉코시 키누가와 올리브노사또(きぬがわ オリブの里) 기도원에서 GMS) 일본 관동지부 정기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자리에는 기존 합동총회 소속 선교사들과 구 개혁총회 선교사들이 함께 모여서 역사적인 총회를 개최한 점이다.
 
통합으로 말미암아 GMS 일본 관동지부는 45가정 91명의 회원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여섯 번째는 2006년 3월 8일-9일 동경성광교회에서 열렸던 GMS선교세미나 중에 임도신 목사가 일본 선교 34년간의 선교를 은퇴하였는데, 임도신 목사는 일본선교의 산증인으로서 지금도 선교의 현장에서 묵묵히 은퇴하고 계시고 후배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고 있는 점은 우리들을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일곱 번째는 2011년 3월 11일에 동북지방 태평양연안에 일어난 대지진과 쓰나미로 인하여 엄청난 인명 및 재산피해를 가져왔는데, 총회 일본대지진 피해지원대책위원회(위원장:김삼봉 목사)가 제2차 현지조사팀이 현지에 와서 지진과 쓰나미, 방사능 유출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1억 원 상당의 구호물품을 전달한 점이다.
 
그리고 2011년 4월 12일부터 15일에 방문을 방문하면서 인천에서 선적한 40피트 컨테이너 5개 분량의 물품을 구호품으로 전달했다. GMS선교사들로 구성된 GMS일본대지진피해대책본부(본부장: 김신호 선교사)는 직접 4톤 트럭 두 대를 빌려 센다이 기독교 네트워크와 연계해 사역 교회 신도들과 함께 피해주민들을 찾아다니며 물품을 전달한 점이다. 그리고 동일본대지진 구제를 위해 전국교회에서 거둔 구제 헌금 2억 4000여만원을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으로 인해서 무너진 미토사랑의교회(선명수 선교사)를 다시 세우는 헌금으로 사용한 점이다. 여덟 번째는 박상영 선교사가 2011년 6월 25일「사도들이 전한 복음」(쿰란출판사)이란 책을 출판하였는데, 선교사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에게 많은 도전을 주었던 점에서 선교사들은 연구하지 않는다는 선교사들을 경시하고, 가볍게 여기는 선입관을 불식시킨 좋은 예였다고 점에서 많은 선교사들에게 도전적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아홉 번째는 일본교단 복음자유연합협의회의 소속 후쿠치야교회에서 목회하는 안효명 목사가 사사야마교회를 2011년 3월에 개척하여 2011년 4월에 일본 목사를 청빙하여 행정적으로 독립시키고 재정으로 지원하고 있는 것은 일본교단에서 선교사들에게 많은 도전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열 번째는 2011년 7월 4일-6일까지 야마하리조트 쯔마고이에서 일본지역 전국선교사대회가 있었는데, 일본재난대책위원단의 경과보고와 함께 일본지역선교부의 사역조정을 위한 운영방안에 대한 설명과 함께 운영 규칙이 상정되었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인하여 결국 보류가 되었다.
 
필자는 사견으로는 무엇이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일본선교를 전략적이고 효과적으로 운영하고자 하는 시도에 대해서는 결코 가볍게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다만 모두가 이해하고 납득하는 공감대의 부족이 결국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끝냈을 밖에 없도록 이끈 점은 조금 아쉬운 점이라고 생각해 본다. 또한 이때에 30여년 동안 일본지역에서 활동해 오신 이응주 목사, 김안신 목사, 강성신 목사의 은퇴식로 함께 가졌다. 열한 번째는 그 동안 동경과 동북부의 선교사들이 관동지부에서 사역을 하였다가 2011년 12월 19일 오전 11시에 동경희망그리스도교회에서 정기총회를 갖고(당시의 지부장 신복규 목사) 전략적이고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서 3개의 지부(관동동북부지부, 관동중부지부, 관동서부)로 분립되었다. 그리고 2013년 10월 27일에 관동동북부지부가 다시 관동동부지부, 동북지부로 분립되었다. 2016년 4월 현재 일본지역선교부에는 동북지부, 관동동부지부, 관동중부지부, 관서지부, 서남지부로 나누어져 있다. 열두 번째는 한국의 수도노회의 선교위원회에서 2016년 2월 17일에 동경성산교회에서 사역하시는 김병철 선교사에게 교회개척 자금 1억원을 전달한 점이다. 열세 번째는 일본에서 자라난 MK들이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 점인데, 이는 선교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라고 일라고 생각한다.

 
3. 2016년 현재의 일본선교 : 2016년 현재 일본에서 사역하고 있는 GMS선교사는 133명 정도이며, 은퇴선교사로서 선교현장에서 남아 계속적으로 사역하시는 5가정의 선교사가 있다.(약 10명) 선교사의 소속에 따른 분류를 한다면 단립교회개척 사역 선교사가 65명이고, 일본교단이 선교단체에서 소속되어서 활동하는 선교사가 57명 정도이다. 물론 선교사역이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 선교사들로 대체로 이러하다. 그리고 사역의 대상에 따라 분류를 한다면 디아스포라(한국교포 대상)를 중심으로 한 사역과 일본인을 대상하여 사역으로 분류될 수 있다.

※역대 일본지역대표 : 제1대 이성우 선교사, 제2대 김신호 선교사, 제3대 이정오 선교사, 제4대 김신호 선교사, 제5대 서정복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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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현재 일본지역과 지부를 섬기고 있는 선교사
제7대 지역대표: 서강태 선교사 : 부지역대표 : 안효명 선교사 ,정영철 선교사 / 서기: 장경태 선교사 / 회계: 김병철 선교사
동북지부장 : 전승대 선교사 서기: 안중식 선교사 회계:이근배 선교사 관동동부지부장 : 이관행 선교사 서기: 이도현 선교사 회계: 이정희 선교사
관동중부지부장 : 장경태 선교사 서기: 김병철 선교사 회계: 설진복 선교사 관동서부지부장 : 양경운 선교사 서기: 권요섭 선교사 회계: 김인아 선교사
관서지부장 : 윤종헌 선교사 서기: 이용택 선교사 회계: 하차봉 선교사 서남지부장 : 김용민 선교사 서기: 김병구선교사

II. 왜 일본 선교가 어려운가? : ① 선교의 방법에 있어서는 개인적이고 소극적인 방법에 일관했기 때문이다. ② 일본의 사회구조가 선교의 장애물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사회구조가 개인적이기 보다는 집단적이다. 그러기에 2-3명이 함께 있을 때에 복음을 증거해도 효과적인 열매를 거둘 수 없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접근한다면 얼마든지 전혀 다르다. 그러기에 개인적으로 접근하여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③ 배타적인 민족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선교하기가 어렵다. 일본인은 타문화나 타민족, 국가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이다. 직장의 상하 관계는 형제적인 친근감을 느끼지만, 일단 그 집단 바깥에 대해서는 늘 경계적이고 배타적이고 자폐적이고 획일적이다. 그래서 외국 종교나 어떤 사관이 일본에 토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④ 교회의 폐쇄성과 교단주의가 일본선교의 장애물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한국선교사가 일본선교를 위해서 함께 사역하기를 원하지만 그 벽이 참으로 높아서 쉽게 협력선교를 방해하는 또 다른 장애물이라고 생각한다.

III. 효과적인 일본선교를 위해서 : ① 복음의 능력으로 증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이미 오랜 역사적 반기독교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일본인들 사이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능력으로 증거되지 않으면 결코 일본 선교는 그 열매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② 한인 선교사들끼리 긴밀한 협조와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③ 일본인교회와의 협력 선교를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④ 일부 국가에서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사회전도와 문화전도를 통해 집단전도 내지는 대량전도를 시행하고 있는 모델을 좀더 확대하여 한일선교협력의 모델로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⑤ 길거리 찬양이나 전도지 배포, 사영리 전도 등 개인적이고 소극적인 전도에 머물 것이 아니라 신문사와 방송국 그리고 학교와 병원과 복지 시설을 설립하고 이를 운영함으로 집단적으로 전도하는 보다 적극적인 선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⑥ 각 지역의 중심 위치에 크리스천 문화센터를 세워 지역 교회의 선교협력의 구심점을 구축하고 지역 교회들이 연합하여 집단적인 문화전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⑦ 하나님에 대한 개념과 호칭을 바꿔야 한다. 고베동부교회의 배명덕 목사는 한국선교신학회 학술대회에서 효과적인 일본선교를 위해서는 신 개념 및 호칭을 변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⑧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서는 재정적인 자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한국은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에 비해서 생활 물가가 엄청나게 높아서 재정에 대해 충분히 대비하지 않으면 장기적인 선교가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다.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서 재정적인 자립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선교의 재정적 자립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 예배 장소와 선교사의 숙소를 위한 임대료일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결코 선교사의 재정 자립은 불가능할 것이므로, 우선적으로 임대료를 지불하지 않는 방안을 강구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앞으로 비즈니스선교로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➈선교사 부인을 위한 정신적 위로와 자녀의 교육에 대한 충분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선교사 가족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충분히 강구되지 못하면 이로 인해 심각한 선교의 장애를 만나게 되며, 결국 장기적으로 선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긴밀한 선교네트위크가 절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다.⑩ 신임선교사의 정착 매뉴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IV. 제언 : 일본지역선교부는 GMS의 선교역사와 총회선교역사에서 볼 때에 상당히 중요할 뿐만 아니라 발제를 위해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했으나 중요한 부분이 누락되거나 잘못 기술된 부분이 많이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따라서 본 포럼을 통하여 발제한 것을 기초로 해서 계속해서 자료를 보충하고 GMS의 일본선교역사를 편찬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이는 역사적인 측면에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신임선교사들로 하여금 일본선교사역의 지침서로 활용할 수 있다면 일거양득이 될 것이라고 사료되는 바이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 GMS의 일본선교역사를 위한 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편찬위원을 선정하여 계속해서 연구하게 하고, 학술적이고 역사적이고 객관적으로 자료를 정리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언하는 바이다.

나가는 말 : 일본은 우상, 미신, 신도적 국가주의로 말미암아 선교가 결코 만만치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하박국 선지자가 2:14에서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에 일본 땅에서도 가득하기를 믿고 기도하면서 결코 일본선교를 멈추지 말아야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행 18:10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일본 땅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많음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선교를 통하여 다시금 초발심으로 돌아가 겸손히 우리들을 통하여 역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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