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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루터의 칭의 이해 2
박영실(총신대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기사입력: 2016/08/24 [09:46]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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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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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역사신학 교수인 박영실 박사가 개혁신학회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루터가 이해했던 칭의에 대해 어거스틴의 맥락에서 고찰하고 제시한다.


5 신학적 돌파: 하나님의 의

루터는 초기, 적어도 1514년 이전에는 비아 모데르나 신학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루터가 에르푸르트 대학 교양학부에서 공부하는 시기인 1501-1505년 사이에는 정형적인 비아 모아 모데르나 사상이 그곳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본래 비아 모데르나는 어거스틴적 신학방법론을 계승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 시기의 비아 모데르나는 철학적으로 유명론이고, 칭의론으로 보면 분명 펠라기안적 경향을 지녔다. 루터가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간 후에도 비아 모데르나 사상에 매료되어 가브리엘 비엘의 저서들을 탐독했다. 특히 비엘의 미사 법전에 관한 지식을 집중 공부하여 구절구절을 암기하여 인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비아 모데르나의 구원론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계약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조건은 “Facere quod in se est” (너희 안에 있는 것을 행하라. 즉 최선을 다하라)로 표현될 수 있다. 비아 모데르나의 “하나님의 의”개념의 기저에는 키케로식 정의, 즉 각자의 고유의 것을 준다(reddens uniquique quod suum est)는 사상이 놓여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진술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즉 “Facienti quod in se est Deus no denegat gratiam”(자기 안에 있는 것을 행하는 자(즉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 주시기를 거부하지 않으신다). 가브리엘 비엘에 의하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악을 거부하고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비아 모데르나는 계약이라는 틀을 사용하여 펠라기우스 사상을 재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비아 모데르나와 펠라기우스주의 사이에는 분명히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

중세 말의 르네상스 시대에는 복음 즉, 기독교의 진수를 이해하고자 하는 강력한 열망이 있었다. 개혁가 루터가 집착했던 핵심 사안은 “죄인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였다. 루터는 1513-1516년 사이에 시편과 로마서 강의에서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하나님의 의”(iustitia dei)를 이해하는데 매우 어려움을 겪었다. 루터는 애초에는 하나님의 의를 공평하신 하나님의 속성으로 이해했다. 만일 인간이 그 칭의에 필요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그러면 하나님은 공정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루터는 가브리엘 비엘이 언급한 그런 구원의 필요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필사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루터는 자신이 없다는 절망적인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루터는 이때 인간의 노력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그에게 남는 것은 그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 밖에는 없었다. 그것은 결코 복음일 수 없었고 오로지 저주였고 절망이었다. “내가 어떻게 은혜로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것인가?”라고 절망적으로 묻곤 했다. 이 지점에서 그는 어거스틴의 통찰력을 받아들이는 듯하다. 죄로 인한 인간의 상황은 너무나도 절망적이어서 하나님의 개입이 없다면 소망이 없는 것이다. 1514년까지 루터는 이 해답을 발견하지 못했다. 1515년에 그는 로마서를 연구하면서 이른 바 “탑체험”(Turmerlebnis)을 하게 된다. 이 체험은 그의 영혼의 고뇌가 해소되었던 신학적 돌파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건을 좀 더 상술해 보자.

나는 정말로 바울의 로마서를 이해하기 위해 보기 드문 열정으로 그것을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로마서 1장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7)를 이해함에 있어서 내 방식대로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의’를 모든 학자들이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고 죄인과 불의를 벌하신다는 ‘외적인 의’ 혹은 ‘적극적인 의’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철학적 관점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흠잡을 데 없이 수도사로서 살았으나,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은 흔들리는 양심을 가진 죄인이었다. 또한 내가 나의 만족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나는 죄인들을 벌하시는 이러한 의로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하나님을 혐오했다... 이런 내 모습에 내 양심은 불안했고 미친 듯이 격렬하게 화가 났다. 그리고 나는 그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더 열렬하게 알고 싶은 갈증으로 이 구절 속에 있는 바울에게 성가시게 노크해 댔다. 마침내 자비하신 하나님은 내가 이것에 대해 낮이고 밤이고 생각하자, 말씀의 맥락을 깨닫게 해 주셨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의는 의인이 하나님의 선물에 의해 산다는 것인데 하나님의 선물은 말 그대로 믿음이다... 그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과 함께 수동적인 의가 된다.

무엇이 루터로 하여금 “천국 문을 열고 들어간 것 같은”느낌을 준 것인가? 그것은 그가 그토록 혐오했던 “바울 안에 있는 그 구절” 즉 “하나님의 의”였다, 그 하나님의 의가 이제는“천국으로 향하는 진짜 문”이 된 것이다.


6 루터의 칭의 신학: simul iustus et peccator

6.1 “하나님의 의” 이해

루터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해의 변화는 무엇이었을까? 원래 루터는 칭의의 전제 조건으로 인간의 행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루터가 도달한 이해는 자기로서는 그 행위가 불가능한 것이요, 자기 외에 누군가가 그 필요조건을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시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 하나님은 무서운 심판관이 아닌 죄인에게 의를 선물로 주시는 은혜로운 분이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구원의 원인이다.”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받는다. 그 칭의는 하나님 편에서 보면 능동적인 의이요, 인간의 편에서 보면 수동적인 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상은 루터의 독창적인 발견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거스틴 사상의 재발견이었다. 그러나 정확히 재생산인 것은 아니었다.

6.2 루터의 칭의 신학

어거스틴이 그렇듯이 루터도 그의 칭의 사상의 전제는 인간 스스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다. 칭의는 그리스도를 붙잡는 믿음(fides apprehensiva)에 의해 되어진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게 하고 우리의 죄가 그의 죄가 되도록 붙잡는 것이다. 이것은 외부로부터 낯선 의가 전가된 것인데, 이런 의의 전가는 믿음을 통해서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취로 덧입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칭의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무죄 선고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의 도우심으로 무죄 선고를 받고 새롭게 되어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멜랑크톤의 영향으로 루터의 칭의가 무죄 선고, 즉 죄의 용서로서의 전가의 개념에 너무 초점이 맞추어져 왔다, 하지만 칼 홀(Karl Holl. 1866-1926)은 루터의 칭의의 개념은 법정적 해석을 넘어서서 “완 성까지의 인간의 모든 갱신을 포괄하고 있다”고 주장했었다. 그는 루터의 칭의를 “점진적인 실제로 의롭게 만들어 가는 것”(a progressive reale Gerechtmachung)까지를 포괄하도록 해석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신자 안에서 실제로 거주하시면서 중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핀란드 학파(the Finnish school)에서도 칭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신적 생명에의 실제적 참여”라고 한다. 칭의는 우리에게 종말론적인 성화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하심을 보게 한다. 우리의 구원은 완성되었지만 동시에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의의 최종 완성을 기다리는 것이다.

루터와 어거스틴은 공통적으로 하나님께서 의를 주신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다음이 달라진다. 하나님이 주시는 자리가 어거스틴의 경우에는 내부이다. 즉 그 의롭게 하시는 의가 인격의 일부가 되게 역사하신다.

반면에 루터의 경우는 그 자리가 외부이다. 즉 그리스도의 외부에 있는 의(iustitia aliena)가 믿음으로 전가(impute)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siuml iustus et peccator)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신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의롭다고 간주(semper quoque iusti an Deo reputantur)되지만, 사실은 죄인이고 소망 속에서 의로운 것이다(peccatores in re, iusti autem in spe).

낯선 의의 전가 사상이 루터의 동료 멜랑흐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에 의해서 “법정적 의미”로 자리 잡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죄인은 칭의로 의롭게 만들어진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멜랑흐톤은 죄인이 의롭게 여김을 받는다라고 가르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죄인인 인간에게 “의롭게 하는 의”가 부여되지만, 멜랑흐톤 편에서는 “의롭게 하는 의”가 의롭다하는 선언되는 방식으로 전가된다. 멜랑흐톤은 죄인을 “하늘 법정에서(in foro divino)” 의롭다고 선언되는 것을 칭의라 하고, 의롭게 되어져가는 과정을 나누어서 “성화”라 했다. 하지만 어거스틴에게는 동일한 내용의 다른 양상일 뿐이다. 어거스틴 시대에는 칭의는 언제나 의롭다고 선언되는 것과 의롭게 만들어져가는 과정을 함께 포함하는 것으로 받아 들여졌다. 멜랑흐톤의 법정적 칭의는 이런 경향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분리되는 것이다.

루터는 구원에 있어서 선행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것을 선행이 칭의하고 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너 없이 너를 만드시는 이가 너 없이 너를 의롭게 하지 않는다”(Qui ergo fecit te sine te non te iustifucat sine te)라는 어거스틴의 경구가 의미하듯이, 행위가 분명 구원에 필요하지만, 그것은 칭의의 결과라는 순서에 배당된다.


7 어거스틴의 칭의(Justification by faith)

서방신학에서 값없는 은혜의 복음이란 바울의 중심 사상이 충분히 재조명받는 것은 어거스틴에 이르러서다. 바울의 핵심 사상인 사실상 값없는 은혜의 복음이 강조되지 못한다. 칭의와 관련하여 그 이전의 헬라교부들이 “행위적”으로 진술했던 것과는 달리 은혜의 박사(doctor gratiae)답게 분명히“은혜적”으로 진술한다. 그는 분명 자신의 선배들보다 칭의론에 있어서 훨씬 더 바울적으로 선회한 것이다. 하지만 어거스틴의 칭의론이 성숙되어 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의 말년인 426-7년 사이에 기록한『재고록』(Retractationes)에서는 그의 초기의 칭의론, 특별히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수정되어야 함을 분명히 밝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멘토인 심플리키아누스(Simplicianus. d.400)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수정된 견해를 분명히 표명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수정된 시기는 396년 후반에서 397초반 어느 때로 추정한다. 어거스틴의 칭의적 견해의 갱신은 논쟁에서가 아닌 그가 로마서 9장 10-29절 까지는 묵상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어거스틴은 기본적으로 자유의지 자체를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니교도들은 그 존재 자체를 부인했고, 펠라기안들은 그것을 너무 과장했다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만 타락으로 약해지고 무능해졌다. 그것은 죄 짓는 데에 노예 상태이므로 사실상 부적당하게 되어졌다. 그것은 오로지 은혜에 의해서만 치료된다. 은혜는 자유의지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자유의지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칭의의 공로를 바랄 수 없다. 인간의 칭의는 전적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에 의한 하나님의 선물(Dei munera, Divine gift)인 것이다.

이후에 루터가 그리하듯이 어거스틴의 칭의 개념의 중심에도 독특한 의(iustitia)의 이해가 놓여 있다. 그것이 헬라적이 아닌 히브리적 기원을 가졌음을 주목해야 한다. 히브리적 전통에서는 칭의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관계에서 이해된다. 로마서 1장 17절의 “하나님의 의”는, 루터가 그렇게 이해했듯이, 하나님의 의로움을 강조하는 것이기 보다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해서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어거스틴에게는 사랑이 강조되는 데 그 사랑은 성령의 주요 활동의 산물이다.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은 바로 사랑에 이끌려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루터는 칭의를 이신칭의 즉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sola fide iustificamur)으로 선언했지만, 어거스틴의 칭의는 오직 사랑으로 의롭게 되는 것(sola caritate iustificamur)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어거스틴에게는 칭의와 관련하여 루터에게 나타나는 의롭다고 간주하는 그런 사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iustificare(의롭게 하다.) 즉 의인으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16세기의 신학적 구분인 칭의와 성화식의 구분을 어거스틴에게 기대해서는 안 된다. 굳이 언급한다면, 어거스틴의 칭의는 사건으로서의 칭의(칭의)와 과정으로서의 칭의(성화)를 다 포괄한다고 봐야 한다.

타락한 인간은 정욕(concupiscentia)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느낄 수 밖에 없지만, 성령의 사역으로 하나님의 사랑(caritas)이 그 인간에게 부어져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상 창조의 사역으로 단번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은혜의 역사로 완전에 이르게 된다. 칭의의 의는 루터에게는 전가된 것(imputed)이지만, 어거스틴에게는 내재된 것(inherent)이다. 어거스틴의 칭의는 인간의 실제적인 변화를 전제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의롭게 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칭의는 루터의 “관계적”이해가 아니라 “참여적”이해로 접근되어야 한다.

펠라기안 논쟁의 핵심 주제는 죄인인 인간이 의로우신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이다. 어거스틴은 원죄와 그 유전을 의도하면서 죄는 본성의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펠라기안들은 죄를 개인의 “선택”의 차원에서 보지만, 어거스틴은 죄를 “본성”의 문제로 이해한다. 펠라기안들에게는 구원은 “정당한 보상”이지만, 어거스틴에게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Dei munera)이다.

펠라기안 에클라눔의 줄리안(Julian of Eclanum. ca. 380-454)과의 논쟁에서 줄리안은 정의의 키케로(Cicero)의 도식인 “각자에게 분량대로 주신다”라는 이 대원칙에 근거하여 사실상 개개인의 도덕적 성취에 근거하여 은혜가 주어지는 “의로운 자의 칭의”를 언급한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오직 “불의한 자의 칭의”만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다시 한 번 언급하자면, 어거스틴의 칭의는 “죄인(impius)이 의인(iustus)으로” 실제적으로 변화되어가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칭의에 영향을 미치는 참된 정의는 최고로 의로우신 재판관(iustissimus ordinator)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도성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지 지상의 도성에서는 참된 정의의 흔적만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나 불의한 인간 그리고 인간 사회에서도 사회 자체의 존립을 위해서는 “초월적 의의 흔적”(vestigia supernae iustitiae)이 남아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어거스틴의 칭의 논의 범위는 매우 포괄적임을 기억해야 한다. 어거스틴의 칭의 개념은 종적(diachronic)으로는 전생애를 포괄하여 믿음의 첫 순간부터 생애 마지막 까지를, 더 나아가서는 종말론적 완성을 지향한다. 동시에 그것은 횡적(synchronic)으로는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망라한다. 어거스틴에게서의 칭의는 개인과 사회, 우주적인 범주에서도 논의될 수 있는 것이다.


8 글을 마치면서

어거스틴과 루터 양자는 다 자유의지를 인정한다. 그러나 굳이 구별한다면, 루터에게는 에라스무스와 자유의지 논쟁의 과정에서 보여주듯이 어느 정도 결정론적 경향을 보이는 듯하다. 어거스틴에게서는 루터보다도 더 긍정적이고, 종합적으로 자유의지가 옹호된다. 자유의지와 은혜는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은혜는 자유의지를 완성시켜간다는 표명에서도 보이듯이 그의 자유의지 언급은 더 종합적인 사고에서 되어진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의의 부여는 내재적인 데 비해 루터는 전가적이다. 어거스틴에게 칭의는 실제적인 변화를 의도하지만 루터에게서는 관계적이다. 어거스틴에게는 칭의는 곧 의인화이며, 그런 의인화는 칭의와 성화로 굳이 구별되지 않는 반면에 루터에게는 칭의와 성화는 구별된다. 어거스틴에게는 사실적 칭의이지만 루터에게서는 칭의가 법정적 의미로 언급된다. 루터의 칭의론을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라 한다면, 어거스틴에게는 “이애칭의”(Justification by love)를 돌려야 할 것이다.

루터에게는 신자가 죄인이며 의인이지만 어거스틴에게서는 신자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의인이라 할 수 있다. 중세 스콜라 주의가 의도하는 바가 바로 사랑으로 인한 칭의 아닌가? 루터는 말년에 어거스틴의 구원론과 자신의 구원론 사이에 미묘한 간극이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언급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어거스틴의 칭의론은 상대적으로 루터의 칭의론 보다도 더 가톨릭의 전통에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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