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개혁신학
[논문] 루터의 칭의 이해 1
박영실(총신대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기사입력: 2016/08/17 [10:37]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김순정
배너
【<리폼드뉴스 reformednews.co.kr>】이 글은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역사신학 교수인 박영실 박사가 개혁신학회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루터가 이해했던 칭의에 대해 어거스틴의 맥락에서 고찰하고 제시한다.
 

1 왜 칭의인가?

칭의는 개신교의 표지와 같다. 루터는 “칭의 조항”(Articulus iustificationis)을 “복음의 그 말씀”으로 여기어 교회 존폐의 표지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현대 교회의 대세인 에큐메니칼 운동에서는 칭의교리가 가장 교회의 연합에 걸림돌이 된다고 매도되는 형국이다.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 의 언급대로 칭의가 이신칭의라는 투쟁을 통해서 얻은 것이라면, 적어도 개신교도들은 이 칭의를 구박받는 서출의 신세로 전락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그 칭의에 대한 가르침을 우리 세대의 사람들에게 “청중의 언어”로 선포해야 할 것이다.

루터가 95개조 논제를 그가 몸담고 있었던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Wittenberg Castle Church) 정문에 내건 때가 1517년 10월 31일이었다. 그날을 기념하여 지키는 종교개혁 기념일이 500주년이 되려면 이제 2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한국 개신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로 요란하고 분주할 것을 상상해 본다. 하지만 필자는 최근 한국 교회의 상황이 1885년 최초의 서양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한 이래로 가장 어려운 때가 아닌가 염려한다. 이런 때에 한 사람의 개신교 교회사가로서 나의 소임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사실 루터는 면죄부의 논제도 칭의에 비하면 그다지 중요한 이슈라고 보지 않았다. 칭의 야말로 종교개혁의 핵심 논제라고 그는 확신했던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개신교 종교개혁자 루터의 칭의 신학의 실체가 정확히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한다. 루터가 어떠한 복음적인 체험을 하면서 성서적인 칭의 교리에 도달했는가 하는 것은 롤란드 베인톤(Roland H. Bainton. 1894-1984)이나 베른하르트 로제(Bernhard Lohse. 1928-1997) 혹은 월터 로베니히(Walter von Loewenich. 1903-1992)같은 기독교 역사가들에 의해서 의욕적으로 다루어져 왔다.

그런가 하면 옥스퍼드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E. McGrath. 1953-)는 “기독교 칭의 교리의 역사”에 관해서 개론서가 될 만한 비중 있는 연구서를 출간하였다. 필자는 이와 같은 선행 연구의 기초위에서 출발하되 궁극적으로는 루터의 칭의 신학의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어거스틴의 칭의 신학에 대조해 보는 데 초점을 둘 것이다. 먼저 루터의 칭의 교리의 태동과 그 맥락과 특징을 역사신학적으로 살펴본 후에, 루터의 칭의 신학을 어거스틴의 그것과 비교 정리해 보고자 한다. 기독교 역사에서 어거스틴 신학을 신학적 정통성 판단의 주요한 가늠자로 여길 뿐만 아니라 루터의 신학의 주요한 원천이기 때문이다.

2 루터의 칭의: 새로운 발견이었나?

종교 개혁은 흔히 성경 특히 바울 문헌들의 재발견이라고 평가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종교개혁을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혹은 Saint Augustine. 354-430)의 신학의 재발견으로 이해한다. 16세기에 인쇄술의 발달은 종교개혁에 크게 우호적인 여건을 조성하였다. 1520년경에는 헬라어 신약성경이나 교부 어거스틴의 작품들의 인쇄본을 그리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기독교 신학의 고전으로서의 성서와 어거스틴의 가르침의 복원은 르네상스의 정신에 부합하였고 종교개혁자들의 핵심 관심사였던 것이다.

16세기 루터란 칭의교리를 분명하게 진술한다면, 그것은 “바울식의 ‘전가된 의’개념에 대한 새롭고도 급진적인 해석을 어거스틴의 구원론의 틀 속에 집어 넣어 제시했다.”는 것이다. 개신교 변증가들은 어거스틴 구원론의 진정한 회복을 칭송하였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그런 시도를 이전의 기독교 신학에서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 신학적 창안이라고 비난하였다. 특히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학자 데니폴(Henry Denifle. 1844-1905)은 매우 거칠게 비판하였다. 그는 루터가 중세 교회의 스콜라 신학도, 그리고 기독교 사상의 근본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매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루터였다면, 루터가 어거스틴 수도회의 원장 스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의 천거로 신학을 공부하여 1509년에 신학석사가 되고, 1512년 신학 박사가 되었으며, 1513년부터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신학교수의 자격으로 강의했던 그의 경력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그런 그의 경력은 당시 교회의 인준에 의한 것이었다.

루터교에서는 루터를 교부와 같이 보았다. 그는 요한계시록 14장 6절에 나오는 영원한 복음을 전하는 천사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종교 개혁 연구의 초기 세대 학자들은 루터의 칭의 신학의 급진성을 강조해왔다. 그의 칭의 이론은 근본적으로 중세 후기 신학과의 불연속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하이코 오버만(Heiko Augustinus Oberman. 1930-2001)을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칭의론과 관련하여 중세 후기 신학자들과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 급진적인 불연속성보다는 상대적인 연속성을 부각시킨다.

하지만 루터 이전의 중세의 신학자들과 루터 간에는 분명한 불연속성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중세 내내 칭의를 지칭하는 iustificare(의롭게 하다)는 iustum facare(의롭게 만들다) 즉 인간이 의롭게 만들어져 가는 과정으로 이해되었고, 이 과정은 칭의와 성화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중세 후반의 그 신학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칭의는 중생의 과정에서 분리하여 성찰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루터가 칭의를 중생의 과정에서 분리하여 사고한 것은 그의 신학적 혁신임이 분명했다.

3 칭의의 배경: Anfechtung

1505년에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간 것은 그의 삶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의 급작스런 수도원행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Anfechtung이다. 루터의 생애와 사상의 저변에 짙게 깔려 있는 “Anfechtung(복수 Anfechtungen)”의 개념은 어떻게 정리될 수 있는가? 루터는 라틴어 단어 “tentatio”를 염두에 두고 사용한 독일어 어휘가 바로 Anfechtung이었다. 본래 Anfechtung 의미로는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의문과 고민”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 오는 교묘한 공격에 의하여 일어나는 고민” 혹은 “창조주로부터의 격리감”이다. 이 Anfechtung은 루터의 생애와 신학을 통해 심각한 영적 시련과 양심의 고통이란 개념으로 보여진다.

베른하르트 로제는 이 Anfechtung이 루터의 평생에 걸쳐서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그의 개인적인 사건들과 다양한 체험들과 생각에 밀접하게 배합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 Anfechtung은 그의 사상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요소 중 하나로 인식되어야 하는 것이다. 루터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와의 관계에서 그런 Anfechtung적 요소, 즉 감정적인 불안정을 경험하였다. 50여전에 미국의 정신 분석 학자인 에릭 에릭슨(Erik Homburger Erikson, 1902-1994)은 루터의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의 종교적 발달 과정을 추적하는 주목받을 수 있는 연구를 했다. 물론 에릭슨의 이 연구가 오늘날 루터 연구가들 사이에서 다 인정받은 것은 아니지만, 민감했던 소년 루터를 부모는 지나치게 엄격한 교육을 했으며, 아들의 천재성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아들의 잘못에 대한 적절한 교정 수단을 부여하지 못했다는 에릭슨의 진술은 충분히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루터의 부친인 한스 루터(Hans Luther)는 아들의 출세를 위해서는 자기가 무엇이든 다 하리라 결심하였고 루터 역시 “법률가로서의 성공”을 바라는 부친의 뜻을 따라 출세의 길을 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루터는 그의 나이 21세에 생애의 큰 전환을 갖게 되었다. 법학 공부를 이제 막 시작했을 즈음에 1505년 7월 2일 스토트테른하임(Stotternheim) 근처에서 뇌우를 만나 죽음을 경험하면서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을 한 것이다. 이때 그는 부친의 성인이요, 광부의 성인이었던 성 안나에게 “성 안나여 살려주십시오! 저가 수도사가 되겠습니다”라고 서원기도를 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이야말로 루터에게는 바울의 다메섹도상의 체험에 비견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505년 7월 17일 스토트테른하임 뇌우 사건 후에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루터는 어거스틴 탁발 수도회 소속 에르푸르트(Erfurt) 수도원에 들어갔다. 멜랑히톤(Philip Melanchthon 1497-1560)과 마테시우스(Johannes Mathesius. 1504-1565)에 의하면 루터는 같은 해 이미 사랑하는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혼란한 나머지 이미 수도원에 들어가려는 생각이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루터는 이미 심적으로 심각한 Anfechtung으로 은혜로운 하나님을 만나려고 애쓰고 있었다.

루터는 1534년 설교에서 사실상 Anfechtung이 “부친의 소원에 매여있는” 자기를 “수도사가 되도록”(to monkdom)이끌었다고 회상한다. 루터의 수도사로의 길은 어거스틴 엄수파 수도회의 “수도생활의 엄격한 관습”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다. 어거스틴 수도회의 선임자는 루터에게 마루에 부복하도록 요구한 후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을 묻자,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Dei gratia)와 당신의 자비”라고 대답하였다. 이 시기의 루터의 간절한 관심은 어떻게 해야 그 은혜를 만날 수 있는가 였다. 로체역시 이 Anfechtung이야말로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간 가장 중요한 이유로 지목한다.

정리해보자면, Anfechtung은 루터의 생애에서 원인모를 심적 불안정과 고통을 야기하는 요소였었다. 하지만 심각한 심적, 영적 시련임이 분명했던 이 Anfechtung이 루터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게 하는 에너지가 됐고, 칭의의 “터치톤”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Tentatio(Anfechtung)이 있는 데, 이것은 모든 지혜 위의 지혜인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정당하며, 참되며, 맛 좋으며, 사랑스러우며, 강력하며, 위안이 되는지를 알고, 이해하고, 또한 경험하도록 계도하는 터치톤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서 Anfechtung의 이해를 여기에서 멈추어서는 안될 것이다. 심각한 영적 고민, 고통, 시련의 양상으로 나타나는 Anfechtung의 저변에는 인간의 죄와 그것과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등장하는 “임박한 심판”의 두려움이 늘 루터에게는 있었다. 칭의의 온전한 이해에 이를 때까지 그의 최대 관심은 늘 인간이 어떻게 심판에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 것인가였다. 페터스(A. Peters)는 루터에게서 칭의 조항은 늘 심판의 지평에서 논의되어 왔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일련의 설명을 종합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Anfechtung이 가깝게는 루터를 수도원으로 이끌었고, 근원적으로 칭의의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이다.

4 루터의 Ad fondes: 바울과 어거스틴

4.1 근원으로서 바울

루터는 체질적으로 사색적인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성서 강독을 통하여 구원의 바른 이해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루터는 1507년 2월 27일에 에르푸르트에서 신부로 안수 받았다. 어거스틴 수도회 원장인 스타우피츠는 루터가 자주 찾아가서 고해성사를 했어야 했던 그의 영적 상담자였다. 스타우피츠는 루터의 고해성사를 늘 청취했으니, 그의 내면의 고뇌와 갈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시대의 교회 구원의 방도를 온전히 수렴하지 못하여 늘 갈등하고 회의(懷疑)하는 이 나약한 젊은이가 어찌 교회를 세워갈 수 있으리요!

이런 루터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교회의 미래의 세대를 세워가는 교회의 교사직에는 부적격자로 판정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스타우피츠는 루터의 부친과는 달리 이 갈등하는 젊은이를 통해 더 나은 교회의 미래를 기대했고, 또 그에게서 남다른 건설적 재능을 보고 있었다. 그 점에서 스타우피츠는 확실히 그 시대의 또 한명의 선각자였고, 루터에게는 고마운 후견인이었던 것이다. 스타우피츠는 그를 정죄하는 대신 오히려 파격적으로 이 젊은 사제에게 성서를 공부해서 박사가 되고, 그가 깨달은 그 성서의 지식을 후진에게 전수하는 교회의 교사로서 나갈 수 있도록 추천하였다.

1512년 10월 루터는 구약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는 동시에 스타우피츠가 가르치던 성서 주석학 강의를 이어 받는 교수가 되었다. 루터는 스타우피츠의 조언대로 성서 연구와 강의를 해 나갔는데 그것을 순서대로 나열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시편 강해 (1513-15); 로마서 강해 (1515-1516); 갈라디아서 강해 (1516-17); 그리고 히브리서의 강해(1517-18) 루터는 이런 성서 강해를 해 나가면서 복음의 바른 이해에 도달했고, 또한 그의 성서 강해는 많은 학생들과 동료들의 호응을 얻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스타우피츠가 인도한 이길을 따라 “칭의”라는 목표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루터는 1513-15년 사이에 시편을 강의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마음속의 고통과 불안 즉 Anfechtung을 의식하고, 또 한편으로는 시편의 본문에 바로 그런 인간의 고통이 너무나도 잘 표현되어 있다는 것을 보면서 놀라워했다. 예를들면, 시편22편 1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보면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떠올랐다. 이제 그는 시편을 “기독론적 대속” 견지에서 해석할 수 있는 착상에 이르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의 칭의 이해의 급격한 갱신은 꽉 막혔던 바울의 로마서 1장 17절의 “하나님의 의”(iustitia Dei)의 이해가 마치 봇물이 터지듯이 풀리면서 이뤄진다. 바로 이런 성서 연구야말로 말로 그에게는 기독교 진리의 근원에 이르는 첩경이었던 것이다.

1521년 4월, 루터가 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보름스 제국의회에 출두하여 황제와 제후와 교회의 대표자들 앞에서 주장한 그 발언을 요약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나의 글에 대해 성서와 명확한 이성으로부터 유죄임을 입증하지 않는 한 (나는 교황이나 공의회 자체의 권위를 믿지 않는다. 그들은 자주 잘못을 범하며, 서로 모순이라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취소할 수 없고 취소하지도 않겠다.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 “진실”은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해야 했고, 그 “진리”는 “하나 님의 말씀”에서 찾아야 했다. 그에게는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깨달은바 구원의 지식(칭의)의 선포를 취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고 바울을 없이하고자 했던 그 때가 그랬던 것처럼(행 23장), 그를 없이 하고자 하는 로마교 사람들의 위협 속에서도, 발트부르그(Wartburg) 성주의 도움으로 발트부르그성에 숨어 지내게 된다. 그러나 그 도피가 종교개혁 역사의 완수하기 위한 첩경임을 누가 알았으리요! 그곳에서 루터는 다른 방해와 잡념으로부터 차단되어 오직 “한 일”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제롬의 불가타(Vugate) 성서가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는지라 학문이 없는 일반 대중의 접근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 외에도 바른 구원관의 정립에도 장애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했던 “오직 한일”이란 에라스무스판 헬라어 성서로부터 그의 모국어인 독일어로 성서를 번역하는 일이었다. 그는 신약성서 번역 역사를 8주 만에 마치게 된다.

이후에 루터는 구약성서도 사실상 자신의 책임 하에 독일어로 번역하게 함으로, 비로소 독일인들은 신앙과 진리의 “원천(源泉)”인 성서를 어렵게 않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모토를 “오직 성서”(sola scriptura)라고 한다면, 그것은 루터와 같은 우리의 신앙의 선진들은 성서야말로 신앙과 진리의 원천임을 인식하고, “인간이 어떻게 의로워질 수 있는가?”라는 그 바른 칭의적 지식을 바로 그 성서에서 찾고자 했다는 것이다.

4.2 근원으로서의 어거스틴

개혁자 루터의 시대 정신은 르네상스였고, 그 르네상스의 정신은 Ad Fondes! 즉 “근원으로 돌아가자!”였다. 루터는 그 기독교의 근원이 성서임을 인식했고, 굳이 또 하나의 근원을 찾는다면 교부들임을 인식하였다.

루터에게 있어서 교부 중의 교부는 바로 어거스틴이었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중세기 내내 가장 중요한 신학자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중세후기는 일종의 어거스틴 르네상스(Augustine-Renaissance)였으며 특히 어거스틴의 죄론과 은혜론이 주목을 받았었다. 이제 어떤 방식으로 그 루터의 내면 세계 속에 어거스틴이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서술해 볼 것이다.

루터는 어거스틴 탁발 수도회에 들어가 일 년 동안의 수습수사 기간을 마친 후에 1506년 9월에 어거스틴 수도회에 정식으로 입회하게 된다. 어 떤 의미에서 루터는 어거스틴의 문하생이 된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원하였다.

나, 어거스틴 루터 수사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동정녀이신 성 마리아와 성 어거스틴 형제단의 총책임자를 대신하시는 비난트 원장 신부님께 성 어거스틴의 규율에 따라 죽을 때까지 복종할 것과 개인 소유 없이 살 것과 순결하게 살 것을 고백합니다.

선창자가 “위대한 교부 어거스틴”을 노래하는 동안, 루터에게는 수도복이 주어졌다. 그것은 이 수도사가 옛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였다. 이때 그는 세속 이름 마틴(Martin) 대신에 수도사의 이름 어거스틴(Augustine)을 받았다. 당시의 교회의 관습에서는 수도사의 서약을 하면서 자신의 부친으로부터 받은 이름 대신에 새로운 이름을 받으면 순결하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런 개명은 세례 못지않게 큰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하지만 루터에게 어거스틴이라는 이름이 주어졌다고 해서 그의 생각이 당장 어거스틴적으로 바뀌었을 것이라는 성급한 판단은 할 수 없다. 어거스틴 수도회의 이 젊은 수도사는 적어도 어거스틴 사상이 담겨진 책 몇 권 정도는 접했을 텐데, 이 기간에는 그가 어거스틴의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를 보여줄 자료는 거의 찾을 수가 없다고 본다.

사실 루터는 에르푸프트에서 인문학 석사(M.A)과정 중에 오캄(William of Ockham. c.1287-1347), 가브리엘 비엘(Gabriel Biel, 1420-1495), 그리고 어거스틴의 사상을 기본적으로는 소개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그때도 루터가 어거스틴으로 몰입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루터는 수습 기간을 마친 후에 당대의 최고 인기 있었던 유명론자 신학자였던 가브리엘 비엘의 교회의 규칙서를 숙독하게 된다.

1509년에 루터는 자기가 수도사로 처음 들어갔던 그 에르푸르트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돌아가서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 1100-60))의『네 명제집』 (Sententiarum libri quattror) 주석을 가르쳤다. 롬바르드는 이 책에서 아리스텔레스의 철학과 어거스틴 신학을 아울러 취하고 있으며, 특히 어거스틴 책에서 수많은 인용을 했다. 루터가『네 명제집』을 연구하면서 당연히 이런 사실들을 확인했을 것이 아닌가? 루터는 이 명제집을 연구하는 중에 자기 안으로 어거스틴이란 이름이 마치 봇물 터지듯이 밀려 들어옴을 경험하였다. 이 시기에 많은 어거스틴 저서에 루터 자신이 기입한 수많은 “여백 주기(Randbemerkungen)”들 자체가 바로 그 사실을 증명해 준다.

수도원에 들어온 지도 수년이 지난 후였다. 루터는 이 사실이 마치 우연이듯이 진술하지만 그것이 과연 우연이었을까? 루터의 내면세계를 그동안 차지하고 있었던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John Duns Scotus (1265/66-1308), 오캄, 더 나아가서 가브리엘 비엘 마저도 쓸려 나가고 대신 그 자리에 어거스틴이 우뚝 선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이 사건은 루터가 로마서 1장 17절의 “하나님의 의”를 발견한 사건 다음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제 어거스틴은 성서(바울) 다음으로 루터의 스승이 된 것이다.

루터는 동료 수사였던 랑(Lang)에게 쓴 편지에 보면 온 세상 그리고 교회의 한 복판에 펠라기안주의가 스며 들어있고, 가브리엘 비엘 마저도 은혜의 견지에서 보면 펠라기안주의에 경도되어 있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자신은 바울과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았으며 자신의 주적은 펠라기안들이기에 결코 펠라기안주의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루터의 시편강의(1513-15)와 로마서 강의(1515-16)는 대단히 심도 있게 준비되었고 어거스틴에 관한 광범위한 인용이 이뤄진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로마서 주석에 보면, 타락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애당초 그리스도의 은혜와 협력할 수가 없다한다. 이런 입장 표명은 당시 교회의 구원관으로부터 이탈이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자신은 이미 바울과 어거스틴의 길을 따를 것을 결심하고 있었다.

1525년 루터는 De Servo Arbitrio(노예의지에 대하여)를 썼다. 어거스틴이 펠라기안 에클라눔 줄리안(Julian of Eclanum, c.386-c.455)을 논박한 글에서 언급된 “Servum arbitrium”(노예의지)에서 그 제목을 가져왔다는 사실 자체가 루터는 자신이야말로 은총의 신학자 어거스틴의 후예임을 과시하고 있었다. 가장 완벽한 자신의 책으로 간주했던 이 책으로 루터는 “회의주의자”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Roterodamus, 1466. 1536)와 승부했다.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의지에 큰 역할을 부여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하는 것으로 상정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어거스틴의 노선을 따른다. 에라스무스는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년경~1384년)와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 1407-1457)만이 루터를 지지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루터는 그래도 자기에게는 “완전히 자기편인 어거스틴이 있다”고 응수했다.

그러나 1531년에는 루터의 이런 마음에 다른 분위기가 감지된다. 어거스틴이 믿음 뿐만 아니라 사랑을 또한 강조하고 있음을 루터가 알게 된것이다. 1531년 5월말 수아베의 개혁자 Brenz(Johannes Brenz, 1499-1570)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대답에는 변화가 감지된다.

당신은 늘 어거스틴을 생각하며 그 안에 머물러 있었소, 인간 이성의 의로움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이 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은 옳소. 그러나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율법을 완성하게 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문제가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견해는 스콜라 철학보다는 낫지만 성 바울과 딱 일치하지는 않는 것 같소, 그처럼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문제를 어거스틴이 충분히 설명하고 있지 못하지만 나로서는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그를 우리 견해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처럼 인용하오...”

중세 후기의 바울 전통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어거스틴의 신학에서 자신의 것과 얼마의 차이를 서서히 느끼지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차이점을 공개하기를 대단히 조심스러워했던 것이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배너
배너
배너
가장 많이 읽은 기사
충청노회 임시회, 안건상정 부결 적법한가? /리폼드뉴스
[이형만 목사 논단] 총회 파회 이후 올바른 총회역할에 대한 제안 /이형만
총회화해중재위, 산이리교회 화해 위한 조건부로 난항 /리폼드뉴스
종교인 과세, 교회 50~60% 이상 근로장려세제 대상 될 수도 /리폼드뉴스
사랑의교회 공동의회 정관변경 안건 상정 연기 /리폼드뉴스
“총회가 총신대 ‘직할’해 주요 사안 ‘총회 인준’받게 정관 수정해야” /송상원
분당중앙교회 콘퍼런스 , ‘종교인과세에 대한 기독교 입장 선언문 /리폼드뉴스
광주지법, ‘광주중앙교회’ 상표법 위반자 벌금형 선고 /리폼드뉴스
명성교회 "법률행위 대표자 원로목사인가 임시당회장인가" /소재열
대전고법, 충남노회 정기회측 인정 판결 /소재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