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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최홍석 교수의 개혁주의 인간론 2
강웅산(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기사입력: 2016/06/01 [10:08]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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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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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강웅산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은퇴를 하는 조직신학자 최홍석 교수의 인간론에 대해 연구하였다. 최홍석 교수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고, 인간의 본성을 연구했으며, 철저한 성경적 신학방법론을 가지고 인간론을 접근하고 연구하였다. 

인간의 본성

하나님 형상과 함께 최홍석 교수의 인간론에서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강점은 인간 본성에 대한 구조적 설명이다. 고대로부터 인간은 인간 본성에 대한 설명을 위해 많은 시도를 해왔다. 흔히 말하는 영, 혼, 몸이 무엇이고 이들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위해 역사적으로 삼분설, 이분설 등이 등장하였다. 최홍석 교수는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특정한 세계관이 지배하는 논의들을 배제하며 인간은 “영-육 통일체”라는 전인적 관점을 취한다. 그는 우선 역사적 조명을 통해서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으며 그러므로 어떤 결론을 향해 가야 할지를 진단하였다.

최홍석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플라톤, 에피쿠로스 학파의 루크레티우스 등 세속 철학자들이나 동방교회의 오리게네스, 이레내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닛사의 그레고리 등의 신학자들과 영지주의자들이 삼분설을 주장하였고, 서방교회의 터툴리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아다나시우스, 데오도렛 등은 이분설을 주장하였다. 중세에 이르러는 동방교회의 다메섹 요한 같은 신비적 성향의 노선이 삼분설을 서방교회의 안셀름 같은 인물은 이분설을 옹호하였다.

종교개혁은 이 논의에 큰 변화를 주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 개신교나 카톨릭 모두 이분설이 대세를 이루나 윗치만 니, 『스코필드 주석 성경』 등의 삼분설 입장도 존재해 왔다. 삼분설(Trichotomy)은 최홍석 교수는 설명하기를,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유추된 인간이해이다.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기 때문에 둘은 적대적일 수밖에 없어, 혼이 그 사이에서 중재한다는 것이다. 삼분설의 문제는 영, 혼, 몸이 각기 인간을 구성하는 독립적 요소라는 것이다. 각 요소가 물리적, 정신적, 종교적 영역에 관여한다는 것은 후대 나타나는 지, 정, 의의 기능심리학(Faculty Psychology)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최홍석 교수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이분설(Dichotomy)은 삼분설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영, 혼, 몸에 대한 해석학적 문제가 제기되었고, 예를 들어 눅 1:46-47처럼 “프스케”와 “프뉴마”가 다른 실체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 되었다. 오히려 인간이 물질과 비물질 즉 몸과 영으로 되어있다는 형이상학적 이분설, 또는 최홍석 교수의 표현을 빌려, “실체적 이분설”이 보편화 되었다. 이 논의에서 문제시 되는 것은 비록 이분설이 삼분설에 깔려있는 형이상학적 전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등장하였다 하더라도 이분설 역시 이원론적 극단에 빠지게 되어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며 영혼불멸설로 대신하려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홍석교수는 앞서 하나님 형상 논의 때처럼, 이분설의 이원론적 모순을 지적하는 방식으로 개혁주의 인간론을 세워나간다. 그러나 이분설에 대한 반박 방식은 철학적 사변에 의한 방식이 아니라 성경적 세계관을 바르게 소개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가장 결정적인 분석은 비록 헬라적 사고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신약이라 할지라도 히브리적 세계관 속에서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약이 헬라어로 기록되었으나 그럼에도 히브리적 배경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의 통념입니다.”

그렇게 볼 때 신약의 구절들은 존재론적 또는 실체적 이원론 보다는 전인적 이해를 우선시 한다는 것이다. 최홍석 교수는 “헬라 사상의 특징을 이루는 영육 대립의 이원론적 경향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힘주어 주장한다. 또한 전인적 이해에 대한 강조를 위해 데살로니가전서 5:23이나 창세기 2:7에 대한 박형룡의 해석을 인용한 것은 총신 인간론 전통의 연속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유익이기도 하다. 히브리적 세계관에서 “네페쉬”나 “루아흐”가 결국은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두 다른 표현”일뿐이며 어떤 부분을 지칭하기 보다는 전인을 가리키는 용어로 이해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최홍석 교수는 개혁주의 전인적 인간론이 세워지는 과정에 등장하는 단일론에 대한 설명을 빠뜨리지 않았다. 도예베이르트, 얀스, 폴런호번, 베르까우워 등을 단일론을 지지한 학자들로 들었다. 단일론의 핵심은 이분설이 삼분설의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해 등장하였으나 여전히 이원론적 모순이 잠재해있기 때문에 인간을 “유기적 통일체”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도 인간이 구조적으로 복수의 요소(예, 영과 몸)를 지니고 있다는 것 자체는 부인하지 않지만, 또한 이런 요소들을 모아놓은(conglomeration) 것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단일론은 신학에 침투해 있는 이원론적 세계관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최홍석 교수는 단일론에 대해 장점과 단점으로 선명한 평가를 내려주었다. 단일론의 가장 큰 기여는 인간을 “영-육 통일체” 즉 “유기적 통일체”로 본 것이다. 인간은 창조, 타락, 구속에 있어서 언제나 전인적 인격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일론은 교리적으로 모호한 단점이 있다. 그것은 중간기 상태에 대한 설명이다. 단일론에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는 자칫 경직된 사고로 절대적 단일론에 빠져 죽음과 부활 사이의 상태를 영혼 수면설로 설명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최홍석 교수는 영혼 수면설이나 존재 멸절론은 성경적이지 않음을 분명히 하였다.

죽음으로 몸과 영혼이 잠정적이며 일시적인 분리 현상이 있음을 인정할 것이고, 고전 15:53-54의 “불멸”은 영혼만이 아닌 전인으로 이해할 것을 분명히 하였다. “인간은 ‘본재적인 불멸성’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여된 불멸성’을 소유한다고 해야 합니다.” 더 이상 선명할 수 없다. 최홍석 교수는 단일론이 성경적 관점을 잘 수용하는 면이 있으면서 온전히 드러내는 데 있어서는 역부족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중간기 상태를 반영하여 “조건적 영육 통일체로서의 인간”이란 표현을 내놓았다. 그 이유는 “구속사의 진전 속에 나타나는 다양한 상태를 염두에 두고 인간의 구조적 본성을 파악해야 함을 밝히기 위해서다.” “조건적”이란 말에서 절대적 단일론이 갖는 잠재적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최홍석 교수는 인간 본성에 대한 논의를 마감하며 매우 간결하면서 유익한 결론을 내려주었다. “성경이 제시하는 인간의 구조적 본성은 인격의 단일성과 구조적 이원성이 동시에 견지되어야 한다.” 성경적 인간론을 위해서는 그는 “먼저 우리에게는 인식의 전환이 요구”된다고 강조한다. 영-육을 이원론적 세계관이 아닌 유기적 연합체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최홍석 교수가 추구하는 “세계관적 응용”이라고 결론짓는다.

최홍석 교수의 신학방법론

최홍석 교수의 강의를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한결 같이 그의 신학 논의가 꼼꼼한 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더러는 매우 철학적이라고까지 평한다. 그것은 강의에서만 아니라 그의 글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최홍석 교수의 신학 논의는 우선적으로 개혁주의 인식론적 사유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말할 수 있다.

혹자는 신학이 철학에 속한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신학이 철학의 방법론과 틀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 구원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 기대에서 최홍석 교수의 강의나 글을 접했다면 나름 만족스러워 할 수 있다. 그의 논의는 상당한 철학적 지식을 배경으로 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표면적인 판단이다. 최홍석 교수가 논의를 통해서 애써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고대 헬라 철학 즉 비성경적 인식론에 근거를 두고 있는 사유 방식으로는 성경적인 인간론-물론 신학 전반을 포함하여-을 논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의 개혁주의 인간론 논의는 우선적으로 개혁주의 세계관 및 인식론을 기반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아마도 이 점을 신학생들이 먼저 이해하고 강의와 글에 임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늘 그렇듯이 큰 숲을 보지 못하고 앞에 있는 나무에 가로막혀 끝내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최홍석 교수는 마치 숲 속에 갇혀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한 나무만을 바라보고 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지적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플라톤, 데카르트, 꽁트 같은 이원론적 세계관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같은 일원론적 인식론에 갇힐 때 진정한 성경적 인간론에는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는 그러한 모순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면서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 카톨릭과 루터란은 그런 점에서 좋은 예가 된다.

로마 카톨릭은 하나님의 형상 개념을 철저하게 자연과 초자연의 구분을 전제하는 이원론적 방식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의 “추가적 은사”(donum superadditum) 개념은 이성이 속한 자연이 타락하지 않은 낙관적 인간론을 형성하게 하였고 결과적으로 공로신학을 정당화 하였다. 반면 루터란은 전적 타락에 대한 강조로 원의(justitia originalis) 상실과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자연과 은총이 사실상 서로 분리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또 다른 이원론의 형태로서 땅의 것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지는 취약함을 초래하게 된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원론적 세계관을 극복하지 못할 때, 성경이 말하는 인간론에 도달하기는 어려워진다. 최홍석 교수는 거의 모든 논의를 흔히 학생들이 말하는 것처럼, 철학적으로 개진해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쉽게 빠지기 쉬운 인식론적 우(愚)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안타까운 마음의 배려라고 말하고 싶다.

최홍석 교수의 신학방법론은 또한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와 “전체 성경으로”(tota scriptura)의 원리에 충실함을 보이고 있다. 그는 인간론 논의 방법론을 밝히는 대목에서 “인간론의 진술 원리는 역시 개혁 신학의 원리를 따라 ‘특별 계시 의존 신앙’을 원리”로 삼는다고 밝히고 있다. 인간론의 성격상 인간의 실존적 상황과 밀접한 특성을 감안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 요소들이 있다. 그래서 신학화의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교리 축소 현상”이나 “상황 우위론적 접근 방식” 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최홍석 교수는 “성경이 교의의 유일한 원천”임을 강조하며 교의가 절대화 되어서는 안 될 것을 말한다. 즉 어떤 인간론 논의도 그 주제가 절대화 되어서는 안 되고 오직 성경만이 신학을 지배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오직 성경” 즉 “특별 계시 의존 신앙”의 원리는, 최홍석 교수에게 있어, 창조-타락-구속의 구속사적 이해로 표현된다.

그는 찰스 하지,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등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신학함의 공통점으로 창조-타락-구속의 구속사적 인식론이 그들의 신학을 지배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왜 구속사적 전망 속에서 인간론을 다뤄야 하는지 스스로의 질문에 대해 “그것은 모든 교리들이 동일한 구원사적 전망 속에서 서로 간에 유기적 상관성을 지닌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특별 계시 의존 신앙”을 구현하는 것은 구속사적 인식론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의 논의는 관련된 성경 본문을 충실히 인용할 뿐만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는 주해를 통해 논의를 뒷받침하는 꼼꼼함을 보임으로써 명실공히 교의가 성경의 지배를 받아야 함을 실천으로 입증해 보였다. sola scriptura와 함께 tota scriptura에 충실할 때 신학이 성경의 지배를 받는 것임을 말이다.

또한 최홍석 교수의 인식론은 반립(antithesis)에 대한 문제를 반영한다. 개혁주의 인식론에 있어서 반립적 세계관이 자리매김을 하기까지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와 코넬리우스 벤틸(Cornelius Van Til)의 기여가 컸다. 우선 반립이란 단순히 개념이나 관계의 반대되는 성질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구조는, 특히 인식론적 관점에서 볼 때, 반립적 세계관을 기본으로 한다. 모든 인식론적 반립은 존재론적 반립에서 출발한다. 즉 창조주와 피조물의 존재론적 구분이 개혁주의가 말하는 반립의 근거이다. 이에 대한 의식은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부터 발견된다.

그러나 반립은 자주 이원론과 혼동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는 어떤 것에 있어서도 중립적 상태를 허용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인간론에서 죄의 문제를 다룰 때, 죄는 상대적이거나 존재론적 한계의 결과가 아니라 중립이 있을 수 없는 절대적 성질의 것이다. 죄의 결과인 죽음과 생명의 차이는 절대적이며 다른 가능성은 없다(롬 3:23, 6:23).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는 일반은총을 인정한다. 이것이 카이퍼와 벤틸의 기여이다. 성경적 세계관은, 비기독교적 세계관과는 다르게, 단순한 이원론적 구도에 의한 반립이 아닌, 그렇다고 경직된 일원론도 아닌, 죄와 타락의 절대적 현실에 대한 인정과 함께 타락한 현실 속에서 작용하는 일반은총에 대한 이해가 특징이다. 최홍석 교수의 인식론과 세계관은, 그런 점에서, 카이퍼와 벤틸의 연장선 상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최홍석 교수의 신학함에 있어서 가장 높이 사고 싶은 특징은 그의 실천지향적 열정이다. 인간론 논의가 자칫 이론적이고 사변적일 수 있다. 최홍석 교수 자신의 논의 또한 그런 오해에 열려 있다. 그러나 그의 인간론을 읽노라면, 문제 제기에서부터 결론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실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 실존”(coram Deo-Sein des Menschen)에 대한 의식, 성경에 충실한 인간론이 삶과 실천에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 지에 대한 간절한 외침, 바른 신학에 근거한 하나님의 형상 회복과 잘못된 이원론에서 벗어난 기독교 문화관 정립, 늘 설교 사역을 염두에 둔 신학적 고민, 등 그 외에도 여러 면에서 최홍석 교수의 실천지향적 관심은 그의 글 속에서 진하게 다가 온다. 이 점은 아마도 31년 간의 강의와 연구에서 우러나오는 완숙의 깊이가 아닐까 생각된다.

나가는 말

우리는 최홍석 교수의 신학함을 통해서 그의 나지막한 소리가 어떻게 우리의 가슴에서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되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분명한 개혁주의 인식론에 입각한 그의 확신은 교회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승화되었다. 성경에 충실하고자 하는 그의 성실함은 지침없이 어떤 이론과 사설 앞에서도 타협을 거부하였고, 개혁주의에 대한 그의 충성도는 역사에 대한 진지한 반성으로 나타났다. 그의 인간론은 그가 우리에게 남긴 여러 선물 중에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총신에서 최홍석 교수의 성역 31년이 막을 내린다. 앞선 개혁교회 역사의 모든 선배들이 자신들의 세대 앞에서 성실히 충성을 다 했기에 오늘 우리가 있다. 역사는 최홍석 교수를 자신의 세대 앞에서 충성을 다했던 우리의 또 하나의 스승으로 선배로 기억할 것이다.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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