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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지적 장애인 세례의 신학적 정당성 2
정승원(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기사입력: 2016/05/18 [12:46]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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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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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담당하는 정승원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이 글에서는 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세례의 정당성을 신학적으로 밝히고 있다. 특히 동대학원의 조직신학 교수인 최홍석 교수의 유아세례의 정당성에 대한 논문을 바탕으로 해서 비교하여 연구하였다.

III. 구원론적 고찰

지적 장애인이나 유아나 노인이나 누구나 다 죄인이라는 사실은 인간이면 모두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품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지적하듯이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유아세례는 로마 천주교에서 주장하듯이 “사효적 효과”(Effectum ex opere operato)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유아세례는 언약적 차원에서 부모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에 순종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이와 같은 지적 장애인의 세례도 같은 차원에서 베풀 수 있다고 하겠다. 사실 구원을 받는다는 것과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동으로 다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지만 세례를 받는 이유는 먼저는 하나님의 언약적 명령 때문이요 또한 모두가 구원을 받아야 할 필요성 때문이다. 구원의 여부가 100% 결정되지 않았다고 세례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전통의 많은 학자들은 일찍 죽은 유아의 구원 문제와 유아세례와 연결시키곤 한다. 차영배는 칼빈을 비롯한 개혁주의자들은 유아 세례를 은혜언약에서 중생의 인친 것으로 봤다고 한다. 존 머레이 역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인치는 표지로서 유아들에게 베풀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르트 신경은 유아는 부모와 함께 은혜 언약 아래 있기 때문에 일찍 데리고 가셔도 선택과 구원에 대해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유아 세례가 구원의 100% 확실한 근거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세례는 실체를 향한 표지(sign)요 인침(seal)이 되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받고 일찍 죽은 유아들의 구원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즉 이들에게 복음을 지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할 능력이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지만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 속단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적 장애인도 마찬가지이다. 지적 장애인은 비록 신체적으로 성숙하고 활동적이긴 해도 지적으로는 유아와 별 다를 바가 없다. 유아세례가 자동으로 구원을 100% 보장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유아세례로 인해 유아 때 죽는다 할지라도 부모가 그의 구원을 기대하고 소망할 수 있다면 또한 지적장애인에게도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지적 장애인의 세례가 그의 구원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새생명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은 그 세례를 통해서 부모들과 형제들이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최홍석은 유아세례가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아세례는 구원이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함축한다고 설명한다. “유아세례를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행위와 그의 계시가 언약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근본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구속 행위는 언약을 맺음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이며 그러한 것들이 계시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의 구원이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이렇듯이 유아세례는 재세례파나 반대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 자체에 어떤 효력이나 마력을 지닌 것이 아니라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언약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뿐이다.

아무튼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아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에 대한 최홍석의 답은 유아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판단할 수 없다면 이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아닌가? 최홍석의 답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근거로 볼 때 ‘아니라’고만 대답할 수 없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최홍석은 개혁주의에서는 유아들의 경우 “자신의 지식 없이”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방식에서 유아세례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총은 서로 연결된다고 말한다. 심지어 “성령의 조명으로 전도 없이도 내면적 방법으로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인식을 얻게 하는 일이 있다”는 칼빈의 주장을 인용한다.

최홍석이 인용한 칼빈의 주장을 확대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들은 말하기를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는 것인데(롬10:17) 유아들은 아직 들을 능력이 없고 따라서 하나님을 알 수도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모세의 가르침처럼 어린아이들은 선악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신1:39). 그러나 이 사람들은 듣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라고 하는 사도의 말은 다만 주께서 그의 백성을 부르실 때에 흔히 사용하시는 일상적인 절차와 경륜을 지칭하는 것 뿐이며, 다른 방식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 불변의 절대적인 법칙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부르실 때에 그런 다른 방식을 사용하신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곧 복음 선포의 수단과 관계없이 성령께서 조명하시는 그런 내적인 수단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바르게 알게 하시는 것이다.

칼빈에 따르면 구원을 위한 일상적인 절차와 경륜, 즉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절차와 경륜 외에 다른 방식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칼빈은 믿음이 들음에서 나오는 절차와 경륜을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니다. 인간 편에서는 절대적 기준을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의 조명과 내적 수단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아의 지적 능력에 근거하여 유아세례를 반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최홍석은 칼빈의 주장을 언급한 후 “물론 여기서의 유아는 일단 신앙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경우로 제한한다. 이러한 경우, 유아들이 그들의 지식없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에 의한 방법 외에 유아들을 구원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사실 그 길밖에 다른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부연 설명을 한다. ‘지식 없이 구원 받은 유아는 신앙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경우로 제한한다’고 하는 것은 분명 오해의 여지가 있다.
 
겔14:20에서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말씀한다. 즉 구원은 자기에게 달린 것이며 부모 신앙을 근거로 유아세례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이 말씀에 함축되어 있다. 최홍석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부모의 신앙으로 유아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유아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이라는 것이다. 언약 공동체 안에서의 세례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개혁주의적 원리가 지적 장애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외형적 지식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도 없이 무식한 중에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성령의 조명으로 전도 없이도 내면적 방법으로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인식을 얻게 하는 일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만 속한 “내면적 방법”으로 또한 성령의 조명으로 지적 장애인도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을 얻을 수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지적 장애인에게도 하나님께 속한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언약 공동체의 의무요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구원의 전제조건은 물론, 세례의 전제조건인 믿음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유아의 믿음은 가능한 것인가? 더불어 지적 장애인의 믿음은 가능한 것인가? 칼빈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일상적인 절차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물론 구원 얻는 절차에 있어서 믿음의 중요성을 떨어뜨리는 주장이 아니다. 믿음에 앞서는 성령의 조명과 하나님의 내면적 방법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한편 최홍석은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지만 믿음 자체가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다만 구원의 원인인 은총의 방편일 뿐이라고 말한다. 즉 인간의 편에서 공로 차원에서 만들거나 스스로 가질 수 있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주시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할 때 여전히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믿음이 구원에 앞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아세례에 있어서 필요한 믿음의 의미를 최홍석은 같은 맥락에서 다룬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시작하는 것 이전에 인간이 신앙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당연히 구원의 표를 받는 일에 대해서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 구원의 표란 바로 세례를 의미한다. 구원의 표(sign)란 구원 받는 면죄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실체를 지명하는 표라는 뜻이다. 표 자체에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 즉 그리스도에게 능력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세례에 앞서 지적 장애인에게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즉 그에게 지적 동의 차원의 믿음을 먼저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요구라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최홍석은 믿음이 구원의 원인이 아닌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한 의미로서의 ‘다음’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오직 은혜로써만 구원 얻는다는 성경의 진리를 부인하는 셈이 되고 만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의 일을 우리 안에서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믿음의 실체는 믿는 개인의 의지적, 심리적, 지적, 심지어 영적 능력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시작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라는 것이다. 또한 최홍석은 세례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구속사적으로 그리고 예정론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진정한 세례는 우리의 믿는 반응에 달려있는, 혹은 우리의 반응에 따라 나오는 어떤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지식 없이’ 되는 그 어떤 것이다. 원리적으로는 이미 그 일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더 깊이 말한다면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이루어졌다(롬 5:8).”

“원리적으로는 이미 그 일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는 구속사적-예정론적 설명은 우리와 상관없이 형식적으로 혹은 유명론적으로(nominally) 하나님 안에서만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말이 아니다. 삼위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구속사적-예정론적 표현은 다음과 같은 최홍석의 글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영적인 것이기에 물리적으로 현상적으로 파악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 연합은 창세 전, 시간을 초월한 영원으로부터, 시간 너머의 종말론적 영원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것이므로 유한하고 죄악된 인간의 이해력으로 온전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은 ‘신비적인 연합(unio mystica)이란 표현 이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달렸다는 것은 구원의 신비적 특성을 의미한다. 그 신비적 특성은 구원에 대한 인간의 일방적 판단을 보류해야 함을 의미한다. 유아가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근거는 유아가 받을 수 있는 구원의 신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세례를 받은 유아가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역시 신비인 것이다. 구원을 신비로 돌리는 것은 어떤 신비주의적 발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신실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최홍석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이 은혜로 세례 받은 유아들 역시 그의[그리스도의] 몸으로 접목된다. 유아들, 그들은 확실히 아직 어떤 이에 대해서도 모방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리스도, 그 분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얻게 된다. … 그는 또한 그의 성령의 가장 비밀한 은총을 신자들에게 주신다. 그리스도께서 비밀스럽게 유아들에게까지도 부어주신다.”

이러한 비밀스러운 구원의 섭리는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신29:29,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말씀처럼 우리는 나타난 계시의 말씀대로 행할 뿐이며 모든 신비로운 것은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 유아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계시로 주어진 명령을 행하는 것이며 유아 세례를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감추어진 일을 마치 알게 되었다는 단순 추측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적 장애인의 세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적 장애인의 지적, 의지적, 영적 능력에 근거하여 그의 세례의 정당성을 논할 수 없다. 그 정당성은 이미 완성된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과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근거한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지적 능력만 아니라 믿음에서도 앞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적 장애인의 세례는 물론 구원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 칼빈은 선택(예정)과 믿음의 관계에 있어서 잘못된 견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오류를 조심해야 한다. 사람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만들고서 선택이 사람의 동의에 의하여 인준된다고 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논지에 따르면 사람의 뜻이 하나님의 계획보다 우위에 있다고 한다. 마치 성경이 우리에게는 믿을 능력만 주어지며, 믿음 그 자체는 주어지지 않는다고 가르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은혜를 그렇게 약화시키지는 않으면서도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선택이 믿음에 의존된다고 주장한다. 마치 믿음으로 확증되기까지는 선택이 의심스럽고 효력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비록 지적 장애인의 믿음과 구원의 가능성을 100% 확신할 수 없다고 해도 그의 세례를 거부할 이유는 없다. 구원의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가늠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예정론적 섭리와 신실하심에 도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구원 역사가 분명 세례를 받은 지적 장애인 위에 임할 것이다. 그가 구원을 받을지는 역시 하나님의 신비에 속한 것이다. 지적 장애인이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축복과 은총을 우리 개인의 판단과 추측으로 막는 것은 성경적이라 하기 힘들다.

IV. 교회론적 고찰

유아세례는 성례전적으로만 아니라 구원론적으로도 교회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세례는 교회 일원들이라면 다 받아야 하는 성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 한다면 분명히 구원을 받은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유아세례자와 마찬가지로 세례를 받은 지적 장애인을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의 가부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가? 최홍석은 누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는지에 관한 문제를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거듭남과 신앙, 그것들의 결과는 가시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들 자체는 육안으로 파악되지 아니한다. 즉 육신의 차원을 뛰어 넘는 신령한 영역에 속하는 일들이다. 이렇게 볼 때 인생들 가운데 그 누구도 어떤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에 속하여 있는지를 아무런 오류 없이 결정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는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개혁주의의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거듭남과 신앙 자체는 육안으로 파악되지 않는다면 지적 장애인의 구원 역시 육안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적 장애인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참된 교회에 속하였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지적 장애인이 세례를 받든지 받지 않든지, 교회를 다니든지 다니지 않든지 큰 차이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지적 장애인으로 세례를 받게 해야 하며 함께 교회를 이루어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홍석은 가시적(유형) 교회와 불가시적(무형) 교회를 구분하면서 루터와 개혁주의의 차이를 소개한다. “그런데 한 가지 덧붙여야 할 문제는 루터에게 있어서 보이는 교회(ecclesia visibilis)와 보이지 않는 교회(ecclesia invisibilis)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교회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교회의 두 국면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바빙크에 따르면 루터가 의미하는 바는 선택 받은 자들은 ‘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 밖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개혁파에서는 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 밖에서도 선택 받은 자들을 찾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고 한다. 바빙크는 주장하기를 “실제적으로 개혁파 교리는 하나님이 보통 그리스도의 유익들을 말씀과 성사의 수단을 통해 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매여 있지 않으며, 매우 드물게 제도적 교회와 상관없이 구원을 베푼다고 가르친다”고 설명한다. 즉 유아나 지적 장애인처럼 말씀과 성사의 수단과 거리가 먼 사람에게도 그리스도의 유익들을 얻을 수 있으며 제도적 교회와 상관없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최홍석도 이러한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육신의 눈으로는 파악될 수 없는 교회의 본질, 그 본질이 놓여 있는 보이지 않는 교회는 참으로 거듭난 자들로만 이루어져야하는 것이 당연하며, 또한 거기서부터 가시화되는 현상으로서의 보이는 교회가 현시(顯示)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지만, 실제 경험 속에 보이는 교회는 전적으로 그러한 자들, 곧 거듭난 자들로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오류가 없이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그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에 사람들의 내면을 투시함으로써 경험적인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신앙고백과 삶을 집중함으로써만 교회의 회원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그러면 이러한 한계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최홍석은 종말론적으로 해결한다.
 
“따라서 보이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 교회와 같이 그 경게선이 중생과 신앙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외적인 고백과 외형적인 삶에 의해 평가되기 때문에 또한 그 평가가 현실적인 경계선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여러 어려운 문제들이 불가피하게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 일은 종말에 이르러서만 그 시시비비가 밝혀지게 될 것이다. 그 점은 예수께서 가라지의 비유(마13:24-30)를 통해 교훈하신 바 있다.”

최홍석의 한계 인정과 종말론적 결론은 비가시적 교회란 현실성이 없고 이 땅에서는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권적 은총을 더욱 신뢰하고 우리와 맺으신 언약에 더욱 충실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교회가 비록 가시적 성도들로 구성되어 이 땅을 살아가지만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예정하시고 택하신 그의 백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누가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은 가시적 차원에서 인간의 판단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과 예정론적 섭리에 근거하여 유아나 지적 장애인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V. 결론

신1:39에 “또 너희가 사로잡히리라 하던 너희의 아이들과 당시에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너희의 자녀들도 그리로 들어갈 것이라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주어 산업이 되게 하리라” 말씀한다.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아이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 물론 이 말씀이 유아들은 자동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분명 선악을 분별하는 지적 능력이 없는 아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따로 있음을 알 수는 있다.
 
같은 맥락으로 어떤 방법인지 우리 지식으로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선악을 분별할 지적 능력이 없는 유아들이나 지적 장애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따로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차별 없이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다. 그 모든 자라는 범주에 결코 지적 장애인이 제외될 수는 없다. 지적장애인의 구원의 가능성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신실함에서 발견할 수 있기에 우리는 지적 장애인의 세례의 정당성을 확신할 수가 있다.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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