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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지적 장애인 세례의 신학적 정당성 1
정승원(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기사입력: 2016/05/11 [10:15]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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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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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담당하는 정승원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이 글에서는 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세례의 정당성을 신학적으로 밝히고 있다. 특히 동대학원의 조직신학 교수인 최홍석 교수의 유아세례의 정당성에 대한 논문을 바탕으로 해서 비교하여 연구하였다.

I. 서론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유아에게 세례를 거행한다. 그 근거는 하나님의 언약이다. 마치 구약 시대에서 남아에게 8일 만에 할례를 거행했던 것처럼 유아에게도 세례를 거행한다. 최홍석은 한 논문에서 유아세례의 신학적 정당성에 관해 많은 분량(43쪽)을 할애하여 개혁주의 입장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유아세례에 관한 여러 신학적 논쟁거리가 있다. 그것의 핵심은 다름 아닌 지적 능력이 없는 유아에게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어떻게 자발적 고백 없이 구원과 밀접한 세례를 베풀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비록 부모가 믿는다고 해도 부모의 믿음이 유아가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지도 논쟁거리이다. 이러한 예민한 논쟁이 오랫동안 개신교에 있어 왔던 가운데 최홍석은 위 논문에서 성경에 흐르고 있는 언약 사상을 설명하고 또한 교회사적으로 귀한 자료들을 소개하며 조직신학적으로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잘 증명하였다.

최홍석의 유아세례에 관한 옥고는 단순히 성례전(sacrament)에 관한 글이 아니다. 개혁주의 구원론의 핵심을 다루고 있고 개혁주의 교회론의 정수를 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본 논문은 최홍석의 위 논문을 근거로 지적 장애인에게도 세례를 베풀 수 있는지 그 정당성을 피력하고자 한다. 지적 장애인에 대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선입관은 그에게 구원 얻을 길이 원천적으로 막혔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례를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에게는 복음을 이해할 지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지적으로 알 수 없고 회개할 수도 고백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적 장애인은 누구인가? 사람인가? 짐승인가? 짐승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라면 그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음을 받았는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면 어떤 근거로 그에게 구원은 원천적으로 막혔다고 할 수 있는가? 구원이 원천적으로 막히지 않았다면 어떤 차원에서 그런가? 또한 세례를 줘야한다면 어떤 차원에서 줘야 하는가?

이와 같은 지적 장애인에 대한 구원 문제와 세례 문제는 장애인 선교에 있어서 매우 중차대하고 예민한 사안들이다. 지적 장애인을 자녀로 둔 많은 부모들은 자기 자녀의 구원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마음 한쪽 구석에는 지적 소통을 요구하는 통상적인 구원 과정으로 인해 더 이상 깊이 생각조차 하고 싶어 하지 않고 언급하기도 꺼린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기자녀들은 제외되기 때문에 아픈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적나라한 현실이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지적 능력을 요구하는 구원의 과정이 비성경적이지는 않지만 피상적으로 그리고 일방적으로 주장하기에는 여러문제들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 인간의 지적 혹은 의지적 능력에 달린 문제인가? 지적 이해를 전제로 하는 고백이 정말 구원의 조건인가? 등등의 문제들을 다룰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따르는 복음주의가 지향하는 문제들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러한 복음주의 구원 과정으로는 지적 장애인들의 구원의 가능성을 설명할 수 없다. 혹 신자 부모에게서 정상적으로 태어났지만 유아세례를 받지 못하고 3-6세경에 사고로 지적 장애인이 된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들 역시 구원은 원천적으로 막혔는가? 그들에게 세례를 주면 안 되는가? 혹 그들 중 장로교에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았다 해도 지적 능력이 없어져서 입교(confirmation)도 받지 못하고 예수를 주로 영접하지도 못하고 고백도 못한다면 이러한 지적 장애인들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지적 장애인의 구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은 사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속한 신비로운 사안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적 장애인의 구원을 쉽게 속단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문답도 받지 못하고 이해도 하지 못한다고 해서 지적 장애인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지적 장애인에게도 세례를 베푸는 것이 정당하다면 지적 장애인의 구원의 가능성을 인간 쪽에서 원천 봉쇄할 수 없게 된다. 마치 유아 세례가 구원의 가능성을 함축적으로 의미하듯이 지적 장애인 세례 역시 구원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우리가 사변적으로 혹은 인간적 마음으로 무조건 지적 장애인의 구원의 가능성을 추측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닐 것이다. 분명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을 그의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간절함과 요청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을 최홍석의 유아세례 정당성에 관한 논문에서 찾고자 한다. 즉 최교수가 내세우는 개혁주의 구원관은 통상적인 구원 과정과는 다르다. 지적 능력을 포함한 인간의 능력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은총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개혁주의 구원관은 지적 장애인에게도 세례의 정당성을 주장할 여지를 제공한다.

II. 인간론적 고찰

최홍석은 존 머리의 인간론을 다음과 같이 긍정적으로 소개한다.

자연 상태(natural state)에 있는 인간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총의 복음에 반응하게 하며,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인식하게 하고, 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들을 하게 할 이해력(understanding)과 성정(affection)과 의지(will)를 가지는 것은 심리학적으로(psychologically), 도덕적으로(morally), 영적으로(spiritually) 불가능하다. 그 어떠한 이해력도, 어떠한 성정도, 그 어떤 의지도 율법과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관련하여 적절할 뿐 아니라, 그것에 의해 요구되는 그러한 반응을 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복음에 반응할 이해력, 성정(affection) 그리고 의지를 가지는 것이 심리학적으로,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존 머리 그리고 최홍석의 입장이다. 그렇다면 복음에 반응하는 차원에서는 일반 사람과 지적 장애인 사이의 지적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지적 장애인에게는 복음의 내용을 이해할 능력조차 없고 혹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지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기 위해 필요한 복음에 대한 이해력이 없는 것에는 일반 사람들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적 장애인에게 복음에 대한 반응으로서 이해력, 성정 그리고 의지를 기대하는 것은 개혁주의적 전통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고 하겠다.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복음에 반응할 이해력, 성정, 그리고 의지를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것은 전적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으로 구원이 가능하다는 개혁주의적 가르침과 멀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우리가 심리적으로, 의지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복음에 반응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언약 백성으로서 복음에 대한 반응과 영적 변화는 필연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반응과 변화 역시 인간의 능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개혁주의에서 강조하는 인간의 전적 타락이란 부분적인 타락이 아니라 전-인격적 타락을 의미한다.

최홍석은 복음 전파에 있어서 인간의 지혜를 내세우려는 유혹에 대해 경고한다. 복음을 전하고 듣고 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지혜가 개입되는 것을 경고하면서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무능력한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의 은총이 중심점이다. 구원의 모든 것은 오로지 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는 결과일 뿐이다”라고 강조한다. 어쩌면 지적 장애인에게 복음 전파함에 있어서도 성격은 다르지만 인간의 지혜를 요청한다는 차원에서 비슷한 유혹이 생길 수 있다. 지적 무능력 때문에 그리고 복음의 효과와 열매가 보이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지적 장애인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려는 유혹이 생길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사실 인간의 지혜에 기준을 두고 판단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과 지혜에 기준을 두는 것은 아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자만 아니라 받는 입장에서도 인간적 지혜를 요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전파하는 자, 듣는 자 모두가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무능하기 때문이다.

개혁주의가 강조해 온 인간의 전적부패와 전적무능은 단지 영적 혹은 윤리적 차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소위 지식에 관한 인식론에도 해당된다. 최홍석은 인식론에 있어서 개혁신학은 로마 천주교 신학이나 아르미니우스 신학처럼 낙관적이지 않음을 강조하다. “개혁신학은 그 성향에 있어서 로마신학이나 아르미니안 신학과는 달리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유한성뿐 아니라 전적부패와 무능력으로 표현되는 심각한 죄성을 항상 더불어 강조해왔기 때문에 인식론에 관한 한 낙관적 인간 이해에 근간을 둔 로마교나 아르미니안파의 입장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람이 인식을 할 수 있고 지식을 습득한다고 해서 그것이 중립적이거나 때 묻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인식 혹은 지식조차 부패되고 무능력하다는 것이다. 영적 차원 혹은 신앙적 차원에서 볼 때 우리는 지적 장애인의 지적 무능력을 얕잡아 봄으로 마치 영적 축복이나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처음부터 없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지적 장애인의 세례를 거부하는 이유로 문답과 같은 지적 소통이나 습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내세워서는 아니 될 것이다.

최홍석은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관점은 극히 실용주의적 관점이며 인간 중심의 경험주의적 관점이라고 비판한다. 유아세례의 진정성 여부는 실용주의적 결과나 경험주의적 접근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계시적 명령에 근거한다고 강조한다. 즉 하나님께서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라는 계시적 명령은 인간의 실용주의적 판단이나 경험주의적 판단을 넘어서는 것이며 언약적 순종에 따라 거행되어야 할 기준인 것이다. 최홍석은 창17:1-4을 인용하면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아브라함과만 관련된 언약이 아니라 대대의 모든 후손들이 포함되었다고 말하면서 “그러므로 구약의 교회 안에 속한 자들은 참된 신앙을 고백하기에 충분히 성숙한 온전한 지성을 구비한 자들과 함께 그들에게 속한 어린이들과 유아들까지도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또한 죄는 특정적(particular)이지 않고 보편적(universal)이다. 롬3:10-12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말씀한다. 앞서 9절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말씀한다. 그리고 19절에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말씀한다. 의인은 하나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모두 다 죄 아래에 있고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말씀에 순진한 유아나 지적 장애인이 예외일 수는 없다. 죄의 보편성은 지적 장애인, 유아, 태아 할 것 없이 모두 해당된다. 지적 능력의 유무는 죄문제 해결책인 구원과 직접적 관계가 없다. 원죄(original sin)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부패한 성품을 가지게 되었고 인식론적으로도 부패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은 모든 자들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신다. 의인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행2:38-39에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이 약속은 너와 네 자녀들에게 하신 것이라” 말씀한다. 죄가 보편적인 것처럼 구원의 필요성 역시 보편적일 수밖에 없다. 유아, 지적장애인 할 것 없이 모든 자들에게 구원이 필요하다. 칼빈은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세르베투스를 향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께서 축복하시는 자는 아담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에서 자유함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 명제가 사실이라면 어린아이들이 그리스도께 축복을 받았으니(마19:15; 막10:16) 당연히 그들이 사망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칼빈은 예수께서 아이들을 축복하셨다는 사실을 근거로 유아들이 사망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칼빈은 단순히 예수님의 개인적 축복이 구원의 근거가 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이들의 구원 가능성을 인간적 기준으로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아이를 받으시고 축복하셨는데 인간인 우리가 왜 유아 세례를 거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적 장애인도 인간적 기준으로 배제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최홍석은 흥미롭게도 그의 인간론을 다룸에 있어서 뇌사 상태의 사람의 존엄성을 다음과 같이 변론한다.

성경의 교훈에 의하면 인간 영혼의 의식적 존재는 결코 소멸되거나 멸절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뇌사를 죽음의 순간으로 주장하는 의학적 판단에 의하면 뇌의 신경 세포들이 그 작용을 멈추게 되면, 동시에 정신 현상도 소멸되어 버린다는 것인데, 그와 같은 견해는 유물론적 인간 이해에 근거를 둔 것으로서 자연스럽게 의식적 현상의 종결을 죽음의 시점으로 간주하려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육체가 소멸된 이후에도 영혼의 의식적인 작용은 지속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입각해 볼 때 정신 현상의 종결을 죽음의 시점으로 보려는 시도는 결코 성경의 교훈과 일치될 수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뇌사 상태라고 해서 결코 죽은 상태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영혼의 의식적인 작용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적 장애인은 어떤 차원에서 뇌사 상태의 환자보다 의식적 작용이 더 분명하다. 사람의 의식적 상태의 유무는 겉으로 나타나는 육체적 상태로 판단할 수 없다. 심지어 최홍석은 “뇌사를 죽음의 순간으로 주장하는 의학적 판단은 비록 몸은 소멸되었다고 해도 영혼의 의식적 작용은 지속된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합치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라고 말한다. 심지어 몸은 소멸된다고 해도 영혼의 의식적 작용은 지속된다면 육체적, 외형적 상태가 일반 사람과 같지 않다고 해서 영혼의 의식적 작용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뇌사 상태의 사람과 지적 장애인을 비교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지만 적어도 사람의 의식적 활동을 겉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최홍석의 주장은 지적 장애인의 존엄성과 영혼의 가치를 인정해야 하는 학적 근거가 될 수 있다. (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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