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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교회정치구조에 대한 박형룡과 최홍석의 사상 비교연구 2
이상원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기사입력: 2016/05/04 [11:12]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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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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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담당하는 이상원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교회정치구조에 대하여 박형룡 박사와 최홍석 교수의 사상을 비교 연구하였다.

III. 교회정치구조에 대한 최홍석의 이해

a. 교회의 두 국면

최홍석에 따르면 교회에 대한 다양한 정의들은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다. 하나의 범주는 교회를 선택받은 자의 모임(위클리프), 완전한 자들의 모임(어거스틴이 본 펠라기우스와 칼빈이 본 재세례파), 결코 타락할 수 없는 자들의 모임(노바티아누스)으로 묘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의 범주는 성직제도 속에 있는 신자들의 모임에 교회의 핵심을 두며, 교회의 본질을 듣는 교회(ecclesia audiens)에서 보다 가르치는 교회(ecclesia docens)에서 더 추구하면서 불신자들이나 외식자들도 부름받은 자들의 모임(멜랑히톤, 뢰에, 클리포드) 혹은 세례받은 자들의 모임(뮌히메이어, 델리취, 빌마르)에 소속된 참된 회원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최홍석은 이 두 가지 범주가 모두 결함들을 내포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첫번째 범주에서는 교회가 하나의 관념에 머물고 실재 속에는 완전히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택이 하나님의 의중이나 하나님의 결정 속에만 있고 아직 어떤 이를 지상에 있는 교회의 회원으로 만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또한 완성된 자들의 모임으로도, 타락하지 않은 자들의 모임으로도 정의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는 완성되거나 완전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범주에서는 외적인 회원권, 외적 소명과 세례 등을 참된 회원으로 규정하는 문제점을 노출한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은 참된 신앙의 증거가 아니다. 많은 사람이 부름을 받았으나 다 선택된 것이 아니며, 많은 사람이 세례는 받았으나 다 믿는 것이 아니며, 이스라엘 출신이라고 다 이스라엘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범주에 속한 자들에 의하면 교회가 실재화 될 수 없고, 두 번째 범주에 속한 자들은 참된 교회에 대하여 오해한다.

최홍석은 교회를 “믿는 자들의 모임”으로 정의할 때 이와 같은 두 범주의 오류를 극복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결속된 사람들”이 교회다. “믿는 자들의 모임”의 구성원들의 가장 큰 부분은 에덴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미 수 천 수만의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갔고 그들의 숫자는 날마다 순간마다 늘어나고 있는 바, 이는 천국의 천상적인 면이다. 이와 동시에 현재 특정한 순간 지상에 사는 믿는 자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가 있는 바, 이는 천국의 지상적인 면이다. 이 이외에도 현재 아직은 믿지 않지만 장차 확실히 믿을 자들, 혹은 현재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장차 태어나서 확실히 믿을 많은 사람들도 있다. 과거에 믿은 자들, 현재 믿고 있는 지상의 성도들, 장차 믿을 자들은 모두 하나의 모임, 하나의 에클레시아다.
 
이 시점에서 최홍석은 전통적인 교회론이 견지해 온 분류방식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면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최홍석은 교회를 천상교회와 지상교회, 승리적 교회와 전투적 교회로 구분하는 전통적인 분류방식이 하나의 교회가 마치 별개의 서로 다른 두 교회가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되도록 만들 우려가 있다고 말하면서 이런 표현보다는 하나의 교회가 지닌 두 면 곧 천상적인 면과 지상적인 면으로 부를 것을 제안한다.

루터와 칼빈이 무형교회와 유형교회의 구분을 말할 때 별개의 두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본 최홍석은 이 구분 보다 하나의 교회의 불가시적인면과 가시적인 면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은 표현이라고 말한다. 최홍석은 무형적이라는 말 보다는 불가시적이라는 말이 더 나은 표현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교회를 무형적이라고 할 때는 교회의 천상적인 면,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교회, 사람이 능히 파악할 수 없는 모든 나라, 모든 장소에 산재해 있는 교회, 박해 시 숨은 교회 등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개혁신학이 교회를 무형적이라고 할 때는 교회의 본질상 신앙의 문제와 관련된 의미들 곧, 마음속의 내적인 신앙, 중생, 참된 회심, 숨겨진 그리스도와의 교제 등을 그 내용으로 하는데, 이와 같은 영적인 행위들은 육신의 눈으로는 파악될 수 없는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믿는 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신앙의 본질도 사람의 눈으로 식별되지 않는다. 그런데 무형적인 면이 무형적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무형적인 면은 유형적인 형태를 취하게 된다.

왜냐하면 교회는 단순히 영혼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영육적 존재로서의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필연적으로 외형적인 조직체에서 유형적인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앙고백과 행위를 통해, 말씀선포와 성례 집행을 통해, 외형적인 조직과 교회 정치에서 무형적인 면은 유형화된다.” 그러나 무형적인 면은 유형적인 면과 일치하지만은 않는데 그 이유는 첫째로, 무형적인 국면에 속하는 이들이라고 하여 예외 없이 모두 유형적인 조직체의 회원이 되는 것이 아니며(임종 시에 전도를 받고 회개한 십자가상의 강도의 임종전의 기간), 둘째로, 유형적인 조직에서 잠시 제외되지만 무형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교회에 속해 있는 경우가 있으며(파문당한 루터), 셋째로, 유형적인 조직체 안에서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지만 참된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 있기(외식자들, 거짓 신자들) 때문이다.

지상교회의 유형적인 면은 유기체적인 면과 제도적인 면을 지닌다. 유기체적인 면은 성령으로 연합된 신자들의 모임(coetus fidelium)이고, 제도적인 면은 믿는 자들을 양육시키기 위한 신자들의 어머니(mater fidelium)다. 전자는 영적인 능력을 소유한 교회로서 각종 은사와 재능을 통해 봉사를 목적으로 작용하며, 후자는 제도적인 형식으로 존재하며 하나님의 정하신 직임과 수단들을 통해 질서를 목적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이 두 면들은 동등과 종속의 관계에 있다. 유기체적인 면은 목적이고 제도적인 면은 수단이다. 수단은 목적에 종속되어야 하므로 유기체적인 면과 제도적인 면은 종속관계에 있다. 유기체적인 면은 제도적인 면에 우선한다(엡4:11-12). 그러나 이 두 국면은 교회의 필수적인 국면들로서 동등하게 중요하다.

유기체적인 면은 교회의 본질과 더 깊이 관련된다. 최홍석은 유기체적인 면이 보여 주는 교회의 본질을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는 이 몸의 머리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와의 교통에 의해 결정되며, 이 교통은 신앙을 통한 참여에 의하여 가능해진다. 둘째로, 교회는 은총에 의하여 특징지어진다. 동시에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집합적 순종을 특징으로 한다. 셋째로,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교통이 전제된 상태에서 지체 상호 간의 교제가 있어야 한다. 넷째로, 교회는 서로에 대하여 배타적인 성향을 지니는 혈연, 지연, 관심, 목적 등과 같은 인간적인 사귐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들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특별히 죄인, 고독한 자들, 소외된 자들, 자신의 의사표시가 불가능한 미미한 존재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죄, 구원, 종말, 삶과 죽음 등 영적인 차원의 문제들을 관심의 영역에 두어야 한다. 다섯째로, 교회는 배타성을 뛰어넘는 포괄성과 공동체적 정체성 간의 긴장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전자 없는 후자는 편협하고 계율주의적인 성격의 분파적 교회를 산출한 가능성이 있고, 후자없는 전자는 목적이 불분명한 비활성적인 국가교회 내지 혼합주의적인 집단양상을 드러낼 위험이 있다.

마지막으로 검토가 필요한 부분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다. 질문의 핵심은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최홍석의 관점은 “그리스도의 왕국-회중-세상”이라는 삼각형의 구도 안에서 표현되고 있다. (1)삼각형의 맨 위쪽 꼭지점에는 그리스도의 왕국 곧 하나님의 나라가 위치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되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으로서 전 우주적이요 피조계의 전포괄적인 구속 운동이다. 하나님의 보좌에 계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회중과 세상의 주님이시며,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그의 통치권을 회중과 세상 가운데 행사하신다. (2)회중 곧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고 부름 받은 백성이요,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운동으로서 제한성을 가진다. 이와 같은 제한성 때문에 회중은 하나님 나라와 등치된다고 말할 수 없으며 또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없다. (3)무엇보다 그리스도는 회중의 왕이시다. 승귀하신 그리스도와 그의 회중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존재한다. 이 특별한 관계는 회중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 회중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중단시키고자 하는 어두움의 나라로부터 건져냄을 받았으나(골1:13) 어두움의 나라의 압력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압력을 인식하지 못하는 세상과 구별되며, 이 압력으로 인하여 찾아오는 세상과의 긴장과 불안정과 모호함을 설명한다. 회중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며 세상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다. 회중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세상과 관련되어 있다. 회중은 기원과 목적에 있어서 하나님과 관련되고 임무에 있어서 세상과 관련된다. (4)그리스도는 세상의 주이시다.

그의 통치는 신자들이나 회중에게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에 미친다. 그의 왕국의 능력들은 세상의 역사 가운데서도 활동하며, 여기서도 여전히 드러난다. 물론 그 현시가 결코 완전 명료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드러나는 것이 동시에 항상 악이 내재함으로 말미암아 암매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중은 어디서 그리스도의 나라의 자유케 하시는 능력이 드러나는 지를 살피고 추적해야만 한다.

b. 주님과 회중을 섬기는 교회의 직분들

최홍석에 의하면 교회의 유형화된 국면 곧, 가시적인 국면은 다시 두 국면으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유기체로서의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조직체로서의 교회다.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성령으로 연합된 신자들의 단체(coetus fidelium)이고, 조직체로서의 교회는 신자들을 양육시키기 위한 구원의 수단으로서 신자들의 어머니(mater fidelium)다. 전자는 영적인 능력을 소유한 교회요, 각종 은사와 재능을 통해 봉사(apparitio)를 목적으로 하며, 후자는 제도적 형식으로 존재하며 하나님의 정하신 직임과 수단들을 통하여 역할을 하는 데 질서를 목적으로 한다. 이처럼 지상에서의 신자들의 모임은 은사적(charismatisch)일 뿐 아니라 제도적(institutair)이요, 유기체일 뿐 아니라 제도이며, 목적인 동시에 수단이다. 최홍석은 제도로서의 교회의 핵심인 교회 직분들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 칼빈은 교회가 신자의 어머니임을 강조했다. 이 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1536년의 기독교강요 초판에서는 불가견적 교회를 강조하던 칼빈은 1539년의 제2판에서는 불가견적 교회와 더불어 가견적 교회를 강조하다가 1543년의 개정판에서는 가견적인 교회제도를 사중 직책(목사, 교사, 장로, 집사)으로 구현하였다. 이와 같은 칼빈의 태도는 그가 직분의 합법성을 강조했음을 의미한다. (2) 회중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엡1:20-23)께서는 자신의 천상사역을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행하시는데, 이때 그가 세우신 직분, 곧 인간의 봉사를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마16:19-20). (3) 교회는 본질상 무형적이지만 그 무형의 본질이 신앙고백, 성도의 교제, 말씀의 선포, 성례의 집행, 제도 및 조직 등에서 필연적으로 유형화될 수밖에 없다. (4) 교회의 삼대 표지인 말씀의 참된 전파, 성례의 정당한 집행, 권징의 신실한 시행은 모두 일정한 직분자의 봉사를 통해서 가능한 일들이다. (5) 언약의 관점에서 볼 때도 직분의 필요성이 명백해진다. 언약에 있어서 인간 편에서의 당사자는 연대성을 지니고 있는데 바로 이 점이 직분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직분은 하나님과 백성들을 연결시켜 주는 연결점이다. (6) 예수님이 친히 직분을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성경은 직분의 존재와 기능과 목적까지도 말한다(막3:12; 행6장; 고전12:28; 딤전3:1; 딛1:5 등).

직분을 세우는 목적은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엡4:12)이다. 신약성경이 기록될 당시 직분을 지칭하는 단어들로서 공적인 직책(레이투르기아), 심판관(디카스테리온), 통치자(아르케) 등이 있었지만 신약성경에서 직무나 기능 혹은 직분에 관해 언급할 때 결코 위와 같은 세속적인 직분개념 곧 군림의 사상을 내포하는 희랍어 단어들을 사용하지 아니하였고, 항상 디아코니아라는 단어를 기용하였다. 디아코니아의 일차적인 의미는 식탁에서의 섬김이다. 그런데 디아코니아로 표현된 직분 혹은 직무들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항상 섬김이라는 근본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예컨대 마르다가 준비하는 일이 많다고 했을 때(눅10:40),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가 그 매일의 구제에서 빠진다고 했을 때(행6:1) 디아코니아가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말씀을 선포하는 일(행6:24; 20:24)이나 복음 전도자의 화목케 하는 일(고후5:18)도 모두 디아코니아로 표현되었다.

디아코니아 곧 섬김의 개념의 깊은 뿌리는 기독론 자체에 놓여 있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섬김의 생애였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막10:45; 마20:28).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으로 표상된 메시아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사61:1-2; 눅4:16-21)은 예수님의 종 되심과 그의 섬김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임을 시사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섬기는 자로서 제자들 중에 있음을 최후의 만찬에서 분명히 하셨다(눅22:27). 예수님의 섬김은 십자가의 대속의 죽으심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바울은 기독론을 자기비하의 측면에서 다루었는데, 누가복음이 말하는 섬기는 자(눅22:27)를 종 곧 둘로스라는 용어로 치환했으나 의미상 차이는 없다. 이사야서의 여호와의 종은 삼중 직무 곧, 선지자(사42:1ff.), 제사장(사49:1-9 등), 왕(사42:1-7)의 직분을 담당한다.

그리스도의 섬김은 회중의 섬김과 직결된다. 모든 성도들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막9:35, 48; 마18:3-4, 25:25-28; 막10:42-45; 요13:12-17). 모든 성도들은 각양 은사들을 가지고 서로 섬기기 위하여 부름받았다(벧전4:10). 직분이라는 단어 자체가 디아코니아였다(롬11:13; 고전12:4-6; 딤후4:5). 직분자에게 주어진 권세도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된 대리적인 것으로서(마20:25, 26; 23:8, 10; 고후10:4, 5; 벧전5:8). 위임하신 분의 뜻과 의지에 따라서 수행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미 봉사적 성격을 지닌다.

직분은 광의와 협의로 이해될 수 있다. 모든 신자들은 광의의 직분에 속하며, 특별한 직분들은 협의의 직분에 속한다. 광의의 직분은 항상 협의의 직분과 더불어 또한 협의의 직분은 광의의 직분과 더불어 존재한다. 특별한 직분은 결코 그 스스로 교회를 대표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 스스로는 교회 위에 서 있는 위계적 성격의 한 성직자단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협의의 특별한 직분들은 그 직분자들을 세우는 믿는 자들, 곧 회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협의의 직분과 광의의 직분은 항상 공존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병존적이며, 특별한 직분자들은 항상 믿는 자들, 곧 회중으로부터 나온다는 의미에서 광의의 직분에 의존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일차적으로 직분의 권세를 회중에게 주셨고, 이차적으로 특별한 직분자들에게 추가적으로 주셨다. 회중에게 주어진 광의의 직분이 하는 일은 특별한 직분자들을 판단하고 그 직분을 평가하여 바르게 세우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주께서는 특별한 직분자들을 세우시고 이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직무를 온전히 수행할 수 있도록 추가적인 권세를 더하여 주신다. 광의의 직분과 특별한 직분 아이에는 동등과 구별이라는 질서가 견지되어야 한다.

회중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자유와 그리스도와 맺은 연합은 특별한 직분들에 의하여 저지되어서는 안 된다. 역으로 회중들이 가진 은사들이 특별한 직분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서도 안 된다. 양자의 관계는 상호 배타적이라기 보다는 상보적이다.

특별한 직분들에는 사도, 선지자, 복음전도자와 같은 비상직원들과 장로, 목사, 집사(박형룡), 혹은 장로, 목사, 교사, 집사(벌코프)가 포함된 통상직원들이 있다. 비상직원들 혹은 특별직분들은 특별계시가 종결되기 이전, 특정한 시기에만 존재하고 끝이 났다. 그러나 주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지상에 계속 여러 직분들 곧 통상직원들인 장로, 목사, 집사를 남겨 두셨다. 에베소서4장11절에서 목사와 교사가 하나의 정관사 아래 소속되어 있다는 점은 목사와 교사가 한 직분의 두 가지 기능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통상직원은 장로, 목사, 집사로 구성된다고 볼 수 있다. 이 직분들의 기원은 그리스도의 삼중직이다. 그리스도의 선지직으로부터 목사의 직무가, 제사장직으로부터 집사의 직무가, 왕직으로부터 장로의 직무가 유래했다. 이 직무들은 어떤 직분은 더 높고 어떤 직분은 더 낮다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손상시키는 일이다. 교회 안에 유일한 주님과 명령자는 그리스도이시다. 직분을 가진 자들은 그리스도의 종들일 뿐이다. 장로의 임무는 집사들과 더불어 교회 위원회를 구성하며, 그들에게 할당된 성도들의 가정을 특별히 성찬을 앞둔 시기에 방문하는 일이다. 장로는 성도들을 세밀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형편을 따라 권면과 가르침과 위로로 섬겨야 한다. 이 외에도 1581년 이후 최근까지의 화란 개혁파 내 교회법에 의거하여 장로는 목사와 더불어 회중을 치리하며, 동역하는 직분자들인 목사, 집사들을 살피며, 심방을 시행한다. 집사는 일반적인 자선사역을 담당한다. 집사의 직무는 회중 가운데서 빈궁한 자들을 위해 헌금을 모으고 관리하며 분배하는 일이다.

c. 개혁파 혹은 장로파 제도의 근본원리: 행정은 민주적이나 근본질서는 신본주의 최홍석은 개혁자 혹은 장로파 제도의 근본원리를 네 가지 항목으로 정리하여 제시한다.

(1)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요 모든 권위의 원천이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교회라는 유기적인 몸의 머리이며, 둘째로, 권세를 가지고 통치하시는 왕이라는 의미의 원수격으로서의 머리다. 교회가 민주주의냐, 신본주의냐 하는 질문은 두 차원을 구별하지 못하는 어색한 질문이다. 최홍석은 교회의 행정이 민주적일 수는 있어도 교회의 근본질서를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주의’라는 용어 그 자체가 지상의 원리라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주의’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교회가 신본주의라고 하면 맞는 말이다. 결국 교회는 행정에 있어서는 민주적일 수 있지만 교회의 근본 질서는 신본주의다.

교회의 근본 질서가 신본주의라는 말은 교회의 존재의 원리가 하나님께 있다는 뜻인 동시에 교회 권세의 원천은 그리스도임을 뜻한다. 교회의 직원은 비록 회중을 통하여 그 직책을 맡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권위는 사람들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받는다. 교회의 직원들이 회중의 대표이기는 하나 그 권세를 회중으로부터 받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직원은 사람의 종이 아니라 회중을 위한 그리스도의 종이다.

(2) 그리스도는 말씀을 수단으로 하여 권위를 행사하신다. 이 원리는 로마교의 ‘ex cathedra’ 사상을 거부한다.

(3)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권세를 주신다. 권세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교회 전체에 주어졌는데, 일반 회중과 교회 직분자들에게 다같이 위임되었다. 그리고 직분자들은 의무수행에 필요한 추가적 권세를 받는다.

(4) 교회의 권세는 기본적으로 지역 교회의 치리회에 있다. 교회의 권세가 일차적으로 총회에 있지 않다. 총회로부터 나와서 지역 교회의 치리회에 권세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역교회의 당회 → 노회 → 대회 → 총회의 방향을 나아간다. 지역교회는 공통적인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다른 교회들과 연합하며, 보다 큰 조직체를 형성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IV. 나가는 말

지금까지 논의한 박형룡과 최홍석의 교회정치구조에 대한 이해를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박형룡은 교회를 두 유형으로 분류한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분류방식을 견지하는 가운데 교회의 집단적 특성을 강조한다. 물론 이 집단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으로서 유기체적인 성격을 지니며, 성령과 계명의 말씀의 지도 아래 있어야 하는 신적인 공동체임이 전제되어 있다. 박형룡은 교회를 두 유형으로 구분하는 것 곧, 천상교회와 지상교회, 승리적 교회와 전투적교회, 비가시적인 교회와 가시적인 교회, 무형교회와 유형교회,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제도로서의 교회로 교회를 구분하는 것이 하나의 교회의 두 단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논평을 가하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도 이 구분법을 계속하여 사용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최홍석은 전통적으로 교회를 두 유형으로 구분하는 방식이 두 개의 서로 다른 실체를 가리키는 뜻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이해하면서도 이 구분법이 교회를 두 개의 서로 다른 실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소지가 있다는 점에 치중하여 하나의 교회의 두 국면으로 말할 것을 강력하게 제안한다. 최홍석의 새로운 제안에 따라서 아예 교회는 통전적으로 하나임을 전제하면서 두 국면을 말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인가, 아니면 박형룡처럼 두 유형의 구분법을 견지하면서 교회는 통전적으로 하나라는 점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방법이 더 나은 방법인가에 대해서는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교회의 집단적 성격을 강조하는 박형룡의 관점과 교회의 통전성을 강조하는 최홍석의 관점은 모두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개인주의에 함몰되어서는 안 되며, 또한 교회생활이 개교회주의에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비판적 멧세지를 현실의 기독교인들과 현실의 교회들을 향하여 던져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 두 관점은 모두 신앙을 고백하는 전 세계의 모든 교회들을 하나의 몸으로 보는 철저한 연대성의 관점을 가질 것을 요구하며, 한 몸의 지체인 전 세계의 교회들의 영적이고 물적인 안녕에 대하여 책임의식을 가질 것을 요청한다.

둘째로, 교회 직분자들에 대하여 박형룡과 최홍석은 모두 직분자들은 행정상으로는 회중에 의하여 민주적으로 선출되지만 그리스도에 의하여 직분을 위임받은 자들로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회중을 섬기는 자들임을 분명히 한다. 이 명제가 보여주는 두 가지 특징 곧 직분은 섬김이 본질이라는 점과 직분자는 일차적으로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은 사역을 수행하는 자들이라는 점은 교회의 직분자들이 사역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사역을 마무리하는 순간까지 항상 되짚어 보아야 할 보석과 같은 규범적 원리다. 최홍석이 직분의 본질은 섬김 곧 디아코이나에 있음을 직분에 관련된 성경본문들에 대한 충실한 주석을 통하여 선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은 매우 큰 의의가 있다. 교회의 직분이라 할지라도 일단 직분에는 권력이 뒤따르고 권력은 극히 주의하지 않으면 계급화와 관료화로 나아가며 교회 공동체를 교역자의 독재에 시달리게 하며 영적인 생명을 죽일 수 있다. 반면에 직분자가 지나치게 회중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태도로 사역에 임해도 문제가 된다. 회중들도 그 마음이 부패하고 완전히 성화되지 않는 자들이므로 직분자들이 회중들을 섬긴다는 명목으로 이와 같은 요구에 부응하기 시작하면 교회가 오염될 수 있다. 교역자들은 회중을 섬기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명령과 뜻에 따라서 섬겨야 한다.

셋째로, 박형룡은 성경적인 교회정치원리가 신명적인 대의적 장로주의임을 확신 있게 말한다. ‘신명적’이라는 말은 박형룡이 직접 사용한 말은 아니지만 교회는 성령의 지로 하에 철저하게 말씀 혹은 율법이 지시하는 대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박형룡의 거듭된 언명은 ‘신명적’이라는 형용사로 요약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홍석은 교회정치구조에 대하여 “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부담을 느끼고 교회 행정은 민주적일 수 있다는 약화된 표현을 사용한다. 최홍석은 교회의 근본질서는 신본주의라고 분명하게 단언한다. 강약의 차이는 있으나 두 신학자들이 교회 정치구조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구성되어야 하며, 구조에 회중의 의사가 민주적으로 반영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큰 틀에서 입장을 같이 한다. 지역교회의 정치구조는 하나님의 말씀의 터전 위에서 회중의 의사가 민주적으로 반영될 수 있어야 하며, 교단의 정치구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터전 위에서 개교회의 의사가 민주적으로 반영될 수 있어야 한다. 개교회의 정치구조가 신자 개인의 자유와 양심을 구속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며, 교단의 정치구조는 지역교회를 섬기고 돕는 데 있어야 하며 개교회의 자유와 양심을 속박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