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남긴 선진들(6) / 조만식 장로편

송삼용 | 기사입력 2008/12/03 [18:10]

빛을 남긴 선진들(6) / 조만식 장로편

송삼용 | 입력 : 2008/12/03 [18:10]

5. 위대한 스승들을 만나다

 

대원(大願)을 가진다면 사불범정(邪不犯正)이오, 해 보겠다는 것은 반드시 성공을

얻을 것이다. - 고당 조만식<1935.8.27-30. 금강산 장안사 강연>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인생의 향방이 하늘과 땅만큼 달라질 수 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가령, 헬렌 켈러는 농맹아(聾盲啞)의 3중고(三重苦)에 시달리며 절망 가운데 있었다. 하지만 헌신적이고 친절한 스승 설리번을 만남으로써 마침내 세계의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위대한 승리자가 되었다. 고당에게도 그의 인격과 사상 및 신앙이 형성되는데 지대하게 영향을 받은 여러 스승들이 있었다.

고당의 아버지 외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았던 인물은 숭실 중학교 교장 배위량 박사였다. 그는 주일이 되면 전교생이 한사람도 빠짐없이 의무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도록 했다. 주일 예배 후에는 교회로부터 도장을 받아와서 제출하게 할 정도로 규율을 엄하게 정했다. 주일에는 운동을 하지 못하게 했고, 물건을 사고 파는 일까지도 금했다. 그렇다고 배 박사가 보수 신앙만 고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철저한 보수 신앙을 견지하면서도 현실 속에서 신앙을 실천하는 복음주의자였다.

배 박사는 학생들에게 주일 외에는 촌각을 다투면서 공부하도록 지도했다. 그렇게 공부하는 길만이 조선의 미래를 짊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교육을 통해서 조선 사람을 일깨우는데 최선을 대했다. 특히 조선 사람들이 술을 지나치게 좋아해서 폐단이 많은 것을 보고 금주령을 내렸다. 술이 신앙 생활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는 철저하게 금주 교육을 시켰던 것이다. 심지어 수업 중에 술 주(酒)라고 써야할 대목이 나오면 그 글자를 일부러 피하여 ○표로서 술 ‘주’자를 쓸 정도였다.

배 박사의 그런 엄격한 지도에 따라 고당은 숭실 중학교 시절에 비로소 술과 세상을 완전히 끊게 되었다. 고당은 보수 신앙을 철저하게 가르쳐 온 배 박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36년 4월 「삼천리」志에 기고한 <생산과 소비의 우리의 각오>라는 글에서 그는 배 박사의 말을 인용하며 조국의 현실을 어떻게 타개해야할지 다음과 같이 밝힌바 있다.

“일찍이 배 박사는 말하되 내가 조선에서 전도할 새조선인은 내세 영혼의 천당 구원을 위함보다는 현재 사회적 구원 즉 실제 생활에서 구원 얻으려함이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과연 백성을 위하여 눈물의 전도자, 열(熱)의 전도자, 사랑의 사역자, 정(情)의 설교가가 대량 산출되어야함이 필요한 사실입니다.”

숭실에서 배 박사가 지향한 교육 이념과 철학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철저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지행(知行)과 언행(言行) 일치의 생활이었다. 그는 진정한 신앙이란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행하는 것과 일치가 되어야 한다는 확신으로 교육에 임했다. 참된 교육이란 신앙을 실천하는 사람을 양성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또 하나는 박애주의 사상이었다. 이는 인류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인종, 계급, 국가 등을 초월하여 널리 사랑해야 한다는 주의이다. 배 박사는 숭실의 청년들에게 예수님의 정신이요, 성경의 사상이 바탕이 된 박애주의 정신을 심어 주는데 주력했다.

이런 철학에 입각한 숭실 교육을 통해서 많은 학생들이 신앙과 삶의 일치를 배웠다. 민족과 동포를 사랑하는 애국심도 배양했다. 따라서 숭실인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앙은 자연스럽게 곧 민족주의로 이어졌다. 그 영향으로 인하여 숭실 출신들 가운데서 일제 치하의 애국 지사들이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고당 역시 만학도였지만 숭실에서 배 박사로부터 참된 신앙 인격과 민족 정신을 배웠다.

숭실에서 고당이 영향을 받았던 또 한사람은 박자중 선생을 들 수 있다. 박선생이 1906년 56세의 일기로 돌아갔으니 고당은 그로부터 한 1년여 동안 배웠다. 1906년 6월 21일자 <그리스도 신문>은 박선생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지추가 청한하며, 행위가 단아하고 학문이 깊고 지식이 넓어 일찍이 세상에서도 꽃다운 이름은 얻은 분이었다.”

그는 교회에서 장로 추천까지 받았지만 취임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장례식 때 숭실학교와 온 교우들이 수천여명이 모여 애도했으니 그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고당 역시 박선생으로부터 인품과 학문 그리고 신앙 등의 영향을 받았다.

다음으로, 학교 밖에서 활동하던 민족 선구자들로부터 받은 영향도 지대했다. 특히 도산 안창호 선생이나 남강 이승훈 선생으로부터 크게 감화를 받았다. 남강은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하자마자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했고, 국채 보상운동을 전개하면서 국권 회복 운동에 매진하고 있었다. 또한 평양에 대성학원과 태극서관을 세워 교육에 전력하기도 했다. 그 무렵 남강 이승훈 선생은 본래 상인으로써 사업을 통해서 돈을 벌었다. 양반이 되고 싶은 소망을 갖고 있던 중에 평양에서 다음과 같은 도산의 연설을 듣게 되었다.

“곧 민족의 한사람이거나 두사람이 양반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전체가 잘 살수 있는 만민이 모두 양반이 되는 도리를 강구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에 큰 감동을 받은 남강은 도산 선생과 뜻을 같이 하기로 결심하고 신식 교육을 위해서 서당을 개편하여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설립했다. 그후 곧바로 교육을 통해서 실력을 양성하는 길만이 국권을 회복하는 길임을 깨닫고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다. 이에 고당을 비롯한 숭실의 젊은이들이 도산이나 남강과 같은 선구자들이 내세운 민족 교육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되었다.

숭실 밖의 인물로써 서적으로 통해서 고당이 영향을 받았던 인물은 간디였다. 고당은 숭실학교 졸업 후 일본 유학 시절 ‘간디전’을 읽고 그의 무저항주의와 비폭력주의에 철저히 공명하였다. 그후부터 고당은 간디 정신을 따라 매사에 절제의 삶을 살려고 애를 썼다. 불타오르는 조국애 역시 간디로부터 받은 영향이 컸다. 심지어 복장이나 삶의 스타일까지 간디풍을 즐겨할 정도였다. 그런 정신과 삶의 모습들로 인하여 나중에는 ‘조선의 간디’로 추앙받게 되었다.

고당이 청년기 시절부터 조국의 미래를 생각하게 된 것은 훌륭한 스승들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신앙과 삶의 일치로 일생 동안 그리스도인의 모범을 보여 주었던 것도 영적 지도자로부터 받은 영향이었다. 평생 청교도적인 삶을 실천하면서 근면, 검소하게 살았던 것도 스승들로부터 받은 영향 때문이었다.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애국 운동에 앞장섰던 것이나, 죽음 앞에서도 흔들림 없는 지조를 지켰던 것 등 삶 전체의 분야에서 스승들의 영향이 닿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그런 귀한 스승들의 영향이 없었다면 오늘의 고당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당은 일생 동안 소중한 스승들과의 만남의 복을 누렸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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