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남긴 선진들(4) / 조만식 장로편

송삼용 | 기사입력 2008/12/03 [18:06]

빛을 남긴 선진들(4) / 조만식 장로편

송삼용 | 입력 : 2008/12/03 [18:06]

3.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다

 

기독 청년들아! 최고의 이상을 가져라. 하나님께 기도하여라. 영원하여라. 그리고 활동 할 것이다. 오직 거기에서 의기와 위력을 얻을 것이다.

- 고당 조만식<1937.1. 삼천리>

고당의 생애에서 민족적인 활동은 대부분 기독교 신앙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온 몸을 바쳐온 교육자로서의 생애, 실천적인 삶으로 전개한 물산장려 운동, 평양 산정현 교회의 장로로서 주기철 목사와 함께 주도했던 신사 참배 반대 운동, 그리고 창씨 개명 거부 운동 등은 모두 투철한 신앙심의 발로였다. 특히 해방 후에 북한의 지도자로서 활동하다가 끝까지 월남을 거부하면서 홀로 민족의 십자가를 짊어진 것도 신앙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고당이 기독교를 처음 받아들이기까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있었다. 칼빈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리는 한줄기의 빗방울조차도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면 내릴 수 없다. 심지어 욥기서에는 하나님께서 날과 달과 분과 초까지 다스리신다고 했다(욥7:18, 14:5). 하나님은 만물과 만사를 주관하신다. 역사의 주인이시다.

고당이 기독교를 처음 접하기까지 모든 여건이 조성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다른 지역보다 강서 지역에 복음이 먼저 전파된 것이나, 갑자기 몰아닥친 난리의 상황 등은 고당에게 복음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자연스런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가정에서 겪었던 시련들과 남달리 겪었던 마음의 상처 등도 기독교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용이한 조건이 되었다.

고당이 가정 생활을 시작한 것은 14살 때였다. 두 살 위의 박씨와 결혼하여 어른이 된 것이다. 부모가 시킨대로 조혼(早婚)하여 가정을 꾸렸지만 첫아들 칠숭이는 정신 미발육의 치아(痴兒)였다. 고당은 아들로 인하여 아버지가 된 기쁨보다는 고통스런 짐을 지게 되었다. 거기에다 결혼 생활 7년이 지난 후 박씨 부인과의 사별은 정신적으로 큰 상처가 되었다. 그때 고당의 나이 20살이었으니 청년의 나이에 감당하기에 힘든 시련이었다. 26살에는 바보 아들 칠숭이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그에게 시련이 연속되었다.

고당은 첫부인과 사별한 후 곧바로 이의식 여사와 결혼해서 가정의 행복을 되찾긴 했지만(선부, 연명, 선희, 연창을 차례로 둠), 마음 한 구석에는 늘 무거운 짐이 있었다. 그러다가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고당은 상업을 그만두고 대동강 중류 지방의 베기섬(碧島只里) 마을로 피난을 떠났다. 그 무렵 고당의 나이 22살 때 피난 생활 중에 친구로부터 처음으로 전도를 받았다.

고당에게 처음으로 기독교를 소개해 준 사람은 한정교였다. 한정교는 서당에서 함께 동무한 글동무요, 평양 종로에서 동업으로 지물상을 경영한 막역한 사이였다. 후일에 그는 장로로서 초대 교회를 이끈 선구자가 되었다. 한정교가 소개해 준 기독교는 고당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인간에게 주어진 구원의 축복, 천국의 소망, 그리고 시련 중에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 등 모두 생소한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소한 이야기들은 모두 고당에게 관심을 갖기에 충분한 내용들이었다.

고당이 그런 내용의 전도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겪었던 어두운 가정 분위기나 개인적인 시련 등이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의식 여사와의 결혼 생활은 흡족하긴 했지만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새어머니 밑에서 자라고 있던 바보 아들의 미래를 생각할 때도 불안함과 초초함도 그치지 않았다. 거기에다 난리가 일어나 사업을 그만두고 피난길에 있었으니 복음의 초대에 쉽게 마음 문을 열 수 있었다. 인간의 절망이 하나님께는 기회가 된 것이다. 때때로 사람의 실패가 하나님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고당의 상황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고당이 기독교의 분위기를 접했던 때는 훨씬 더 이전의 일이었다. 이에 대해서 고당 자신이 신동아(1934.6)에서 「서양인 처음 보던 인상」이란 주제의 글에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서양인을 처음으로 보기는 열 한두 살 되었을 때 즉 임진년(1892)인가 계사년(1893)인가고 생각되며, 보았던 곳은 대동문 안 술막골 한석진 목사 댁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목사의 맏자제 고 민제(民濟) 兒名 갑손이는 나의 글동무였습니다. 이 집에 서양인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늘 놀 겸 구경 겸 자주 가서 서양인을 보았습니다. 그때는 서양인이 아니고 ‘양귀자’였지요. 이 ‘양귀자’는 마포삼열 목사였는지 혹 다른 목사였는지 그때는 물론이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시커먼 옷, 커다란 눈, 높은 코, 참말로 모든 것이 무섭다기보다는 놀랍고 이상스러운 눈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가는 때마다 이 양귀자 냄새나는 책을 줍디다”

그 무렵 한석진과 함께 활동했던 선교사들은 마포삼열(馬布三悅, S.A. Moffet)과 이길함(李吉咸, Graham Lee)이었다. 따라서 고당은 어릴 때부터 한석진의 아들 민제와 함께 집에 드나들면서 여러 선교사들을 만나 기독교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특히 당시 전도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마태복음, 누가복음 등의 쪽복음 성경이나 <인가귀도>, <덕혜입문> 등의 전도 문서를 접했던 것이다.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선교사들과 성경을 접했던 경험은 한정교의 전도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는 견인차 역할을 해 주었다.

한 사람의 지도자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랜 기간 동안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을 통해서 다듬어지고 훈련되어진 결과로 한 사람의 지도자가 세워진다. 기독교의 지도자 바울이 있기까지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그를 다듬어 훈련시키셨다. 바리새인으로써 구약 성경에 능통했던 것, 가말리엘 문하에서 학문을 갈고 닦은 것, 그리고 율법주의자로써 갈고 닦았던 특별한 열심 등은 모두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 기간이었다.

고당의 생애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도자로 사용하시기 위해서 모든 여건을 조성하시고, 철저하게 준비시키셨다. 고당으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분위기와 여건을 세심하게 준비하신 것이다. 세상에 모든 일이 우연하게 되는 일은 없다. 고당을 조선의 지도자로 택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부르시기 위해 모든 것들을 차근 차근 준비시키셨다. 하나님은 역사를 그 뜻과 섭리대로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만물을 그 뜻대로 이끌어 가시는 전능자이시다. 사람을 부르시고, 높이시고, 사용하시는 분도 여호와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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