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남긴 선진들(3) / 조만식 장로편

송삼용 | 기사입력 2008/12/03 [18:04]

빛을 남긴 선진들(3) / 조만식 장로편

송삼용 | 입력 : 2008/12/03 [18:04]

2. 대포를 갖다 들이대 봐라!

 


살겠다는 굳센 마음을 가지고 자기의 운명을 자기 스스로 개척하라

- 고당 조만식<1935.10. 삼천리>

1946년 5월 어느날 부인 전선애 여사가 두 아이들과 함께 고려호텔을 찾아 면회했다. 고당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양손으로 아이들의 손을 꼭잡고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이 아이들을 돌봐 주십시요. 어디서든지 신앙을 지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 이 아이들의 앞길을 인도해 주소서. 민족과 교회에 쓰임받는 일꾼들이 되게 하소서. 일생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하소서 ---.”

눈물겨운 기도를 마친 후 고당은 부인에게 두툼한 봉투 하나를 전해 주었다. 봉투 겉에는 평소 즐겨 쓰던 만년필 글씨체로 다음과 같은 글씨가 새겨 있었다.

“檀紀 四二七九年 三月十日

西紀 一九四六年 三月十日

頭髮”

봉투의 글씨를 보는 순간 부인은 모든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목이 매었지만 애써 눈물을 참았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을 내밀어 두툼한 봉투를 건네 받았다. 고당은 연금된지 2개월이 지난 후 이미 자신의 미래를 예견하고 친히 유품을 준비한 것이다. 두발(頭髮)과 손톱! 고당의 얼굴에는 죽음을 각오한 듯 비장함이 서려 있는 듯했다. 부인은 봉투에 든 유품들과 함께 쓰여졌을 법한 글들을 생각했다.

‘나는 살아 돌아가지 못할터이니 마지막 유품이라 생각하고 보관해 두시오. 그간 고생 많았소. 아이들을 잘 부탁하오. 그러나 하나님이 지켜 줄테니까 조금도 낙심하지 마시오 ---. 당신이 사랑하는 남편 조만식.’

그런 글귀들을 상상하면서 잠시 주춤했다. 두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리자 부인은 고개를 돌려 눈물을 감췄다. 숙연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고당은 아이들의 손목을 꼭 잡은 채 부인에게 말했다.

“여기서 눈뜬 장님을 만드느니 위험이 따르겠지만 애들을 서울로 데려다가 공부를 시키는게 좋겠어요.”

반동 분자의 자녀들에 대해서 국민학교 이상의 교육을 봉쇄하려는 북한 당국의 계획을 고당은 알고 있었다. 이로써 자녀들에 대한 염려섞인 몇마디가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 자녀들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긴 채 자신은 민족의 십자가를 짊어지기로 각오한 것이다.

그 무렵 남한에서는 고당을 남한으로 모셔오자는 움직임이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민족 지도자들과 정부 고위층 인사들이 몇 차례 밀사를 보냈으나 고당은 끝까지 거절했다. 1947년 3월에는 면회까지 사절되었고, 그후부터는 생사도 알 수 없게 되었다.

민족의 아픔을 짊어지고 죽음의 길을 자초한 고당에게는 사사로운 욕심이 없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배운 지조와 절의의 정신력을 바탕으로 일제에 항거하며 일생을 보냈다. 고당의 성품에 대해서 딸 조선부 여사는 이렇게 증언한 바 있다.

“아버님 성격이 외유내강(外柔內剛) 하시거든요. 밖으로 보시기엔 얼마나 인자한지 몰라요 ---. 세상이 다 알다시피 아버님의 그 강한건 목숨이라도 내 걸고 굽힐 줄 모르는 거예요”

그런 지조와 절의의 정신은 22살 때 신앙 생활을 시작할 무렵부터 드러난다. 그가 신앙 생활을 시작한 직후 숭실 중학교 시절 술과 담배를 끊었다. 처음에는 과거의 습관을 완전히 끊지 못해 숭실에서는 친구들과 망을 보면서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그러다가 들켜서 벌을 받은 일도 이따금 있었다. 하지만 그후 40년을 일체 금주, 금연하면서 지조를 지켰다.

3.1 운동 직후 평양 형무소에서 2개월의 형 만기를 남겨 두고 가석방 통보를 받았을 때도 백절불굴의 지조를 보여 주었다. 일반적으로 가석방 소식은 감방 내에서 경사와 같았다. 하지만 고당은 단호하게 간수에게 말했다.

“내가 10개월 동안 수감된 것 자체가 불법인데 ‘가석방’이라는 이름으로 은전을 받는다는 것은 더욱 불명예스러운 일이요. 그래서 나는 가출옥을 하지 않고 이대로 잔여 형기를 모두 채우고 나가겠소”

일제는 독립 투사들을 회유하기 위한 정책으로 가석방하려 했다. 그런데 고당이 가출옥을 거부하고 있으니 형무소 측에서는 난처하게 되었다. 결국 간수와 입싸움 끝에 고당은 그날 밤 강제로 가출옥 되었지만 그의 흔들림 없는 지조는 일본인들도 감탄할 정도였다.

1945년 8.15 해방이 되자 평남 도지사가 시골에 은거하고 있는 고당에게 차를 보냈다. 그때 심부름 온 김항복을 곧바로 돌려 보내면서 말했다.

“일본 지사가 타던 차를 내가 탈 수 있겠는가. 조만식이를 그렇게 밖에 보지 않았는가! 나는 인수를 맡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고당은 잔인한 공산당 앞에서도 불굴의 지조를 꿋꿋하게 지켰다. 해방 후 8월 26일 소련군 측에서는 신정권을 수립한다는 명목 하에 ‘평남 인민정치 위원회’를 조직하여 고당에게 위원장을 맡겼다. 정치 위원으로는 민족 진영 16명과 공산 진영 16명씩 동수로 조직되었다.

하지만 공산측은 소련군의 비호 하에 갖은 횡포를 서슴치 않았다. 9월 12일 평양 산수 소학교에서 ‘인민 정치위원회’가 무장한 소련군의 엄호 속에 열렸다. 고당이 사회를 진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 진영의 의견은 빈번히 묵살되었다. 공산 측의 방해 공작 때문이었다. 심지어 공산측에서 인신 공격까지 퍼부었다. 그 순간 고당이 분연히 일어서서 외쳤다.

“사람을 모욕하는 언사를 쓰지 말기 바라오. 거 무슨 소리야! 그럴려면 이란 회의 집어 치워! 당신네들은 지금 총을 우리 앞에 갖다 대로 이 회의를 하고 있잖나? 그 뜻은 다 알갔다. 총 아니라 대포를 갖다 들이대 봐라! 나는 무섭지 않다!”

마치 태풍을 일으키는 회오리바람처럼 외쳤다. 성난 사자와 같은 고당의 기세에 공산당들도 할 말을 잃고 진정하라고 할 뿐이었다. 그날 이후 고당은 다시 인민 정치 위원회에 나가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고당은 어려서부터 배운 지조와 절의를 일생 동안 사수하면서 마침내 민족을 위해 희생 제물이 되었다. 고당에게는 지조가 생명보다 귀했던 것이다. 고당의 고결한 지조에 대해서 주요한은 이렇게 평가했다.

“지조가 고결하니만치 모든 일에 담담 백백하다. 금전도, 명예도 그들 유혹하지 못하며 권력도 그를 누르지 못한다.

지조와 강인함은 평생 동안 고당이 지켜온 정신적 자산이기도 했다. 죽음 앞에서도 불의에 굴하지 않았던 고당의 지조와 비타협의 정신이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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