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남긴 선진들(2) / 조만식 장로편

송삼용 | 기사입력 2008/12/03 [18:02]

빛을 남긴 선진들(2) / 조만식 장로편

송삼용 | 입력 : 2008/12/03 [18:02]
1. 어린 시절의 엄격한 가정 교육 
 
좋은 자녀가 되게 하려면 부모들은 자기의 결함을 자녀에게 보이지 않도록 하는 동 시에 가장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할 것이라

- 고당 조만식<1935.8.27-30. 금강산 장안사 강연>

좋은 부모가 좋은 자녀를 낳는다. 믿음의 부모가 믿음의 자녀들을 길러내기도 한다. 성경에 의하면, 모세의 부모는 믿음의 눈으로 아이를 보았다. 세례 요한의 부모도 기도로 아이를 길렀다. 이처럼 자녀의 미래는 부모에 의해 좌우된다. 자녀들의 인격과 성품도 부모의 영향에 따라 달라진다. 웨슬리는 경건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이런 대답을 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엄격한 신앙 훈련 덕분이다.”

고당 역시 가정에서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가 일생 동안 보여준 인품과 지조의 정신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들이다. 그는 평생 지조와 절의의 삶을 살았다. 가령, 신사 참배 강요에 항거함으로써 신앙의 지조를 굳게 지켰다.
 
창씨 개명을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다. 일경으로부터 학도병 모집 선동을 위해 연설해 줄 것을 강요받았으나 끝까지 거절했다. 만약 불응하면 체포한다는 소식을 듣자 시골에 가서 머리를 동이고 자리에 누워 버리기도 했다.

검소하고 절제된 그의 생활 습관 역시 어려서부터 몸에 베인 것들이었다. 물산장려 운동을 전개할 때 보여준 검소한 삶은 대대로 귀감이 된다. 양복 대신 무명 두루마기를 입었고, 외래산 중절모 대신 국산 말총 모자를 즐겨 썼다. 치약 대신에 소금으로 양치질을 했다. 세숫비누 대신 팥비누를 쓰고, 명함도 한지에 직접 써서 사용하기도 했다.

이런 고당의 지조와 비타협 정신, 그리고 생명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절의의 정신은 어렸을 때부터 배운 엄격한 가정 교육의 영향이었다. 하나님은 어려서부터 고당에게 지도자의 자질과 정신력을 준비시켜 주신 것이다. 고당 자신의 말대로, “사람의 출생과 민족의 장래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그러기에 고당은 우리 민족을 위해 일할 지도자를 강서 지역에 세워 어런 시절부터 철저하게 준비시키신 하나님의 도구였던 것이다.

고당이 태어난 강서 지역은 역사적으로 고구려의 기상이 불타오르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 을지문덕 장군의 묘가 있어서 강서인들은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강서인의 기질은 3.1 운동 때도 드러났다. 1919년 3월 1일 강서군 성대면 사천교회에서 교인들 수백명이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이에 인근 주민들 3천여명이 일제의 만행을 항거하다가 70여명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강서인들은 고구려인의 기개로 분연히 일어났다.

특히 강서 지역은 평양성과 인접하고 있어서 일찍 개화되었고, 신교육에 대한 열의도 뜨거웠다. 토마스 선교사에 의해 대동강 하류에서 최초로 배포된 성경 이야기가 전해져서 기독교를 일찍부터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런 영향으로 도산 안창호 선생같은 민족 지도자를 일찍기 배출한 것이다. 이런 지형적인 여건들과 엄격하게 교육시킨 가정 교육 환경으로 인하여 고당이 준비된 것이다.

부친 조경학은 아들에게 강서인의 기상을 어렸을 때부터 심어 주었다. 외유내강(外柔內剛) 정신력이나 강인한 기개도 가르쳐 주었다. 한번은 고당이 소년 시절에 동네 아이들에게 얻어 맞고 울면서 집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때 울고 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벌을 세웠다.

“사내 자식이 창피하게 얻어맞고 다니려거든 밥도 먹지 말거라.”

매사에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반성하고 뉘우칠 때까지 회초리가 부러져 달아나도록 종아리를 때리곤 했다. 그렇게 엄하게 다스리는 한편 매일같이 아들을 꿇어 앉혀놓고 옛 성현들의 말을 들려 주면서 지조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사람이란 의리가 있어야 한다. 절의(節義)를 존중하고 지켜야 하느니라”

고당보다 5살 아래인 누이 동생 은식 역시 아버지로부터 배운 절의가 몸에 베어 있었다. 은식은 열 일곱에 출가하여 결혼 3년 만에 청상 과부가 되고 말았다. 그녀는 지조와 절개로 50년을 수절한 후 고고하게 생을 보냈다. 고당이 성인이 되었을 때도 부친은 아들에게 강한 정신력과 지조를 심어주려고 애썼다.

3.1 운동 직후 고당이 1년 형을 선고받고 평양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의 일이다. 조경학은 아들이 형무소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졸도하고 말았다. 집에서는 가장의 인사불성으로 온 집안이 초상집이 되었다. 얼마 후 병석에서 일어난 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매일 형무소 주변을 한바퀴씩 돌았다. 사랑하는 외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정성을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의 사랑에 감복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고당을 면회하기 위해 형무소를 찾아가서 옥중 간수에게 물었다.

“여기 취사장이 어디요?”

간수의 안내를 받아 취사장으로 간 조경학은 수수와 콩으로 지어진 밥을 직접 시식했다. 그러더니 너털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뭐, 이만하면 견딜만하겠군”

이윽고 고당을 면회하게 되었다. 조경학은 쏟아지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고, 염려의 기색도 숨긴 채 담담하게 말했다.

“애, 그 정도의 식사면 건강에 지장이 없으니 잘 이겨내라. 사내에게 이런 고생쯤은 아무 것도 아닌 법이다.”

이런 식으로 조경학은 마음 속에 타오르는 외동 아들에 대한 격정을 감추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육신의 희생이 따를지라도 조국을 위해서라면 어떤 경우에도 지조를 지켜야겠기에 그런 격려의 말을 전하고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아들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컸던지 옥중에서 간곡하게 전도한 아들의 권면을 곧바로 받아들여 신앙 생활을 시작할 정도였다. 그후 조경학은 평양 장대현 교회 집사가 되어 남은 여생 동안 고당의 든든한 기도의 후원자가 되었다.

부친 조경학은 고당이 어렸을 때에 지조와 절의의 인격이 형성되도록 영향을 끼친 인생의 교사였다. 성인이 되었을 때는 신앙의 정결을 지키도록 기도로 후원해 주는 영적 버팀목이 되었다. 이처럼 고당의 탁월한 인격과 신앙의 배후에는 아버지 조경학이 있었다. 그러기에 고당은 자신의 체험에 기초해서 좋은 자녀를 길러내는 비결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좋은 자녀가 되게 하려면 가장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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