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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해석/설교
김창훈교수, 예언자적 설교 의의와 중요성
예언자적 설교는 죄를 책망하고 죄에 대해 심판을 외치는 설교로 이해돼야
기사입력: 2013/10/18 [15:39]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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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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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설교학 김창훈 교수의 논문으로 설교의 홍수 속에서도 말씀의 갈급함을 호소하는 교회에게 중요한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예언자적 설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제거하고 바른 설교학의 발전을 위해 이 논문을 요약하여 소개한다(정리 김순정 목사). 
 

들어가며: 예언자적 설교에 대한 일반적 오해

본고는 예언자적 설교의 의의와 중요성의 잘못된 인식에 그 출발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예언자적 설교는 ‘사회적, 정치적 변혁에 관한 설교(사회참여와 관련된 설교 또는 사회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설교)’로 이해된다. 또한 그러한 설교를 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는 예언자적 설교는 죄를 책망하고 죄에 대해 심판을 외치는 설교(정죄하는 설교)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예언자적 설교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바람직하고 균형 잡힌 설교를 위해 예언자적 설교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혹자는 이러한 이해와 관련하여 예언자적 설교는 교회에 필요하지만 교인들의 정서에 반하기 때문에 지역 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는 설교로 간주하기도 한다.

최근 들어 몇 몇 학자들에 의해 예언자적 설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제시되었다. 그 대표적인 학자로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이 있다. 브루그만은 “예언자적 목회의 임무는 우리를 둘러싸고 지배하는 문화에 익숙해진 의식과 인식에 대응하는 대안적인 의식과 인식을 낳고 키우며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지배적인 문화에 대응하는 대안적 의식을 깨우치기 위해서 ‘비판(criticism)’과 ‘동력화(erergizing)’ 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예언자적 비판은 슬픔의 언어와 함께 선포되어야 하고 , 예언자적 동력화는 소망의 언어와 함께 선포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브루그만이 교회 안에서의 예언자적 설교의 가치를 강조함으로 예언자적 사명의 바른 이해를 위해 많은 공헌을 하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그도 역시 예언자적 설교의 다양한 측면을 보지 못하고 사회적인 관점 (즉, 교회의 대 사회적 관점 )에 치우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보거만(J. Philip Wogaman)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외치는 설교 ’가 예언자적 설교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목회적 설교와 예언자적 설교는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 관계에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의 주장도 여전히 사회적 측면에 대한 강조가 많고 예언자적 설교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방향제시가 부족하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최근에 알그림 (Ryan Ahlgrim)은 예언자적 설교의 모델로 예수님을 제시하였다. 그는 이분법적 관점에서 서기관적 설교(Scribal Preaching) 와 예언자적 설교를 비교하였다. 그에 의하면, 서기관적 설교는 본문에 대한, 어떤 주제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설교로 청중들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설교라고 하였다.
 
반면에 예수님의 설교는 어떤 주제를 경험케 하는 설교이며 하나님을 위한 설교이며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설교이고 실제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설교였기 때문에 예언자적 설교라고 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의 설교가 예언자적 설교의 진정한 모델이 된다고 하는 그의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예언자들은 독립된 개인들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 속에서 그리고 일정한 사회적 역할의 수행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하였고, 그의 우선적인 관심은 “예언서의 말씀이 사회의 구조를 반영하고 봉사하고 도전하는 방법”에 있다고 하였다.

1. 예언자의 역할과 예언서 메시지의 본질

필자는 지금까지 예언자적 설교가 잘못 이해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구약의 예언자와 예언서 메시지에 대한 오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자적 설교의 바른 이해와 방향 제시 그리고 오늘날의 적용을 위해서 구약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예언자들의 역할과 예언서 메시지의 본질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하는 것이 우선적인 일이다. 

1.1. 예언자의 역할: 예언자들은 단순히 사회 개혁자들이었나?

구약의 예언자들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오해는 구약의 예언자를 당시 사회의 불의에 대항해서 심판을 외치는 사회 개혁자로 여기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당시의 예언자들이 사회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은 단순한 사회 개혁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강조한 것은 하나님 백성의 사회적 삶과 책임이었다. 예를 들어 보자.
 
이사야 1:17에서 선지자는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고 선포한다. 물론 이 선지자들의 당시 사회의 부패와 불의에 대항하는 메시지와 관련한 다양한 방향에서의 연구들이 있어왔다.
 
심판의 메시지가 선포되었던 ‘당시의 사회적 배경에 대한 연구’(E W Davies, Prophecy and Ethics [Sheffield: JSOT, 1981]; Robert R. Wilson, Prophecy and Society in Ancient Israel [Philadelphia: Fortress, 1980])라든지, ‘예언자들의 심판의 메시지와 이웃 나라 전통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Moshe Weinfeld, Social Justice in Ancient Israel and in the Ancient Near East [Minneapolis: Fortress, 1995]; Bruce V. Malchow, Social Justice in Hebrew Bible (Collegeville: Liturgical Press, 1996]) 등이 그 예이다.
 
하지만 디어만이 주장한대로 당시의 사회적 배경에 대한 신뢰할 만한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정확한 사회적 배경을 밝힌다는 것이 불가능하며(J. A. Dearman, Property Rights in the Eighty-Century Prophets: The Conflict and its Background [Atlanta: Scholars, 1988]), 또한 고대 근동의 법과 이스라엘의 법이 유사성은 있지만 구약의 사회 정의에 대한 메시지는 이웃 이방 국가들의 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이 있음도 지적되어 왔다(참고. Leon Epzstein, Social Justice in the Ancient Near East and the People of Bible, trans., J. Bowden. [London, 1986]).
 
필자는 본 논문에서 선지자의 메시지의 핵심과 성격을 특별히 이사야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예언서 전체를 살펴보는 것은 지면 상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이사야서가 예언서 전체의 메시지를 충분히 대표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이기 때문이다.

메시지가 일견 사회 개혁 또는 사회 정의에 관한 메시지로 보여 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것은 두 가지를 통해 확인된다 . 먼저 본문의 메시지가 선포된 배경을 살펴보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배은망덕하고 죄를 범하였을 때 (사 1:2-4), 다른 나라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징계 하셨다 (사 1:5-9). 징계를 받은 이스라엘은 제멋대로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제정한 방법대로 예물과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회복시키실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들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가증스럽다고 평가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제시하는데, 그것이 이사야 1:17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은 단순히 사회 정의나 개혁에 관한 메시지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위한 하나님 백성의 합당한 삶에 대한 메시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와 같은 이해는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확인될 수 있다. 신명기 10:17-19과 24:17-19 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러면서 그러한 삶이 종살이 하던 애굽에서 그들을 구원한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로 대표되는 사회의 약한 자를 돌아보는 것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당연히 살아야 할 삶으로서 명령하셨다.
 
하지만 선지자 시대의 이스라엘은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합당한 삶의 모습은 없이 단지 형식만 갖추어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를 드렸다. 그와 같은 모습을 본 선지자들은 율법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와 기도를 위해 하나님의 백성이 당연히 살아야 할 사회적 삶과 책임이 무엇인지 선포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언서에서 일견 사회 정의에 대한 메시지처럼 보여 지는 선지자들의 선포는 단순히 사회 개혁이나 사회 정의를 위한 메시지라기보다는 하나님 백성의 사회적 삶과 책임에 대한 외침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정당하다. 따라서 선지자들을 단순히 사회 개혁자라고 보는 것을 옳지 않다. 

1.2. 예언서의 핵심 메시지

구약 예언자들의 또 다른 오해는 그들의 일차적인 임무가 미래의 일 특히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예언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물론 구약의 예언자들이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행하심도 선포하였고, 예수님의 오심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일차적인 사명은 미래의 일 특히 예수님 오심에 대해 예언하는 것이 아니었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선지자들은 당시의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였다. 미래에 대한 선포나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예언도 일차적으로는 당시의 이스라엘의 상황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메시야 예언에 대한 메시지는 양적으로도 극히 일부분이다.

그러면 예언자들의 핵심 메시지는 무엇이었는가? 예언자들의 메시지의 성격과 핵심을 알기 위해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자. 당시의 상황은 크게 3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먼저는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타락되어 있었다. 물론 이 둘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애굽이나 앗수르 등 다른 나라들을 의지하였고 하나님과 함께 이방신 섬겼다. 또한 사회적 삶도 엉망이었다. 다음으로, 이스라엘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낙심하고 있었다.

그것은 특히 이사야 40장 이하에 잘 언급되어 있다. 이사야 40-55장에 보면 이스라엘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크게 두 가지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하나님의 무능함’에 대한 것이었고 (사 40:27),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그들을 버리심’에 대한 것이었다(사 49:14).
 
다시 말해, 그들이 지금 그렇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무능하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신 결과라고 생각한 것이다. 세 번째는 국제 정치 상황의 변화(앗수르 -바벨론-페르시아로 국제 정세의 주도권이 변화됨)로 사회가 혼란되었고 (참고. 이사야 7, 13-23, 36-39 장), 그러한 주도권 쟁탈 속에서 이스라엘은 피해를 보며 힘든 삶을 살았다. 

1.2.1. 심판의 메시지와 함께 한 구원의 메시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선지자들이 선포했던 메시지의 두 주제는 심판 메시지와 구원(소망 또는 회복)의 메시지였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타락한 때는 죄를 벌하시는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였고, 낙심하고 좌절하였을 때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결코 버리시지 않을 것이라는 회복과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선지자들의 핵심 메시지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혹자는 선지자들의 중심 메시지는 심판의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선지자들은 이미 확정된, 결코 바꾸어질 수 없는 다가올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혹자는 심판의 메시지와 소망의 메시지가 동등하게 선지자들의 핵심 메시지였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선지자들의 주 메시지는 구원 (소망)의 메시지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세 번째 견해에 동의한다. 그것은 세 가지 차원에서 확인될 수 있다. 먼저, 그것은 선지서가 항상 회복과 구원의 메시지로 끝남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스겔서 그리고 모든 소선지서들이 모두 회복의 메시지와 함께 끝이 난다. 이것은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과 계획은 이스라엘의 구원이요 회복임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이사야서를 살펴보자. 물론 이사야서 전체를 보면 양적으로 심판의 메시지가 더 많다. 그러나 항상 심판 메시지는 소망(회복, 구원)의 메시지와 함께 선포되었고 끝을 맺음을 알 수 있다.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보자. 일반적으로 이사야 1장은 이사야서의 전체의 요약이라고 하는데, 결론인 24-27절에서 선지자는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린 다음에 회복시킬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또한 일반적으로 하나의 문학적 단위라고 인정되는 이사야 1-12장에서도 심판의 메시지가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지만 마지막은 회복과 구원의 메시지와 함께 끝난다. 뿐만 아니라 이사야서 후반부인 40-66장은 거의 대부분이 소망과 구원의 메시지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선지서 곳곳에 선포되고 있는 ‘시온주의(하나님께서 결국은 시온을 회복시킨다는 사상),’ ‘메시아에 대한 소망,’ 그리고 ‘남는 자 사상(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남는 자들을 두시고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 등도 선지자의 핵심 메시지는 심판의 메시지가 아니라 소망의 메시지임을 확인시켜 준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분명히 심판하시고 정죄하시지만 그것은 마지막이 아니고 회복의 과정인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선지자의 핵심 메시지는 심판이 아니고 소망과 구원의 메시지라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심판의 메시지와 구원의 메시지는 각 각 별도의 구분된 메시지가 아니라 오스왈트가 주장한 것처럼 하나의 ‘패키지(package)’로 이해해야 한다. 한 마디로 선지서의 메시지는 ‘심판의 메시지와 함께 한 구원의 메시지’라고 요약할 수 있다. 

1.2.2. 유일신 하나님 의 메시지

선지서의 또 하나의 핵심 메시지는 ‘유일신 하나님 ’의 메시지이다. 이스라엘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낙심하고 좌절되었을 때 그리고 국제 정세가 심히 혼란스럽게 움직이고 있을 때 선지자들은 ‘유일신 하나님’을 선포하였다.
 
예들 들어, 선지서(특히 이사야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하나님을 누구와 비교할 수 있는가?(사 40:8, 25; 46:5)” 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사 43:11, 44:8 등등)” 등이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메시지다. 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은 유일신 하나님께서 단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전 세계와 역사의 통치자이심을 선포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와 세계의 통치자로서 유일신 하나님의 선포는 예언서 곳곳에 기록되어 있는 소위 ‘이방에 대한 경고 또는 심판(Oracles against Nations)’에서 잘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이사야 13-23장을 살펴보면, 이방에 대한 경고가 단순히 이방 나라들에 대한 경고나 심판의 선포가 아니라 그 이상의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이사야 13-23 장의 주요 관심 또는 주요 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혹자는 이방에 대한 경고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하기 위해서 선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사야 13-23장은 이방의 심판이 단순히 이스라엘의 구원과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사야 13-23 에는 이스라엘의 심판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방에 대한 경고는 이스라엘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방에 대한 경고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경고만을 의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시온 또는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과 계속된 보호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방에 대한 경고가 전쟁 전에 이스라엘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확인되지 않는 가설일 뿐이다.

필자는 이방에 대한 경고의 핵심 메시지는 이사야 14:24-27에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파하며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하면서 역사의 주관자로서의 하나님을 선포하였다(참고. 사 10:15).
 
다시 말해, 이방에 대한 경고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온 세계와 역사의 주인 되심과 다른 신들과 우상들과의 비교되지 않는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선포한 것이다. 결국 이사야 13-23장에 있는 이방에 대한 경고는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 되게 하겠느냐?” 또는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라는 메시지가 다른 각도에서 선포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선지자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주변 강대국들의 성장으로 억압 상태에 있었던 이스라엘을 향해 유일신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함으로,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이나 우상들을 의지하지 말고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토록 하며, 또한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근거를 제시하였다.

1.3. 예언서 메시지의 성격: 언약에 근거한 메시지 선포

이제 예언서 메시지의 성격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늘날 예언자적 설교의 본질을 결정하는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언서 메시지의 성격에 대한 몇 가지 주장이 있다. 혹자는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아주 특별한 메시지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예언자들과 하나님과의 특별한 경험의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사야나 예레미야나 에스겔 등은 모두 부르심의 특별한 경험을 하였고 말씀을 받는 특별한 과정이 있었다. 하지만, 예언서의 메시지를 보면 그 내용이 비이성적이거나 신비스럽지 않다. 하나님과 선지자들과의 신비스러운 특별한 경험을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로서 예언자들의 권위를 강조하는데 우선적 목적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혹자는 예언서의 메시지가 그 이전의 하나님의 말씀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메시지라고 하기도 한다. 그것은 예언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버리심을 선언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 본대로 이스라엘의 심판의 메시지는 결코 선지자들의 마지막 메시지가 아니었다. 심판은 회복의 과정으로 선포되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와 그에 따르는 율법을 근거로 당시의 상황에 맞추어서 선포되었다고 이해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는 예언자의 심판과 소망의 메시지의 출발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의 메시지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성에서 출발한다(참고. 사 1:2-3). 또한 이사야 5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죄악 된 모습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포도원과 그 주인의 관계에서 설명하고 있고, 이사야 40-55 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결코 변할 수 없는 언약 관계임을 선포하고 있다(사 49:14-17; 62:12).
 
뿐만 아니라, 앞에서 언급한 대로 선지서에 있는 약한 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선지자들의 관심 그리고 유일신 사상 등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언약의 징표인 율법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래서 모우블리의 주장은 옳은 것이다.

선지자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전통들을 취하여 그것들을 그들의 설교에 사용하였고, 종종 그것을 재확인시켰고, 종종 그것을 수정하거나 재해석하기도 하였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선지자들은 새롭고 놀라운 통찰력으로 세상과 그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내었다. 결론적으로, 예언서의 메시지는 언약과 율법의 전통을 새로운 상황에서 해석하여 선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예언서의 비판의 메시지는 언약관계에서 요구된 삶을 살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이요 책망이었고, 소망(회복, 구원)의 메시지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의 당연한 결과로 선포되었다. 
 
2. 예언자적 설교의 이해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 예언자들의 역할 그리고 예언서의 내용과 성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이제 오늘날 예언자적 설교가 어떻게 이해되고 실제적으로 행해져야 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2.1. 목회적 설교(Pastoral preaching)로서 예언자적 설교

예언자적 설교와 목회적 설교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다. 그것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하나는 배타적인 관계이다. 즉 예언자적 설교는 목회적 설교와 배타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역교회에서 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상호보완적 관계이다. 즉 예언자적 설교는 목회적 설교와 반대되는 개념이지만 바람직한 목회를 위해서 상호 보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포함적 관계이다. 즉 목회적 설교의 큰 범위 안에 예언자적 설교는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견해들은 예언자적 설교에 대한 바르지 못한 이해에서 연유되었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이해와는 달리 예언자적 설교는 목회적 설교보다 그 범위가 훨씬 넓을 뿐 아니라 목회적 설교를 포함한다고 하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그러면 목회적 설교로서 예언자적 설교가 어떻게 이해되고 행해져야 하는지 살펴보자. 목회적 설교로서 예언자적 설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목회적 설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목회적 설교는 ‘1) 지역교회의 성도들에게(대상) 2) 교회 전체와 개개인의 필요를 고려해서 메시지를 선포하되(내용) 3) 성도들의 회복을 목표로 하는 설교(목표)’라고 정의된다. 만약 목회적 설교의 이러한 이해에 동의한다면, 예언자적 설교는 당연히 목회적 설교이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먼저, 구약 예언자들은 우선적으로 사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다음으로,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 백성의 삶과 상황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마지막으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의 관계회복과 하나님께 대한 신뢰회복을 목표로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이러한 구약의 예언자들의 메시지 선포의 대상 그리고 메시지의 내용과 목적은 오늘날 목회적 설교가 추구하는 것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자적 메시지는 지역 교회에서 지역교회 목회자가 선포할 수 있고 선포해야 할 메시지이다.

그러면 바람직한 목회적 설교로서의 예언자적 설교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먼저, 목회적 설교로서 예언자적 설교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성도와 설교자와의 온전한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동일시(Identification)’이다. 구약의 예언자 들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자신들을 분리하지 않고 동일시하였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아이들의 이름(이사야 8장)과 자신의 상징적인 행동(이사야 20장)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상황과 동일시하였고, 에스겔은 사로잡힌 자들과 함께 그발강가에 앉음으로 자기의 백성들의 고난에 동참하였다. 다른 하나는, 사랑과 열정의 마음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차가운 마음을 소유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물론 그들이 때때로 분노와 함께 심판을 선포하였지만 그것은 그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였기 때문이고 이스라엘의 믿음의 회복을 위해서 뜨거운 열정의 발로였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바람직한 목회적 설교로서 예언자적 설교를 위해서 설교자는 성도들과 분리되지 말고 동일시되어야 하며 사랑과 열정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다음으로 목회적 설교로서 예언자적 설교를 위해서 성도들의 필요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필요에 민감하였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메시지를 외쳤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예언자적 설교도 성도들의 필요를 인식해야 하고 그 필요를 채워야 한다.
 
하지만 바람직한 예언자적 설교는 표현된 필요(Expressed needs: 설교의 대상인 교회에 의해 직접 표현된 필요) 뿐 아니라 표현되지 않는 진정한 필요(Unexpressed actual needs: 교회에 의해 표현되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서 또는 설교자의 관점에서 볼 때 성도의 믿음과 사명과 삶을 위해서 채워져야 할 필요) 모두를 파악하고 채워야 한다. 그런데 만약 표현된 필요와 표현되지 않는 진정한 필요가 대립된다면 후자를 택해야 한다.  

2.2. 사회적 설교(Social preaching)로서 예언자적 설교

예언자적 설교는 목회적 설교이다. 하지만 예언자적 설교의 관심이 단순히 목회적 상황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예언자적 설교는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성도들이 속하여 살고 있는 사회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즉, 예언자적 설교는 사회적 설교이다. 그러면 이제 ‘사회적 설교로서의 예언자적 설교’가 어떻게 실제로 행해져야 하는지 살펴보자.  

2.2.1.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적 설교로서의 예언자적 설교’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설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접근이 있는데, 하나는 설교에서 청중의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 사회적 이슈에 관해 직접 설교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예언자적 설교를 위해서 설교자는 우리 주위(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고려하고, 그러한 문제들을 성경 본문의 빛 아래서 조명해야 한다.
 
예를 들어, 기아, 전쟁, 폭동, 사회적 무질서, 경제적 침체, 정치적 혼란 등과 같은 사회적 상황을 본문과 연결하여 설교 중에 적절히 다루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예언자적 설교는 공동체 전체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이슈에 관해 하나님의 뜻을 선포해야 한다. 즉, 에이즈, 낙태, 동성애, 부동산 투기, 장애인, 노인 차별, 성차별, 인종차별, 학력차별 등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직접적으로 언급해야 한다.
 
그런데 사회적인 이슈를 논할 때에는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관점에서 논해서는 안 된다. 깊이 있고 통찰력 있는 접근이 필요하다. 따라서 권위 있는 예언자적 설교를 위해서 설교자는 항상 사회적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며, 또한 많은 연구와 더불어 전문가들의 도움도 구해야 한다. 

2.2.2. 예언자적 공동체의 양육

두 번째로, ‘사회적 설교로서의 예언자적 설교’를 행하는데 있어서 더욱 중요하고 실제적 방법은 예언자적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이다. 즉, 설교를 통해서 사회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 예언자적인 공동체로서 교회를 양육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필자는 두 가지의 방향의 메시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교회의 정체성 강화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 안에서 교회의 책임과 사명에 대한 강조이다. 

2.2.2.1. 교회의 정체성의 강화

구약의 예언자들은 당시의 사회적ㆍ정치적ㆍ경제적 상황에 반응하여 메시지를 선포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특별히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강조하였다. 먼저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보호하셨으며, 끝까지 그들을 돌보시고 회복시키실 것이라 강조하였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른 나라들로부터 구별하셨으므로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특별히 구별된 공동체라고 역설하였다.
 
또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믿고 섬기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와 구별된 특별한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신다고 외쳤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은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하고, 이방나라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려졌으므로 세상에서 거룩하고 구별된 공동체로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였으며, 그러한 이스라엘의 구별은 구별된 존재로서의 유일신 하나님에 근거한다고 선포하였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설교로서의 예언자적 설교’는 교회가 세상에서 구별된 특별한 공동체임을 강하게 설득시켜야 한다. 

2.2.2.2. 교회의 책임과 사명에 대한 강조

앞에서 언급한 대로, 특별히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의 강조와 함께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사회에 대한 책임과 사명을 강조하였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설교로서의 예언자적 설교’는 교회가 사회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도록 촉구해야 한다. 예언자적 설교자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은 선택이 아니라 복음의 필수적인 한 부분임을 선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예언자적 설교는 하나님과의 관계 뿐 아니라 세상과의 관계도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회복하는 것을 도와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예언자적 설교는 교회가 사회적인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교회에 도전하거나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함께 분투하며 노력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윌몬은 예언자적 설교의 주된 역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언자적 설교의 목적은 예언자 공동체의 탄생과 준비이다. 따라서 우리의 설교는 예언자적 교사, 예언자적 가게 주인, 예언자적 가정의 식구들과 진리를 말할 수 있는 16세 아이를 키우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언자적 공동체를 세우기 위하여, 교회가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서도 안 되고, 그 안에 완전히 포함되어서도 안 된다. 이점에 대하여, 뮐러와 스미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교회는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세상의 이야기를 되풀이해서도 안 되고, 세상의 이야기와 교회의 연결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시해서도 안 된다. 교회는 이러한 두 극단의 사이에서 적절한 방법으로 교회만 갖는 독특한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예언자적 공동체를 양육하는 것이야 말로 교회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성취하는 가장 유효한 도구이며 사회에 예언자적으로 참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예언자적 공동체 양육의 개념은 우리에게 ‘사회적 설교로서의 예언자적 설교’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제공한다. 한 편으로, 예언자적 공동체를 양육하는 개념은 ‘사회적 설교로서의 예언자적 설교’가 에이즈, 낙태, 인종차별과 같은 사회적 이슈들을 찾아 논하거나 청중의 사회적 상황을 설교에 반영하는 것 이상이 되어야 함을 확인시켜준다.
 
다시 말해, 이것은 교회가 사회에서 수행하여야 할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서 실제적으로 사회에 들어가야 함을 분명히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 예언자적 공동체를 양육하는 개념은 ‘사회적 설교로서의 예언자적 설교’는 설교자가 단순히 시가행진에 참여하고, 사회 운동의 지도자로 섬기고, 데모하는 자들에게 연설하고, 협상자로 봉사하는 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확인시켜준다.

2.3. 신학적 설교(Theological Preaching)로서 예언자적 설교

앞에서 필자는 예언자적 설교는 목회적 설교요 사회적 설교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언자적 설교는 목회적 설교이기에 단순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접근되어서도 안 되고, 사회적인 설교이기에 단순히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접근되어서도 안 된다. 예언자적 설교는 신학적 설교이다. 다시 말해, 예언자적 설교는 ‘성경적 설교 (Biblical Preaching)’ 요 ‘하나님 중심적인 설교(God-centered Preaching)’다. 그러면 신학적 설교로서 예언자적 설교가 어떻게 이해되며 어떻게 가능한지 살펴보자. 

2.3.1. 성경적 설교 또는 하나님 중심적 설교

2.3.1.1. 예언자적 설교의 기초로서 하나님의 말씀

예언서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라,”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임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등과 같은 말씀이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말씀들은 예언자들의 선포의 근거가 하나님 말씀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예언자들은 그들에게 전해내려 왔던 전통(언약과 율법 : 오늘날로 하면 성경이라고 할 수 있다)을 당시의 상황에서 해석하고 적용하여 선포하였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예언자적 설교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또한 성경은 설교자가 교회와 사회와 세계를 해석하는 렌즈여야 한다. 

2.3.1.2. 하나님의 뜻의 선포로서 예언자적 설교

앞에서 보았던 대로 선지자들은 당시의 이스라엘에게 그 시대의 죄악의 상황, 어려운 상황, 그리고 국제 정치의 혼란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우쳐주기 원했다. 마찬가지로, 예언자적 설교도 목회적ㆍ사회적 상황을 고려해서 현재 교회에 필요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선포해야 한다. 

2.3.1.3.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선포로서 예언자적 설교

이사야 13-23, 40-55장에서 강하게 드러난 것처럼, 선지자들은 유일신 하나님을 선포했다. 마찬가지로 예언자적 설교도 오늘날의 혼돈의 상황에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신 하나님을 선포해야 하고, 하나님의 주권, 위엄, 거룩함, 능력, 지혜, 신실함, 은혜의 무한하심 등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해야 한다.

이상과 같이 예언자적 설교는 성경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설교요, 하나님이 설교의 내용이요 목표이기 때문에 성경적 설교(Biblical Preaching)요, 하나님 중심적 설교(God-Centered Preaching)라고 할 수 있다. 

2.3.2. 신학적 설교의 전제 조건: 신학적 해석 또는 하나님 중심적 해석

신학적 설교로서 예언자적 설교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 조건은 ‘신학적 해석(또는 하나님 중심적 해석)’이다. 즉,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학적 해석과 관련하여 피해야 할 몇 가지 함정(pitfall)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인간 중심적(Anthropocentric) 해석(또는 설교),’ ‘영해(Allegorizing 또는 Spiritualizing) 설교,’ ‘도덕적(Moralizing) 해석(또는 설교)’ 등이 있다.
 
이러한 잘못된 접근들은 단순히 목회적 차원 또는 사회적 차원에서 본문을 접근할 때, 본문을 피상적으로 접근하거나 잘못된 관점에서 접근할 때 또는 좀 더 은혜로운(?) 설교를 하고자 할 때 나타나는 결과들이다. 먼저, ‘인간 중심적 해석’은 본문에 등장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등장인물들은 일차적으로 그 인물들의 탁월함이나 악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에서 선택된 자들이고, 천지를 창조 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역사를 주관하심 등을 드러내기 위해서 쓰임 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설교자가 본문에서 핵심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무시한 채 등장인물들을 부각시키고 그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서 접근하면, 그것은 인간중심적 해석(설교)이 된다.

다음으로, ‘영해(설교)’는 본문을 해석학적 원리에 따라서 정당하게 해석하지 않고(즉, 역사적 상황이나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주관적으로 본문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도덕적 해석(설교)’은 인간 중심적 해석과 어느 정도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는데, 본문의 진정한 의도를 무시한 채 본문에서 단순히 윤리적인 교훈만을 이끌어내는 접근이다.
 
물론 설교에서 신앙인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부분도 강조되어야 한다. 하지만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교훈이 본문의 이차적이거나 부수적인 내용인데, 본문의 하나님의 의도를 간과하거나 왜곡해서 윤리적인 것이 핵심적인 주제로 설명되거나 강조되면 그것은 도덕적 해석(설교)이 된다. 이러한 잘못된 함정들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 중심적 접근을 통해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제대로 발견하여 선포할 때 바르고 온전한 예언자적 설교가 될 수 있다.  

2.4. 종말론적 설교로서 예언자적 설교

2.4.1. 의미

종말론적 설교로서 예언자적 설교는 ‘하나님의 임하심’을 설교함을 의미한다. 그러면 종말론적 설교로서 예언자적 설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먼저, 하나님의 임하심을 선포하는 종말론적 설교로서 예언자적 설교는 ‘심판의 메시지와 함께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설교를 말한다. 즉 심판과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임하심을 선포함으로 새로운 각성과 도전을 주고 현재의 삶에 소망과 힘을 불어넣어 주는 설교이다.
 
물론 예언자적 설교에서 심판의 메시지가 무시되어서는 안 되지만 예언자적 설교의 중심 메시지는 심판의 메시지가 아니라 구원과 소망의 메시지임을 늘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설교의 구조에 있어서 심판의 메시지에서 소망의 메시지로 반드시 이어진다거나 또는 소망의 메시지의 양이 심판의 메시지보다 항상 많아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순서나 양은 고려하지 않아도 되며 때로는 소망만 때로는 심판만 선포될 수 있다.

다음으로, 종말론적 설교로서 예언자적 설교는 현재와 미래에 임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하는 설교이다. 다시 말해, 구약의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현재적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여전히 역동적으로 활동하고 계시고 모든 일에 관여하심을 선포해야 하고, 또한 역사의 마지막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선포해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강조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종말론적 설교로서 예언자적 설교는 은혜와 순종을 함께 강조하는 설교이다. 예언서를 보면,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은 단지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나 낙관주의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결과이며 회복은 하나님의 죄의 용서와 관련되어 있다. 구원과 회복은 전적인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값 싼 은혜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이 요구된다. 만약 순종하지 않으면 그에 대한 징계가 따른다. 은혜와 순종도 역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임하심을 선포하는 종말론적 설교로서 예언자적 설교는 현재와 미래의 관점에서 그리고 은혜와 순종을 함께 강조하며 심판 메시지와 함께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설교이다. 

2.4.2. 종말론적 설교를 위한 다양한 접근들

종말론적 설교로서 예언자적 설교는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먼저, 언약의 관점에서 설교할 수 있다. 예언자들은 언약을 근거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꾸짖고 소망을 선포하였다. 오늘날도 예언자적 설교는 언약의 관점에서 설교할 수 있다. 언약의 핵심적인 요소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변함없이 신실하게 끝까지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언약의 당사자인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순종이다.
 
다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설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의미하는데 현재와 미래의 관점을 모두 포함하며, 철저한 회개와 헌신을 요구한다(참고. 막 1:14-15). 이것은 예언자적 설교가 요구하는 내용과 일치한다. 세 번째로, 복음의 관점에서 설교할 수 있다. 십자가와 부활로 요약되는 복음은 타락하고 소망 없는 죄인을 위한 구원의 메시지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도 미래에 나타날 하나님의 궁극적인 임하심의 표현이다. 따라서 예언자적 설교는 복음의 선포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종말론적 설교로서 예언자적 설교는 성경의 핵심 주제들과 복음의 메시지를 통하여 선포될 수 있다. 이것은 예언자적 설교가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위해서 선포될 수 있고 또한 선포되어야 함을 재차 확인시켜 준다. 

2.4.3. 실제적인 방법: 삼중 해석과 삼중 목표

그러면 실제적으로 종말론적 설교로서 예언자적 설교는 어떻게 행해져야 하는가? 한 마디로 하면, 목회적 관점, 사회적 관점, 신학적 관점의 삼중 해석과 삼중 목표를 따라서 메시지가 형성되고 선포되어야 한다. 물론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예언자적 설교는 그 형성과 목표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신학적이어야 한다. 즉, 목회적 관점과 사회적 관점에서 설교될 때 그것이 신학적이 되지 않으면 바람직한 예언자적 설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목회적 관점과 사회적 관점의 고려 없는 신학적 접근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뿐만 아니라, 목회적 관점과 사회적 관점도 분리될 수 없고 긴밀히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예언자적 설교는 ‘삼중 해석’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예언자적 설교는 교회의 필요와 상황, 사회의 상황과 이슈, 그리고 하나님(성경)의 뜻을 함께 고려하여 형성되는 설교이다. 물론 설교의 출발은 성경으로부터, 목회적 상황으로부터, 사회적인 문제로부터 모두 가능하다.

그러나 예언자적 설교는 최종적인 메시지를 형성을 위해서 세 가지 관점이 고려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예언자적 설교는 ‘삼중 목표’를 갖는다. 다시 말해, 예언자적 설교의 목표는 신학적(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 사회 안에 하나님의 뜻의 실현)이어야 하고, 목회적(교회의 표현된 필요과 표현되지 않는 필요를 채움)이어야 하며, 사회적(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 사회적 책임을 감당키 위한 사회의 대안적 공동체로 세워감)이어야 한다. 물론 모든 설교에서 세 가지 목표가 동시적으로 함께 달성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소홀히 되어서는 안 된다. 

나가며: 오늘날 강단에서의 예언자적 설교의 중요성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의 예언자의 역할과 예언서 메시지의 이해를 근거로 오늘날 예언자적 설교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 살펴보았다. 이제 결론적으로 예언자적 설교의 중요성을 간단히 피력하고자 한다. 한 마디로, 예언자적 설교는 이 시대 강단의 대안이요 이 시대에 회복되어야 할 메시지이다.

먼저, 삼중 해석을 근거로 삼중 목표를 추구하는 예언자적 설교는 오늘날 많은 문제점과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강단의 대안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설교가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영적인 부분에 치우침으로 삶의 구체적 상황을 언급하지 않으며, 특히 사회적 삶과 책임에 대해 소홀한 설교가 많다.
 
또한 치유하고 감싸주는 메시지에 치우침으로 영적으로 곪아 있는 것을 수술치 못하는 경우도 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 메시지에 치우침으로 설교가 인도주의적 사회학적인 교양 강좌가 되고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이 설교가 한쪽 방향으로 치우친 경향이 많은 이 시대에 교회와 강단이 살기 위해서 균형 잡힌 설교로서의 예언자적 설교는 대안이 될 수 있다.

다음으로 당시의 상황과 오늘날 상황의 유사성을 보면 예언자적 메시지는 오늘날 회복되어야 할 메시지이다.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신적권위가 파괴되어가고(예, 인간복제), 마지막으로 지탱해야 할 공의와 윤리가 파괴되고 있고, 의학과 과학 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고민과 고통이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심판의 메시지와 함께 구원과 소망의 메시지 그리고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메시지는 반드시 선포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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