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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박혜근, 권징(Church Discipline)의 교회론적 의의(3)
기사입력: 2013/10/08 [16:51]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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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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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권징의 유용성

3.1 참된 교회의 표지

칼빈은 “참된 교회의 표지”(notae ecclesiae)로서 바른 복음의 선포와 성례의 정당한 집행 이들 두 가지만을 인정했다. 이 두 가지는 루터(M. Luther)를 비롯한 모든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이 참된 교회의 표지로서 기본적으로 인정한 것들이었다. 물론 성찬을 어떻게 집행하고 그 의의는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개혁자들 간에 첨예한 의견대립이 있기는 했지만 참된 교회의 표지로서 공통적으로 이 두 가지는 항상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칼빈주의적 전통 안에 있는 교회들은 칼빈이 제안한 두 가지 표지에 교회의 권징을 하나 더 추가하여 세 가지로 인정하였다. 이런 변화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1536)가 나온 후 거의 100년 이상 지난 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7)를 작성하였던 스코틀랜드의 청교도들이 주도하였다. 그러나 정작 “제네바 장로회”(The Geneva Consistory)의 설립과 운용을 지지했던 칼빈은 권징을 명시적으로 참된 교회의 표지로서 주장하지는 않았다. 칼빈이 아직 생존해 있었던 시기인 1560년부터 1562년 사이에 작성된 벨직고백서(The Belgic Confession, 1561)와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The Scottish Confession of Faith, 1560)를 포함한 개혁교회의 초기의 신앙문서는 권징을 참된 교회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표지로 삼았고, 이후 이 세 가지 표지는 칼빈주의 전통의 근본적인 요소가 되었다.

베자(T. Beza)는 예외적이지만 칼빈과 나머지 개혁주의 신학자들 간에 차이는 교회의 표지로서 권징의 명시 여부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칼빈과 개혁주의자들 간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칼빈이 교회의 표지를 언급할 때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규례를 따른 성례의 집행”이라고 함으로써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거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사람들을 성찬에 참여하게 하지 못하도록 하는 권징의 시행을 암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시점에서 교회의 표지인 복음과 성례전, 그리고 권징의 근본적인 차이를 규명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복음을 듣는 것, 성찬에 참여하고 세례를 받는 것은 교회를 세우고 보양(保養)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이 주체가 되시고 교회는 수용적 객체가 된다. 그러나 권징은 교회가 주체가 되고 동시에 스스로 권징의 대상 즉 객체가 되는 행위로서 신자들을 훈육하고 교정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삶을 살도록 이끄는 것이다. 또한 권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점에서 말씀에 대한 교회의 주관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를 세우고 보존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이므로 권징이 교회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라고 하는 것은 중대한 잘못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원으로 절대적이고 유일한 원인으로 보았던 칼빈주의자들이 권징을 교회의 표지에 포함시켰다고 해서 그것을 복음의 선포나 성례전 등과 동등한 교회의 생명 혹은 본질적인 요소로 보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권징의 기능이 없이는 그 같은 교회의 생명을 실제적으로 보장할 수 없다는 인식이 있었고, 그 결과 교회의 표지를 복음, 성례전, 그리고 권징으로 세분화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칼빈주의 전통에서 교회의 세 가지 표지를 말할 때 두 가지의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요소를 결합했다고 보아야 한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를 수호하기 위한 교회의 실천적 책임의 결합이 바로 그것이다. 역사 안에 있는 가시적 교회로서는 은혜의 침해(侵害)를 초래하는 죄의 세력이 잔존하고 있기 때문에 권징의 정당한 시행이 없이는 결코 은혜를 보존할 수 없다는 인식이 교회의 표지에 그대로 잘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3.2 교회의 표지의 의의

교회의 표지가 갖는 의의에 관해서 칼빈은 그것을 교회의 일체성을 위한 객관적이고 외적인 근거로 보았다. 필수적 교리에 관한 바른 가르침과 성례, 이 두 가지는 가시적 교회의 통일성을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기에 권징의 정도가 교회의 표지의 현존을 부정하는 정도로까지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본 것이다. 칼빈의 판단에 따르면, 그 이유는 참된 교회의 표지야말로 교회의 일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에 교회의 표지를 고의적으로 간과하거나 부정하게 되면 교회가 무엇인지,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인지 판단할 수 있는 최소한의 범주를 상실하게 되고 그 결과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 결과 무게나 부피 혹은 길이를 잴 수 있는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시장이 형성될 수 없듯이 어떤 교회를 참된 교회로 인정해야 할지에 관한 객관적인 기준이 없어 결과적으로 보편적 교회의 일체성은 불가능하게 되고 만다고 그는 판단했다.

칼빈이 “참된 교회의 표지”라고 할 때 “참되다”는 말은 이상적이고 비가시적인 교회의 수준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가시적 교회의 수준을 가리키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만일에 가시적 교회의 표지가 분명히 있다면 다른 어떤 도덕적 결점이나 필수적이지 않은 어떤 교리의 차이가 있는 경우라도 그 곳에 교회가 존재한다고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말씀의 선포와 성례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에 거기에는 반드시 열매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개인을 권징할 때도 그래야 하지만 특히 개교회를 판단할 때는 특히 교회의 일체성을 저해할 위험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3 교회의 일체를 위한 기능

권징을 교회의 표지로 인정하든지 혹은 하지 않든지 간에 상관없이 권징에 관한 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동의했던 점은 그것은 교회의 본질이 아니라 교회의 일체성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한 수단적 원리로 보았다는 점이다. 권징에 관한 칼빈의 견해와 관련하여 우리는 무엇보다 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떠한 사회도, 아무리 적은 가족이라도 권징이 없이는 적절한 상태를 유지할 수가 없으니, 가능한 한 질서는 잘 유지해야 할 교회로서는 더욱더 권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도리가 교회의 영혼이듯이 권징은 몸의 지체들을 하나로 묶어서 제자리를 지키도록 해 주는 근육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권징을 제거하기를 바라거나 아니면 권징의 회복을 방해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하든 고의적 하든 간에. 궁극적으로 교회를 와해시키는 일에 일조하고 있는 셈이다. 각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대로 행하도록 허용된다면 대체 교회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나 교리를 전하는 일 외에 사사로운 훈계와 교정 등 교리를 유지시켜 줄 수 있는 일종의 보조기능들을 덧붙여서, 그 가르쳐진 교리가 헛되이 되지 않도록 하지 않으면 결국 그런 일이 일어나고 마는 것이다.

위에서 드러나듯이 칼빈은 교회의 실천적 기능으로서의 권징은 가시적 교회에게는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권징이 교회의 기능으로서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가시적 교회의 속성과 한계 때문이다.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시행되는 가시적 교회는 언제나 불완전할 뿐 아니라 도덕적 역사적 한계 안에 있다. 그러나 비가시적인 교회는 참된 교회이고 반면에 가시적인 교회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참된 교회가 아니라는 식의 잘못된 구분은 개혁주의 전통에서 결코 지지된 적이 없다. 가시적 혹은 비가시적 교회는 서로 다른 두 개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교회의 두 양상일 뿐이다. 가시적인 교회와 비가시적인 교회는 하나의 연속적 흐름 안에 있는 단일한 교회가 역사와 종말이라는 대조적인 두 시기에 갖는 서로 다른 양상을 대변하고 있는 것뿐이다. 따라서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정도와 상태의 차이를 나타낸다.

가시적 교회는 역사적 교회로서 불완전한 상태에 머물고 있는 교회이다. 이 교회에는 언제나 늑대와 가라지 그리고 염소가 섞여 있을 수가 있고 죄의 오염으로 인한 문제를 갖고 있는 교회이다.

이 교회에는 그리스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그저 이름과 외양뿐인 많은 외식자들이 뒤섞여 있다. 야심을 가진 사람들과 탐욕스러운 자들, 쟁투를 일삼는 자들, 악담하는 자들, 그리고 생활이 매우 부정한 자들이 거기에 많이 섞여 있는 것이다. 이런 자들이 일시적으로 용납되는데 이는 유능한 재판기관을 통해서도 이들의 죄상을 책벌할 수가 없기 때문이요 혹은 철저한 권징이 언제나 합당하게 정상적으로 시행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들이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과 공존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가시적인 교회이다. 이로 인해 가시적 교회는 언제나 죄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칼빈도 인정했듯이, 가시적인 교회가 완전하고 이상적인 영광의 상태로 돌입하기까지는 결코 실제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이들과 이들의 은밀하고 교묘한 악행을 완전히 근절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적으로든 혹은 공개적으로든 알려진 교회의 일원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엄중하게 책벌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방치한다면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갈 5:9) 결과를 피하지 못할 것이요 그 결과 교회의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에게도 수치가 돌아갈 것이다. 이런 이유로 교회의 권징은 이상적인 완전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가시적 교회가 갖는 필수적 기능인 것이다.

만일에 권징의 시행이 완전히 중단된 교회가 있다면 칼빈이 말한 대로 그 결과는 교회의 와해라고 보아야 한다. 부써(Bucer)의 말대로 권징이 없으면 교회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칼빈주의 전통에서 교회의 본질은 아니지만 참된 교회의 표지로서 권징을 포함한 것은 권징의 교회론적 의의를 보다 진지하게 인식한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