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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회 역사이야기
교단교권이 무너지면 신학도 무너진다 [2]
장로회신학교와 교단의 교권, 교단신학의 정통보수주의 회복
기사입력: 2013/04/27 [20:57]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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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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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 는 100년이란 역사가 이어져왔다.
   선배들의 정통보수신학, 개혁신학을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한 그 열정과 헌신은
   오늘의 거대한 교단으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현재 본 교단은 이러한 역사적인 정통성과 교단의 신학적 입장과
   정체성을 상실한체 혼란이 거듭되고 있다.
   이제 본 교단의 역사적인 개혁신학은 한물간 고리타분한 박제된 신학으로
   평가절하 하며 오직 복음주의를 내걸고 교단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있다.
   예장합동 교단, 이제 머지않는 장래에 정통신학과 역사적인 개혁신학은
   무너질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
   이제 제98회 총회는 교단의 교권을 바르게 세워야 한다.
   그 이유는 교권이 바르게 살아있을 때 신학과 신앙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리폼드뉴스>는 과거 한국장로교회 역사를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함께 고민해 보기를 원한다.

     <리폼드뉴스 편집부>

 
 
 
 
 
 
 
 
 
 
 
 
 
 



해방이후 남부총회는 교권을 가진 자유주의신학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 남부총회에서 조선신학교를 총회의 직영신학교로 인준했다는 것은 이미 조선신학교가 자유주의 신학의 본거지가 된 것을 의미한다.

조선신학교에서 51인 신앙동지들은 정통보수신학을 주장하며 자유주의 신학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1947년 5월 퇴학 처분을 당했다. 그해 9월 23일에 박형룡 박사가 만주 동북신학교를 그만 두고 귀국하여 그해 10월 14일에 고려신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자유주의 신학으로 인해 조선신학교를 그만 둔 51인 학생들 중 34명은이 고려신학교에 편입하게 되었다. 부산 중앙교회당(노진현 목사 시무)에서 박형룡 박사의 고려신학교 교장 취임식이 거행되었고 이날 박윤선과 한부선 선교사는 정식 교수로 취임하였다.

▲박형룡 박사
박형룡은 “사도적 신학소론(神學小論)”이라는 제목으로 고려신학교 교장 취임사를 하였다. 그는 취임사에서 정통신학의 핵심과 사도적 신학의 확립을 역설하였다.

박형룡 박사를 따르는 ‘신앙동지회’는 출옥성도들로만 구성된 고신파를 중심으로 한국장로교회의 보수신학을 지키겠다고 해서 고려신학교에 적을 둔 것은 아니었다. 총회의 직영신학교로 인준을 받은 좌경화 된 조선신학교로는 더 이상 총회의 정통보수신학을 지킬 수 없었다는 것을 인식했다. 당시 상황에서는 고려신학교 밖에는 대안이 없었기에 고려신학교를 통해 보수신학을 견지해 나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고려신학교로도 총회 신학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했다. 기존의 총회를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총회를 만들려고 하는 상황 속에서 박형룡 박사와 그를 따르는 신앙동지회로서는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 되었다.
 
이 같은 역사적 상황 속에서 신앙동지회는 박형룡 박사로 하여금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할 것을 촉구하였다. 신앙동지회 소속의 정규오 목사는 박형룡 박사와 1947년 12월부터 1948년 2월말까지 전국을 순회하며 총회의 직영신학교로서 강력한 정통보수신학교가 설립되어야 할 필요성을 홍보하였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내에서 정치적 교권을 형성하며 교단 정치의 최전선에서 교단의 정통보수신학의 정체성을 확립하며 계승하기 위해 박형룡 박사와 그를 따른 신앙동지회가 앞장섰다. 박형룡 박사가 만주 동북신학교를 그만 두고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는 그 순간부터 박형룡의 뒤에는 언제나 신앙동지회가 있었다. 

▲남산 장로회신학교 개교식 (1948년 6월 3일) © 리폼드뉴스 자료실 
 박형룡 박사가 신학교에서 교단의 정치적인 도움이 필요할 때이면, 신앙동지회는 항상 전면에 등장하여 도움을 주었다. 신학자와 교단 정치권력이 서로 유기적으로 도움을 주고받았기에 교단 내 정통신학의 보수가 가능하였다. 그러다보니 신앙동지회가 교권을 위한, 교권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로 비춰졌을 수도 있었겠지만 교권을 위한 그들의 투쟁은 박형룡 박사와 함께 정통보수신학을 지키기 위한 열정으로 승화되었다.

결국 박형룡 박사는 1948년 5월 27일 고려신학교를 사임하고 서울로 올라와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박형룡 박사와 전국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을 반대하고 보수신학 편에 서 있던 교계인사들과 신앙동지회는 서울에 강력한 정통보수신학을 표방하는 신학교를 세우기로 합의하였다.
 
그래서 박형룡 박사중심의 보수신학을 교육하는 신학교가 문을 열게 되자 김재준 박사 중심의 자유주의 신학을 교육하는 조선신학교를 거부한 사람들과 옛 평양신학교에 재학했던 학생들, 그리고 부산 고려신학교에 다니다가 박형룡 박사와 함께 올라온 신학생들이 몰려들었다.

1948년 6월 3일에 109명의 편입생으로 개교하여 한 달 만인 7월 9일, 제1회 2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다. 이 졸업생들은 이미 조선신학교와 고려신학교에서 3년의 과정을 거의 마쳤던 학생들이다. 신앙동지회 회보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북한에 있는 평양신학교는 적마(赤魔)의 손에 닫히고 남한에 있는 신학교는 소위 위대한 신학자 자신의 머리와 이를 우상화한 진보적 신학도들의 손으로 말소되고 말았다. 이에 진리를 사모하고 성경을 지키며 바른 신앙을 보호하고 지키려는 열열한 전국 성도들의 손으로 칼빈주의 장로교 정통신학을 보호하고 지켜 계승하려는 신학교가 설립되었으니 이것이 곧 대한민국 한 가운데 우뚝 솟은 남산 왜신당(倭神堂) 무너진 자리에 세워진 장로회신학교인 것이다.”

총회 신학대책위원회는 1948년 5월 장로회 신학교의 개교를 결정하고 박형룡을 임시교장으로 해서 1948년 6월 3일 장로회신학교를 개교하게 된다. 이미 앞서 1948년 4월 19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모인 제35회 총회는 즉석에서의 투표를 통해 장로회신학교 승인 청원건을 52:37로 총회가 직영하기로 가결했다. 여기서 장로회신학교 승인을 반대한 37표는 조선신학과와 관련된 교권이다.

▲신앙동지회 제2회 수련회(1953)     © 리폼드뉴스 자료실
총회는 고민에 빠졌다. 총회 직영의 이름으로 서로 하나 될 수 없는 신학교가 총회 산하에 둘(조선신학교, 장로회신학교)이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장로회신학교 학생들은 이미 조선신학교에서 가르친 자유주의 신학에 반기를 들고 나온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이제 양신학교는 해체 아니면 합동의 기로에 서게 된다.

1951년 5월 25일 오후 2시에 부산 중앙교회에서 속회된 제36회 속회총회에서는 노회 수의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총회가 개회되기 전 신학교 문제 특별위원회가 모여 의논한 내용인 양 신학교의 총회직영 취소와 새로운 총회직영신학교의 신설을 위한 과도이사선정의 안건이 총회 본회에서 53:3이라는 압도적인 표로 가결하였다.
 
장로회신학교는 보수신앙을 가지고 있던 총회의 인사들은 물론이고 미국 남북장로교 선교사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1948년 6월 3일 남산에 세워진 장로회신학교의 정통성은 1952년 9월 18일 대구에서 새로운 이름인 총회신학교로 개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방후 총회와 교단직영신학교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교권이 남부총회 때에는 교단과 신학교가 자유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갔지만 그 이후 총회와 신학교는 정통보수주의자들의 손에 넘어왔다. 교단의 교권이 직영신학교의 신학적 입장과 그 성향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명해 주고 있다.

총회의 교권이 무너지면 총회의 직영신학교의 신학이 무너지는 현실을 목도한 것이다. 따라서 총회의 교권과 총회직영신학교는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유주의신학의 선봉에 선 자들이 교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에는 교단과 신학교는 자유주의신학의 전당이 된다. 반대로 정통보수신학을 위해 선봉에 선 자들이 교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에는 교단과 신학교는 정통보수신학의 전당이 된다.

해방직후부터 1950년대 초까지 우리 교권은 자유주의신학을 목회이념으로 삼고 있는 자들과 정통보수신학을 목회이념으로 삼고 있는 자들 간의 대결국면이었다고 한다면 지금의 우리 교단은 복음주의자들과 개혁주의신학을 갖고 있는 자들 간의 대결국면이 돼 버렸다. 본 교단이 복음주의신학 노선이냐, 개혁신학의 노선이냐고 물을 때 상당한 인사들이 심정적으로 복음주의신학 노선이라고 답한다는 사실이 본 교단 정체성을 혼란케 하고 있다.

▲51인 신앙동지회 회장 정규오 목사와 필자(소천 2년전의 기념)     © 리폼드뉴스
교단의 직영신학교에서 교수가 “나는 복음주의자”라고 하면서 복음주의신학을 본 교단과 교단직영신학교에서 집대성하고 있어도 신학교에서는 처리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사립학교법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소속된 노회를 통해서 통제하고 검증하고, 심지어 교단의 목사직까지 다시 거론해야 할 형편이 되었다.
 
우리는 미국장로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1811년 미국장로교회의 “프린스톤신학교 설립계획”에 의하여 1812년에 개교한 프린스턴신학교는 1929년까지 전통학파인 구학파의 칼빈주의 정통신학의 역사적 전통을 지키는 미국장로교회의 유일한 신학교였다.

유니온신학교가 자유주의 신학으로 전락한 뒤에도 프린스턴신학교는 보수적 신학 입장을 견지하여 왔으며 그 시초부터 구학파의 신학적 본산으로써 그 특별한 설립 목적을 지키려는 교수들에 의하여 유지되었다. 그러나 프린스턴신학교는 1920년에 들어와서 신학적 분위기가 서서히 변하기 시작하였다.

미국 북장로교의 신학 노선이 현대주의화에 따라 직영신학교인 프린스턴 역시 그 조류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북장로교에서는 신학파(New School) 신학교들이 점진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을 교단으로 끌어들였으며 그리고 나서 교단 자신이 그것을 가지고 프린스턴신학교를 무너뜨렸다.

자유주의 신학 입장을 따르는 어번선언에 동조하는 이사들이 참여하는 새로 개편된 단일 이사회 체제 아래 더 이상 보수적인 신학 입장을 고수할 수 없음을 판단한 메이첸은 23년간 봉직한 프린스턴을 드디어 떠나기로 결심하고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신학교를 1929년에 그를 따르는 교수들과 함께 세웠다.

미국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교단 역시 이러한 과정을 경험해 왔다. 교단의 교권이 무너지고, 신학이 무너진다. 그 잘못된 교권이 직영신학교에 침투하여 학교를 무너뜨린다.

이제 제98회 총회는 교단신학의 정통성, 정체성회복과 교단직영신학교의 신학적 정체성을 살피고 검증해야 한다. 금년 9월에 제98회 총회를 앞두고 8월이면 교단의 직영신학교인 총신대학교 제5대 총장을 선출한다. 이제 정말 개혁신학자를 총회직영신학교의 총장으로 선출해야 한다. 현 총신대학교에 교단을 대표할 수 있는 개혁신학자는 누구인가?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 없다고 말해야 하는가?” 그것이 고민이다.

소재열 목사 / 한국장로교회사(P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