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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목사 성경 산책
김길성 교수, “누가 교회의 일치를 깨뜨렸는가?”
기사입력: 2011/09/18 [21:50]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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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성 교수, “누가 교회의 일치를 깨뜨렸는가?” 「신학지남」 여름호 (2011년)


총신대 신학대학원장 겸 부총장 김길성 교수가 2011년 여름호 「신학지남」에 현재 한국교회의 중요 이슈가 되는 W.C.C.에 관한 글을 게재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해서 실어 보도록 하겠다.


한국교회와 W.C.C.(the World Council of Churches)와의 관계는 1948년 8월 22일부터 9월 4일까지 화란의 암스텔담에서 열린 1차 창립총회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에 한국기독교협의회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정치부장 김관식 목사와 청년대표 엄요섭 목사, 감리교 대표 변홍규 목사를 옵서버로 참석케 하였고, 김관식 목사의 귀국보고를 받고 장로교는 W.C.C.에 가입하였다. 그 후 1954년 미국의 일리노이 주 에반스톤에서 열린 2차 총회에는 한국의 장로교 대표로 명신홍 박사, 김현정 목사가 참여하였고, 1961년 인도의 뉴델리에서 열린 3차 총회에는 기장측은 가입하였고, 통합측은 3차, 4차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1975년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열린 5차 총회에는 한국대표로 김활란, 강원용, 길진경, 김길창, 박상증, 오재식등이 참여하였다.

한국에서는 통합, 기감, 기장, 한국성공회 등 4개 교단이 정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W.C.C.의 신하단체로 통합, 기장, 기감, 기하성,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구세군대한본영, 성공회, 정교회한국대교구 등 8개 교단이 가입했다.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출발은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리스도 중심, 복음중심보다는 진리를 제쳐놓고 연합과 일치에 무게를 두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19C 말 미국 전역과 유럽을 휩쓸었던 일련의 부흥운동은 다수의 단체들을 탄생시켰다. 기독청년회, 복음주의연맹, 기독여성청년회, 세계기독학생회등이 있었다. 1910년 에딘버러에서 열린 1910년 세계선교대회는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시작으로 간주된다. 이 대회의 목적은 세계를 복음화 하기 위해 다음 단계들을 계획하는 것이었다. 주요 지도자는 존 모드(John E. Mott)와 조셉 올뎀(Joseph H. Oldham)이었다.

이 대회에서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와 ‘생활과 사역을 위한 보편적 기독교 협의회’는 화란 암스텔담에서 창립된 세계교회협의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1961년 국제선교협의회를 병합하면서 세계교회협의회는 선교, 사회문제, 교회의 일치를 표방하는 세계적 선교기구가 된 것이다. W.C.C.는 1948년 화란 암스텔담에서 창립총회를 한 후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2차, 1961년 인도 뉴델리에서 3차, 1968년 스웨덴 웁살라에서 4차, 1975년 케냐 나이로비에서 5차, 1983년 캐나다 벤쿠버에서 6차, 2006년 브라질 포르토 알레그레에서 9차 총회를 가졌고, 2013년 대한민국 부산에서 10차 총회를 가질 예정이다.

W.C.C. 신학과 관련하여 이 운동을 주도하거나 동조한 사람들 중에 복음주의자들도 있으나 W.C.C.를 있게 한 단체나 기구의 지도부를 구성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유주의 신학과 신앙을 가진 이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 4차 세계대회인 몬트리올회의(1963) 보고서(제목: ‘성경, 전통, 전통들’)에 따르면 “우리는 복음의 전통(즉 복음선포 kergma의 전승 paradosis)에 의해 기독교인으로서 존재한다(단락 제 45번). 그러나 본래적으로 그리고 단독으로 존재하는 전통은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말하고, “성경은 말하지만 그것의 초기 단계에서 기록되어진 전통이다.”고 표현한다. 이 보고서의 중요성은 성경과 전통이 두 개의 독립적 실체들이 아니라는 인식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성경과 전통)는 너무 얽혀 있어 그것들 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권위 있는 것으로 사용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성경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종교개혁의 기치를 벗어난 주장이다. 이는 기록된 성경과 전통을 동시에 강조하는 로마가톨릭 신학자들과의 대화를 위한 기초를 작업으로 간주될 수 있다.

또 로마가톨릭교회와 루터교 세계연맹에서는 칭의의 교리 공동선언(1999)을 통해 칭의 문제에 관한 한 16C에 있었던 상호정죄를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하였고 2006년에는 세계감리교회협의회 19차 총회에서 이 문서에 서명하였고, 2007년 한국에서 열린 감리교대회에서 감리교회가 동의하였으며, 이를 W.C.C.에서 적극적으로 수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구원에 있어 인간의 공로를 강조하는 로마교회에 대항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도리를 선포하는 종교개혁의 기치가 분명하다. 그런데 이제 로마교회가 받아들인 칭의교리를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종교개혁의 원리에서 어긋날 뿐만 아니라 비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1959년 총회분열의 중심에 W.C.C. 문제가 있다는 것은 역사가들이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분열의 조짐은 이미 193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1930년 감리교회에서 한국선교 희년을 기념하여 󰡔아빙돈 단권성경주석󰡕을 번역 출판하였는데 이 주석에 장로교 목사 몇이 참가했다. 그 중에 한경직 목사, 김재준 목사가 함께 관여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총회에서 조사를 명했을 때 한경직 목사는 피의자의 자리에 서고, 박형룡 박사는 조사위원의 자리에 있게 되었다. 1953년 기장이 분열하기 전, 한경직 목사는 조선신학교에서 김재준, 송창근 목사와 함께 교수하는 일에 동참했다. 한경직 목사는 복음주의 신앙을 가졌으나 진보적인 인사들과 계속 교제하고 협력해 왔다. 1959년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찬동하고 통합측 분리를 주도한 인물이 되었다.

박형룡 박사는 1930년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해서 당시 자유주의 신학과 잘못된 현대신학에 대항하여 한국교회가 보전해야 할 칼빈주의 정통신학의 기초를 확고하게 다지신 분이다. 박 박사는 성경적인 에큐메니즘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가 반대한 것은 W.C.C.에서 추구하는 비성경적인 에큐메니즘, 즉 한국교회의 하나됨에 해가 되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한 것이다.

박형룡 박사는 평양신학교의 신사참배 반대로 문을 닫은 후에 중국에서 가르치다가 1947년 귀국하여 고려신학교에 몸 담았으나 1948년 고려신학교를 떠나 서울로 온 것은 바로 교회의 하나됨을 구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박형룡 박사가 1951년 12월 25일 고신측 지도자들을 향해 호소한 말에서도 교회의 하나됨에 대한 그의 생각과 열망을 볼 수 있다. 박형룡 박사는 교회의 일치를 사모한 신학자였으나 장로교회가 W.C.C.에 남아있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러 교회가 잘못된 신학에 휩싸이거나 끌려가는 것보다는 그 신학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W.C.C.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고 교회를 지로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195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42회 총회록을 보면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의 보고서에 위원회의 입장을 말하되, “찬성과 협조를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과거에나 현재에도 참가하고 있으니 계속 참가하기로 하며 단일교회를 지향하는 운동에 대해서는 반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듬해 1958년 대한예수교장로회 43회 총회는 “국제적인 교제와 사업에 관해 우리 교회와 신앙처지에 손상이 없도록 한다”고 결의하였다. 그리고 1959년 44회 총회는 W.C.C. 문제로 총회장이 정회를 선언한 후 연동측이 속회를 기다리지 못하고 이탈(9월 29일 속회)하는 아픔이 있었고, 합동측은 정해진 날짜에 총회를 속회(11월 23일)하여 “W.C.C.를 영구히 탈퇴하고 소위 W.C.C.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기로” 결의하였다.

박형룡 박사의 W.C.C.에 대한 입장은 통합측이 분리되기 1년 전 「신학지남」에 발표된다. 박 박사의 견해 표명과 장로교회는 W.C.C.에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의 그룹이 극명하게 나뉘게 되었고, 견해를 달리하는 두 그룹은 이후 서로 총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문제를 두고 대치하였다. 결국 1959년 9월 28일 대전에서 열린 44회 총회는 W.C.C. 문제로 양분된 두 파의 세력 간의 치열한 다툼으로 이어졌고, 마침 경기노회의 총대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두고 격돌하게 되었다. 당시 총회장 노진현 목사는 증경총회장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을 숙의해 줄 것을 제의하고 증경총회장들의 제의에 따라 11월 23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속회하기로 정회하였다.

이후 총회의 결정에 불만을 품은 회원들이 다음날 아침 특별열차를 타고 서울로 와서 연동교회에서 전필순 목사의 사회로 단독 속회를 열었다. 이 모임이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44회 총회의 결의대로 11월 23일에 서울 승동교회에서 총회속회를 기다리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예정대로 정회된 총회가 11월 23일 승동교회에서 속회되었을 때 연동측 총대들은 불참하고 소위 합동측 총대들만 참석하게 되었다.

연동측 총대들은 이날 새문안교회에서 한경직 목사의 사회로 총회를 열었다. 그래서 고신(1946)과 기장(1953)의 분열 후 다시 통합(1959)이 분열하는 역사적 아픔을 갖게 되었다. 1959년 총회 분열의 중심에 W.C.C. 문제가 있다는 것은 역사가들이 증언하고 있다.

1901년 평양에서 시작한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총신대학교는 올해 110주년을 기념하게 되었다.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로 나라 잃은 슬픔을 맛보았고, 다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이를 거부하여 폐교한 1938년까지 평양신학교는 칼빈주의 보수정통신학을 가르쳤고, 학교가 폐교한 후 일제의 허락을 받아 설립된 조선신학교(1940)의 신학적 노선에 반대하여 고려신학교(1946)가 독자노선을 취한 것은 총회적 차음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장로회신학교 설립(1948)으로 폐교 전 평양신학교의 신학전통을 이어가게 되었고 다시 조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가 해체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가 정식으로 총회직영신학교로 출범하게 되었으며 조선신학교는 신학적 자유주의 노선을 고집하여 기장을 세우기에 이르렀다(1953). 그 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는 W.C.C.에 대한 범교단적 입장의 차이로 W.C.C.에 찬동하는 통합측이 분열(1959)하는 아픔을 맛보았고, 이 분열로 합동측 교단은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교세도 통합에 비해 매우 열악했고, 교회도 매우 미약하게 출발했다. 이후 분열에서는 신학적, 교리적 문제보다 오히려 행정적, 교권적 문제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후학들에게 남겨진 커다란 짐이다.

이런 중에도 다행한 것은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측)은 2005년에 그동안 26년 동안 헤어져 있었던 구 개혁 측 가족들을 다시 맞아들여 하나가 되었고, 한국의 기독교 역사상 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좋은 선례를 남기게 되었다. 현재 합동측은 해외선교사 파송에 있어서도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만 천 교회가 넘은 교회를 가진 교단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제 한국장로회는 W.C.C. 이전의 역사적 개혁주의 전통을 지켜온 신학과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일치와 연합은 진리 안에서의 연합이요 우리는 성경적 에큐메니즘을 반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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