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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삼위일체론 비판
신사도 운동의 삼위일체 교리는 성령론에 치우쳐 있다. 그런데 이들의 성령론은 매우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다. 마치 오늘날은 성령의 시대이고 성령만 역사하시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보다는 성령만 부르짖고 성령만 찾는다. 이것이 바로 변질된 삼위일체론이고 성령론이다. 초대교회 역사에서도 이런 이단자들이 등장했다. 일명 시대론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시대는 성부가, 신약시대는 성자가, 교회시대는 성령이 사역하신다는 것이다. 교회 역사를 보면 이런 이단 사상은 반복해서 등장했고 정통교회는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이런 극단적 성령론은 가정을 파괴하고 교회를 병들게 하고 파괴한다. 개인의 성령 체험을 강조하며 성령의 은사를 추구한다.
김재성 박사는 한국교회가 성경적 성령론을 따르지 못한 이유는 한국교회에서 성령론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성령론보다는 귀신론에 더 민감했고 친숙하였던 정서 때문이라고 보았다. 한국 정서상 귀신론에 대한 이해는 더 친숙했다. 조상들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는 사상이 만연했다. 이런 틈을 파고든 것이 이단 사상이고 극단적 성령론이다.
그래서 성령론하면 성령의 은사만 신경 쓰게 된다. 마귀 축출, 병 고침, 계시, 환상, 방언, 예언, 꿈 등이 성령을 대신한다. 체험적 신앙 위주로 성령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성령론은 인간 중심적, 체험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성령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신학교의 책임도 있다. 신학교에서 성령에 대해 바르게 가르치지 않고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성령에 대해 어려워하고 가르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에 대해서는 목회자나 신자들이 모두 체험 중심으로 치우치게 된 것이다(김재성, 「개혁주의 성령론」, 55).
또한 성령에 대해서 한국교회가 잘못 알게 된 원인은 교회성장학, 교회부흥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부흥회, 성령집회를 해마다 곳곳에서 열었다. 그러나 성령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하고 오직 체험에 근거해서 성령을 배우고 이해했다. 여기에 피터 와그너(P. Wagner)의 교회성장학과 신사도 운동, 빈야드 운동이라는 신비적 운동들이 들어오면서 성령론은 더욱 오염되고 말았다.
고신대 박영돈 교수는 성령을 얼굴 없는 인격이라고 표현한다(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운동」, 76). 성령은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 하나님처럼 얼굴을 드러내고 역사하는 분이 아니다. 얼굴을 감추신 신비한 인격이시다. 따라서 성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를 이해하고 성경을 이해해야 한다. 성령은 삼위 하나님과 인격적 연합과 교제를 나타내신다. 성령은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신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우리를 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하신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성령을 단지 성경 밖에서 그리스도 밖에서 찾으려 할 때 성령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성령에 대해 오해하고 성령이 아닌 것을 성령으로 착각하게 된다.
(1) 삼위의 존재론적 측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나 삼위로 존재하신다. 따라서 이것을 하나님의 존재론적 측면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신적 본질(essentia)에서는 동일하시며 완전히 동등하시고 동일본질로 존재하시며 단 하나의 실체이시며 동일한 속성을 가지신다(Bavinck, 「개혁교의학 II」, 356).
서철원 박사는 아담과 맺으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정을 설명하면서 삼위 하나님을 소개한다(서철원, 「하나님의 구속경륜」, 24).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함께 칭의를 이루신다. 칭의의 사건은 동일 본질 안에 계신 하나님의 일체적 속성을 만족시켜야 하는 문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반역이 인간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켰다.
그래서 아담과 언약을 체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언약의 주권자가 되시어 전지와 전능으로 아담을 책임지셔야 하는 이유에서 그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셔야 했다. 이 언약의 주권적 성취로 인해 인류의 죄책은 해결될 것이고 이것을 삼위일체 하나님이 직접 이루실 것이다.
(2) 삼위의 사역적 측면
또 하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적 측면을 알아야 한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을 중보자로 세우시기로 영원 작정하셨다. 그 작정 안에서 택자들에게 구원을 주시기로 협약하신 것이며 성자는 자신이 성육신과 구속의 사역을 통해 아버지의 언약의 보증이 되고 친히 언약을 세워 언약의 설립자가 되기로 하신 것이다(서철원, 「기독론」, 20).
칼빈(Calvin)은 삼위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성경이 말하는 구별은 다음과 같다. 곧 성부는 일의 시작이 되시고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요 계획이시며 만물의 경륜이라 하였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작용이 돌려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실로 하나님은 지혜로 권능을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으시며 또 영원에 있어서는 먼저니 나중이니 하는 것을 찾아서는 안되기 때문에 성부의 영원성은 또 성자와 성령의 영원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부가 먼저 생각되고 다음으로는 성부로부터 성자를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을 생각하게 될 때에 삼위의 순서를 고찰하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Calvin, 「기독교강요」, 1.13.18)
(3) 성령의 인격성과 사역(요 14-16장)
성령은 성부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로부터) 영원 발출하신 하나님이시다. 이를 필리오케 교리라 한다. 서방교회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영원 발출하셨다고 했다. 이를 필리오케(Filioque)라고 한다. 그러나 동방교회는 성령이 성부에게서만 영원 발출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성부와 성자, 성령은 모두 동등하시고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성령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를 믿도록 역사하신다. 그분이 역사하시는 방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사역이다. 따라서 성령은 말씀을 떠나 다른 것으로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다. 요한복음 14-16장은 성령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증거하신 내용이다. 이 내용이 성령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는 길이다.
요 14: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실 때가 다가오자 제자들에게 거처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했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이미 세상에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다(요 14:2).
이것은 이 세상의 집, 요셉의 집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집 즉 천국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처를 예비하면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다. 이것은 재림을 말씀하는 것이다(요 14:3). 그러자 도마가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라고 했다(요 14:5). 예수님은 자신이 길과 진리, 생명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올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다(요 14;6).
①다른 보혜사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구한다고 하셨다. 다른 보혜사를 주사 영원토록 함께 있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한다(요 14:16). 다른 보혜사라는 말은 오실 보혜사 말고 이미 와 있는 보혜사가 있다는 의미이다. 이미 와 있는 보혜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보혜사(παράκλητος)라는 말은 ‘돕는 자, 중재자, 변호사, 위로자’라는 의미이다(Kittel &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TDNT), v.5.800).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혜사 즉 중보자, 위로자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그분이 다른 중보자, 위로자를 보내신다는 약속이다. 그분이 성령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동등한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삼위일체라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제 구체적으로 성령에 대해 말씀한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
②진리의 영
또 예수님은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다(요 14:17). 원문은 ‘그 진리의 그 영’(τὸ πνεῦμα τῆς ἀληθείας)이라고 되어 있다(Novum Testamentum Graece, 28 Edition, John 14;17). 여기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고 소유격으로 되어 있어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을 성령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 성령은 세상이 능히 받지 못한다. 받을 수가 없다. 성령은 아무에게나 오시지 않는다. 성령은 오직 하나님께 택함 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 전에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엡 1:4-6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들은 성령을 안다. 성령이 그들과 함께 거하시기 때문이다. 또 그들 속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다(요 14:17). 여기 “거하심이요”(μένει)라는 단어는 현재형이다. 따라서 계속적 의미를 가진다. 잠깐 들렀다가 떠나는 분이 아니라 영원히 거주하신다는 의미이다. 원래 이 단어는 ‘거주하다, 계속해서 살다’는 의미이다(Kittel &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TDNT), v4.574). 그런데 현재형으로 쓰인 것은 성령이 성도들 속에 영원히 거주하신다, 계속해서 살고 계신다는 의미이다.
또한 뒤에 나오는 “계시겠음이라”(ἔσται)라는 단어는 미래형이다. ‘계실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우리 성경은 “속에”라고 번역했는데 이 단어는 원문에 엔(ἐν)이라는 전치사이다. 이 전치사는 ‘-안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Kittel &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TDNT), v.2.537). 즉 성령이 성도들 안에 내주하심을 증거하는 단어이다.
③성령의 가르치는 사역
예수님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성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한다(요 14:26).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보혜사는 앞에서 말씀한 바로 그 성령이다. 그런데 그 성령을 아버지께서 보내신다고 말씀한다. “보내실”(πέμψει)이라는 단어는 미래형이다. 그래서 ‘그가 보내실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사실 이 단어는 ‘파송하다, 보내다’라는 의미를 가진다(Kittel &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TDNT), v.1.398).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즉 성자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내실 것을 말씀하는 것인데 그분이 성령이라는 것이다.
그분의 사역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는 사역을 하신다. ‘가르치다’(διδάσκω)는 단어는 ‘가르치다, 알리다, 설명하다’는 의미이다(Kittel &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TDNT), v.2.135).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 단어가 미래형(διδάξει)으로 쓰였다(Novum Testamentum Graece, 28 Edition, John 14:26). 그러므로 이것은 성령께서 앞으로 오셔서 하실 일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성령께서 자세히 가르쳐주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 가르쳐주시는 방편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이다. 성령을 통해 깨닫고 이해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생각나게 하리라”(ὑπομνήσει)는 미래형이다. ‘그가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라는 뜻이다. 원래 이 단어는 ‘기억하게 하다, 생각나게 하다, 기억을 떠오르게 하다’는 의미이다(Kittel &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TDNT), v.1.348).
성령의 사역은 단지 은사적 부분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성령의 은사는 궁극적 사역이 아니라 부수적 사역이다. 성령의 궁극적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고 깨닫게 하시는 사역이다. 그래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것이다.
④성령의 깨닫고 책망하시는 사역
요 16:7-12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성령의 다른 사역은 깨닫게 하시는 사역이다. 예수님은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가 무엇인지, 하나님을 아는 길이 무엇인지, 구원받는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누군가는 알려주어야 하고 깨우쳐주어야 한다.
그것을 계시인 성경이 한다. 그 성경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다. 책망한다(ἐλέγχω)는 말은 ‘훈계하다, 죄를 깨닫게 하다, 책망하다, 꾸짖다’는 의미이다(Kittel &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TDNT), v.2.473). 성령이 죄, 의,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고 책망하시는 역사를 하신다. ⑤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사역
요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다음으로 성령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사역을 하신다. 모든 진리는 진리의 말씀, 넓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말한다. 그 진리(ἀλήθεια)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그런데 그는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고 장래 일을 알려주실 것이다. 성령은 어느 날 음성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뜻,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떠나서 스스로 말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산에 올라가서 성령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성령은 오직 들은 것을 말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성경을 통해 주신 말씀을 전해준다. 그것을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신다. 그리고 장래 일을 알려주실 것이다. 장래라 번역된 단어는 엘코마이(ἔρχομαι)로 ‘오다, 가다, 동반하다, 나타나다’는 뜻이다(Kittel &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TDNT), v.2.666). 원문은 현재분사로 되어 있어서 ‘계속해서 오는 있는 중’이라는 의미이다. “알리시리라”(ἀναγγελεῖ)는 미래형이다. 원래 이 단어의 의미는 ‘발표하다, 알리다, 보고하다, 자세히 말하다’는 의미이다(Kittel &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TDNT), v.1.51).
⑥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역
요 16: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성령은 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역을 하신다. 성령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분이 아니다. 성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낸다. “영광을 나타내리니”(δοξάσει)는 미래형이다. ‘그가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라는 의미이다(Kittel &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TDNT), v.2.253). “알리시겠음이라”(ἀναγγελεῖ)는 ‘발표할 것이다, 보고할 것이다, 자세히 말할 것이다’라는 뜻이다(Kittel &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TDNT), v.1.61).
신사도 운동은 성령을 강조하고 성령을 높인다. 성부와 성자는 사라지고 없다. 그들의 강조점은 오직 은사를 주시는 성령의 사역만 강조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론은 성령이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영광을 취하는 분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역을 하신다. 구원을 완성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계속) <저작권자 ⓒ 리폼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기사 내용에 특정된 개인이나 관련 교회가 반론을 요구할 때 재반론을 조건으로 허락할 수 있습니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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