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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전남노회가 이렇게 무너지게 할 수 없다최기채 목사, “제가 후배들을 지도하지 못한 죄를 여러분 앞에 정중하게 사과를 드립니다.”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이 되자 그해 11월에 전남교구를 폐쇄하고 1943년에 폐쇄된 전남노회를 복구하여 1942년 전남노회 제34회를 계승하여 제35회로 하기로 했다.
전남교구 제1회는 “소화 17년(일본의 소화 17년은 1942년에 해당한다) 5월 4일 오후 8시 반에 본회가 정기회로 목포 양동예배당 내에 회집”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한 후 처음 전남노회는 그해 11월 7일부터 9일까지 광주부 금정교회당에서 소집됐다. 이를 제35회 전남노회로 기록하고 있다.
“1945년 11월 7일 오후 3시에 조선기독교 장로회 전남노회 제35회가 광주 금정교회당에 회집”했다.
해방을 맞이하고 첫 노회 정기회에서 백영흠 목사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교회가 범했던 죄를 용서해 달라며 누가복음 13:6-9절 말씀을 통해 설교했다. 하나님께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며 용서를 구하는 그런 설교를 했다.
1917년 전라노회에서 전남노회와 전북노회로 분립되었다. 전남노회 제29회가 1937년 5월 7일에 회집되었다. 당시 노회장은 목포교회 박연세 목사였다. 박연세 목사는 해방 전에 4번(제19회, 제24회, 제29회, 제30회)의 노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제30회(1938) 노회에서 박연세 목사의 사회하에 신사참배 결의가 있었다. 물론 일제 강점기 시대에 노회원의 의사와 상관없이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전남노회가 폐쇄되고 전남교구(1943년) 제2대 교구장(교구장 조촌승제 목사, 조승제 목사)은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대사교위 하 황군장병의 건전한 기쁨의 투쟁과 황제의 위엄이 전 세계에 밝게 하사한 대동아 공영권의 건설의 성업을 착착 진척 하니 개미의 정성 감격감격하여 감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은 일본 기독교의 확실한 교회 운영과 관계된다”라고 했다.
개회는 전남노회 이름으로 예배를 드렸다고 회의록은 기록하면서 참석한 목사회원은 19명, 장로 총대는 5명으로 총 34명으로 개회했다. 개회선언은 전남노회 개회가 아닌 “조선기독교 전남교구회”로 개회한 후 전남교구 해산을 선언하는 절차를 밟았다. 회의록은 다음과 같다.
해산 선언 교구장 조승제 목사가 조선기독교 전남교구회가 해산됨을 정식으로 선언하다.
해방의 해 교구장은 조승제 목사였으며, 공식 명칭은 “조선기독교 전남교구회”로 기록하고 있다. 전남교구회가 해산되었음을 선언했다. 전남교구회는 일제가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1회 총회(1942)을 끝으로 해산하고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을 ‘일본기독교단’에 예속시켰다.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에 예속된 전남교구회를 해산하는 공식 선언을 한 것이다.
조승제 목사는 경상도 출신으로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의 의장이었으며 전남교구가 해산을 선언함과 동시에 전남노회 복원시켜 이를 “전남노회 제35회”로 개회를 선언하였다.
일제에 앞장섰던 조승제 목사가 전남노회 복구노회인 제35회 노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다음날 전남노회 회무시간에 임원들의 총사퇴를 결의했고 대신 전남교구 시대 일본어를 할 줄 모른다고 하여 전남교구 임원에서 배제되었던 김창국 목사가 노회장이 되었다.
따라서 제35회 전남노회는 조승제에서 김창국 목사로 이어졌다.
해방의 해 전남노회는 4개 시찰로 구성되었다. 특징은 '시찰회'가 아닌 '시찰'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헌법에는 시찰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시찰'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시찰은 각 지역으로 하여 광주 시찰, 나주시찰, 목포시찰, 강진시찰로 조직됐다.
전남노회에서 순천노회 분립(1922년), 제주노회 분립(1930년), 목포노회 분립(1947년), 개혁 측과 분열(1979년), 광주노회 분립(1996년) 등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총회 내에서 전남노회가 앞장서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기도 했다.
전남노회는 전라대리회, 전라노회의 전통과 정체성을 지키며(보수) 계승해 왔다. 광주전남지역의 신학적 전통과 교회의 정체성을 지켜왔다. 총회장까지 배출하는 제72회 총회(1987년) 김길현 총회장, 제78회 총회(1993년) 최기채 총회장을 배출했다.
그러나 이러한 교단총회의 총회장감이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이 시대는 없을 듯싶다. 전남노회는 2022-2023년에 분열이 일어났다. 하나의 전남노회가 두 개의 전남노회 이름으로 모임을 갖고 있다. 이는 두 개의 노회 모임 가운데 하나는 가짜일 수밖에 없다. 이유는 전남노회는 여전히 하나의 노회이기 때문이다.
분립하여 가짜노회를 정상적인 노회로 만들어주기 위한 작업은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다. 노회를 분립할지라도 정상화한 다음 합법적으로 해야 한다. 그 이유는 전남노회의 정통성, 법통성 때문이다. 과거 역사를 송두리째 무너지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에 총회 임원회가 불법적으로 개입할 이유가 없다. 역사적으로 전남노회가 1978-1979년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아는가? 전남노회 분쟁이 교단 분열의 한 원인이 되었던 사실을 아는가? 총회 임원회는 오해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역사의 흔적을 왜곡하면 안 된다.
이제 전남노회가 광주 전남지역의 노회 주류로 실권 노회는 물 건너 간 듯하다. 그 이유는 이 시대 전남노회를 이끌어갈 지도자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회개하며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해방 후 첫 전남노회 정기회시 성찬식을 집례한 백영흠 목사의 “하나님, 다시 한번 기회를 주옵소서”라고 설교하며 회개했던 것처럼!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교계 정치 일선에서 뒷골목에서 서성거리다가 교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질 것이다.
제93회 총회(2008년)에서 전남노회가 천서를 받지 못하여 본회에서 결정할 때 당시 전남노회 증경노회장이며, 제78회 총회(1993년) 총회장인 최기채 목사가 총대들 앞에서 눈물겨운 발언을 기억하는가?
“예, 저는 조용하고 온유한 목사입니다. 조용히 좀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까 말같이 기본권은 해결한 다음에 선거하면 더 영광스럽고 좋은 일입니다. 저는 전남노회에 은퇴한 뒤로 노회 참석도 잘 안 했습니다만, 전남노회가 아닌 개인이라도 사회법에 고소한 것은 절대로 잘못했다고 제가 취한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후배들을 지도하지 못한 죄를 여러분 앞에 정중하게 사과를 드립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분명히 천서위에서 사실이 맞지마는 전남 노회로 노회가 고발했던 말은 전혀 없고 다혈질적이고 경솔한 모 장로 개인이 고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에게 참 호소하고 싶은 것은 전남노회는 100년이 넘어간 성스러운 노회에요. 총회장을 몇 사람을 냈던 전통적인 노회예요. 우리 교단을 지키려고 얼마나 몸부림치면서 노력했던 노회라는 거 다 압니다. 그런데 저는 분명히 말씀드린 것은 만약 그 모 장로라는 분이 고소했으니까 일법 백 개 주의로 그분을 제명한다든지 그분을 엄히 총회장께서 죄를 묻는다든지 아니면 재판국을 설치해서 그분을 제재한다든지 뭐 이렇지만, 기본권인 총대 전원을 안 받아버리고 투표하는 것은 도무지 여러분들 원리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는 제주선교 100주년을 맞이해서 기장 측과 통합 측과 합신 측까지 축하 화합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이 총회인데 웬만하면 그걸 괜히 잘못하면 그 사람만 치리하고 더 용서하면 더 좋고 그 전남노회 받아주신 후에 이 투표를 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 호소합니다.”
이렇게 하여 총대권이 회복됐다. “제가 후배들을 지도하지 못한 죄를 여러분 앞에 정중하게 사과를 드립니다.” “우리 교단을 지키려고 얼마나 몸부림치면서 노력했던 노회라는 거 다 압니다.”
현 후배들은 인제 그만 싸워야 한다.
소재열 목사(한국교회사 Ph.D., 법학박사) <저작권자 ⓒ 리폼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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