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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회 역사이야기
[역사2] 총신대학교가 사당동에 세워지기까지 역사 개관
총신대는 총회가 지켜야 하는 전국 교회 재산
기사입력: 2016/03/12 [17:54]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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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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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독노회 조직 기념; 1907년 9월 17일 평양장대현교회에서 한국 최초의 노회가 조직되었다.     © 리폼드뉴스

[리폼드뉴스] 1884년 9월 20일에 최초의 선교사 알렌이 입국과 1884년 4월 5일 최초 목사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한 이래 1893년 초까지 지난 7년 동안 장로회 선교사연합공의회 산하 전국 교회는 130개처였으며, 전국의 교인은 18,081명이었다.

◈한국교회 교회성장 밑거름 사경회, 성경반 운영

1890년 6월에 중국에서 선교활동하고 있었던 네비우스 선교사를 초청하여 선교전반에 대한 강의를 듣게 되었고, 그 강의를 통해 가장 중요한 핵심가치는 ‘사경회’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러나 한국교회 초기 사경회와 함께 그 성격을 조금 달리하는 ‘성경반’이 제도화 되어 운영되었다. 이 성경반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사와 전도인(매서인)을 위한 훈련과정으로 활용하였다.

성경반은 이후 한국교회 초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회성장과 교인들을 훈련시키는 프로그램으로 정착되었다. 성경반에서는 성경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조직신학과 성경해석 등의 신학과목도 가르쳤다.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의 필요성

1900년에 이르러 마펫(마포삼열) 선교사는 오래 동안 구상해 온 신학교 설립을 구체화 했다. 조선교회는 조선인 목회자에 의해 교회가 유지되고 계속 설립되어야 한다는 ‘자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목회자 양성학교를 계획했다.

다른 선교사들은 신학교 설립이 시기상조라고 주장했지만 마포삼열 선교사는 지방 교회의 급증에 따른 불가피한 요청으로 신학교육과 교역자 양성의 필요성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 본부에 편지를 보내 “한국교회의 기적적인 확장과 이에 따른 교역자 양성의 불가피성 및 시급성”을 역설했다.

▲예수교장로회신학교(평양장로회신학교) 본관 정문     © 리폼드뉴스

아울러 그는 신학교 설립에 필요한 기금을 요청했다. 이러한 편지에 대해 미국 선교회 본부는 신학교 설립을 허가했고, 설립기금과 신학교 설립에 대한 일체의 권한을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위임했다.

1900년에 ‘신학반’에서 공부하고 있던 조사와 장로 중에서 ‘신학과’로 공부시키기로 공의회에서 채택되어 1901년에 장대현 교회 방기창, 김종섭 장로를 목사지원자로 선택함과 동시에 1901년 9월에 열린 합동공의회 영어공의회는 평양공의회의 청원건인 신학교 설립에 대한 안건을 의결했다. 1903년 1월에 공식적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를 개교했다.

◈평양에 최초로 조선장로회신학교 개교

신학교 명칭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하권)」에 의하면 학교 공식명칭은 “조선예수교신학교”였다. 그러나 1916년 최초로 나온 신학교 요람의 표지는 “장로교회신학교”였지만 속지는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들은 1907년 창립노회에서는 정식으로 “조선장로회신학교”로 결의되었다.

1906년에 이르러 이 신학교 학생수는 50명에 달했다. 이 학생중에 외국의 지원에 의해 공부한 학생은 6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한국교회의 지원을 받아 공부했다.

1891년 마포삼열 선교사에 의해 세례를 받았던 한석진(41세), 서경조(58세), 1893년에 역시 마포삼열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던 최연소자이나 최고의 학식을 가졌던 양전백(39세), 평양의 길선주(40세), 방기창(58세), 1894년 평양감사 민병석의 박해사건 때 사형선고를 받았던 자들 중에 한 사람인, 1895년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던 송인서(40세), 그리고 평양의 유명한 불량배로서 마포삼열 선교사의 선교에 폭력적으로 훼방하는 자였으나 회개하고 후일에 최초의 제주 선교사였던 이기풍 등이었다.

▲가운데 길선주 목사 왼쪽이 마포삼열 선교사이다.     ©리폼드뉴스

1908년에는 미국 시카코 맥토믹 여사가 미화 5,500(11,000원)을 기부하여 교사를 신축하여 독노회와 총회를 조직할 때 이 신축 교사에서 모였다.

◈한국전쟁시 대구에서 총회신학교 개교(1951년 9월 18일)

한국 전란중에 서울 재탈환(1951. 3. 14)이후 5월 30일 부산 광복교회에서 총회신학교 이사회(이사장 권연호 목사)가 모였다. 학교명칭을 총회신학교라고 결의했으며, 제2차 이사회(1951. 7. 25) 대구 고등성경학원에서 모여 대구에서 총회신학교를 개교하기로 하고 초대 교장으로 감부열 선교사를 임명했다.

1951년 9월 18일(화) 피난지 대구 서문교회에서 개교했다. 1951년 계속총회에서는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가 합동하기로 하였으나 여기에 장로회신학교는 응하기로 하였지만 조선신학교는 응하지 않았다. 장로회신학교 교장인 박형룡 박사는 조선신학교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감부열 선교사를 총회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1952년 1학기 학생수가 500명에 이르렀다. 1952년 감부열 교장이 안식년으로 출국하자 교장 대리에 권세열 교수가 임명되었다. 그 후 1953년 9월 2일에 박형룡 박사가 교장에 취임했다.

▲1961년 장로회 총회신학교 교장 박형룡 박사     © 리폼드뉴스

1953년 전쟁의 상황이 휴전협정으로 진행되자 총회신학교도 서울로 옮기는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어 서울로 이전하기로 했다. 대구 미 8군의 지원을 받아 신학교 물건을 화물차 두 칸을 제공받아 1953년 10월 중순경에 서울역에 도착했다.

◈대구에서 서울 남산공원 기독교박물관 및 남산 신궁 자리로 이전(1951년 9월 18일)

학교 교사는 임시로 서울 남산공원에 있는 기독교박물관(관장 김양선)으로 정했다. 이곳은 1948년 장로회신학교 때부터 사용했던 장소여서 교섭하기가 쉬웠다. 이렇게 하여 1951년 9월 18일 대구에서 임시로 개교한 총회신학교는 피난생활 2년의 세월을 접고 1953년 10월 21일 본과 별과만을 이전하고 예과는 대구에 계속 머물도록 했지만 다음해 4월 7일에 예과도 서울로 이전하게 되었다.

1953년 9월 박형룡 박사는 6대 교장으로 취임한 이후 다방면으로 신학교 부지를 물색하였다. 사용하고 있는 교사는 적산인데다 일제 신사참배로 사용하던 건물안에서 계속 학교를 운영할 수 없었다. 박형룡 박사는 신학교 교사로 남산신궁자리를 불하받는 과정에서 사기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되었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박형형 박사 3천만환 사건"이다. 이사회 결의 없이 박형룡 박사 단독으로 추진하다가 사기를 당하게 되자 총회는 발칵 뒤집혔다. 이사회가 긴급소집되어 이 사건을 논의했다.

1958년 제43회 총회는 남산 대지 불하사건의 책임을 물어 이사 전원을 해임하고 노회에서 이사를 다시 선정하여 새 이사회를 조직하게 했다. 각 노회에서 새로운 이사 선정은 치열했다. 박형룡 박사를 지지하는 이사를 선출하도록 노력했지만 열세였다.

◈제44회 총회에서 통합측이 이탈하는 분열이 일어났다(1959년 5월 24일)

결국 1959년 제44회 총회는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되었다. 제44회 총회 6개월 전에 이사회를 조직하여 3천만환 사건으로 교장에서 물러난 박형룡 박사 후임으로 노진현 목사를 교장대리로 선출하고 정식 교장을 선출하지 못한 가운데 제44회 총회가 분열되고 말았다.

▲1961년 총회신학교 교감 명신홍 박사 집무광경; 직장암 4차 수술을 받은 투병중에 있던 명신홍 박사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에 1년 7개월 동안 거주하며 5만불 건축 기금 모금 했다.     © 리폼드뉴스

1959년 10월 17일 새벽에 연동측인 통합측 선교사들과 교수들이 남산에 있는 도서관에 앞에 트럭을 세워놓고 1만권이 넘는 책과 물품을 옮겨 실어가려고 작전을 펼쳤다. 이 상황을 알게 된 학교 숙직을 서고 있던 김정설과 박형만은 기숙사 학생들을 동원하고 김정설은 트럭 앞에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드러누어 저지시켰다. 학생들은 이 시간을 이용하여 트럭에 실린 책들을 다시 하차시켰다.

◈남산동 소재 대한신학교 교사로 이전하여 한학기 수업(1960년 3월 28일)

정부가 국회의사당을 남산에 짓기로 함에 따라 정부시책으로 총회신학교를 이전해야 할 형편이었다. 결국 800만환의 보상을 받고 1960년 3월 28일 남산동 소재 대한신학교가 사용하고 있던 교실을 주간에만 사용하기로 하고 이전했다. 신학교 학생들은 교단의 분열로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개학과 동시에 학교를 다시 이전한다고 공고되었다.

◈용산역 앞에 빌딩을 구입하여 이전(1960년 8월 22일)

총회신학교는 대한신학교 임시교사에서 한 학기를 끝내고 1960년 8월 22일에 용산구 한강로 2가 319번지 소재 4층 빌딩으로 이전했다. 이곳은 ICCC의 메칸타이어 총재로부터 받은 10만불을 들여 구입하여 이전하였다. 이때의 교사는 운동장이 없는 용산역 앞에 위치해 있었다.

▲ ICCC의 메칸타이어 총재로부터 받은 10만불을 들여 구입한 용산역 앞의 총회신학교 교사     © 리폼드뉴스
 
◈박형룡 박사의 교장 복귀(1960년 9월 24일)

연동측인 통합측이 이탈해 나간 후 승동측인 합동측인 1951년에 분열한 고신측과 합동이 지루어졌다. 이런 과정에서 1960년 9월 24일 박형룡 박사가 교장에 복귀했다. 총회신학교 교수를 활동하고 있었던 김치선 박사가 1948년 2월에 남대문교회에서 대한신학교를 설립했던 김치선 박사는 1960년에 이르러 총신의 교수직에서 사임하였다. 그리고 총회와 상관없이 늘어나는 학생들에게 목사안수를 주게 되자 총회와의 관계가 단절되자 대한신학교는 독립교단을 출범시켰다.

1963년 1월에 이미 한상동 목사 중심의 고신측이 다시 되돌아 갔지만 이미 잔류한 200여개 처의 고신측 교회가 있었으므로 교장 윤번제의 약속에 따라 이상근 박사가 제9대 교장에 취임했으며, 1964년 2월에 박윤선 박사가 제10대 교장에 취임했다.

◈명신홍 박사 총회신학교 건축 기금 마련을 위해 도미(1963년)

1963년에 이르러 고신측이 떠나게 되자 굴욕과 배신감과 허탈감에 빠졌다. 이제 총회신학교는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는 당면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때 직장암 4차 수술을 받은 투병중에 있던 명신홍 박사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 개혁파교회와 친선관계 수립, 신학교 건축, 선교사 파송 청원, 교수 교류, 유학생 알선 등을 목적으로 개혁교회세계대회에 맞추어 도미했다.

명신홍 박사는 미국에 1년 7개월 머물면서 총신 신축 5개년 계획을 설명하고 신축기금 5만불을 약속받았다. 나머지 1만 7천 불은 국내 교회가 5년 동안 모금하기로 했다. 제49회 총회 때 1만 7천불에 해당된 254만원은 노회별로 활당하였다. 1천달러에 해당된 130만원은 실업인 동지회에 요청하여 지역별로 할당하여 해결했다.

백남조 장로는 이 때 노모님을 위하여 개인 집을 건축하려던 2백만원을 신학교 건축헌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또한 백남조 장로는 신학교 부지헌금으로 2,000만원을 헌금했고, 이 기금으로 현재 총신대학교가 위치한 사당동 부지 18,000평을 1966년 3월에 매입하였다. 이후 학교부지 근접 대지 5,000평을 매입하여 학교부지에 통합시켰다. 이로써 학교부지는 23,000평으로 늘어났다. 이 부지위에 지금의 총신대학교가 세워졌다.

▲1965년 3월 29일자 기독신문 총신 교사 신축 기공예배 기사; 총신은 전국 교회의 지원으로 건축됐다.     © 리폼드뉴스

드디어 1965년 3월 22일 오후 3시에 이환수 목사의 사회로 기공예배가 신축부지 현장에서 1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드려졌다. 명신홍 박사는 스가랴서 4:1~10절 말씀을 통하여 “성(聖)건물건축의 가능성”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으며, 명신홍 박사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믿고 신축공사에 임하며, 모든 개교회주의와 지방관념을 버리고 이 성역에 힘을 합치자”고 호소하였다(당시 기사참조).
 
박형룡 박사는 "오늘 이곳에 신학교가 선다"라는 기공사를 발표했다. 박박사는 "금후 전국 교회는 더욱 일치단결하여  물심양면에서 인화를 더욱 공고케하여 금일 기공하는 이 집을 기한 내에 완성하자"고 호소했다.

◈신학교 부지의 정리적업을 위한 미 공군 공병대의 헌신 - 재학중인 김상전 전도사의 헌신

신학교 부지위에 신축하기 위해서 신학교 부지 정지작업이 필요했다. 신축자금이 넉넉지 않던 시절에 신학교 재학중인 김상정 전도사의 발벗고 나섰다. 김 전도사는 일반대학교에서 영문학과를 나오고 미군부대에서 병역을 마친터라 미군들과의 좋은 관계를 맺는 터였다. 이사들도 처음에는 반신반의였다. 이사회에서는 신학생이 무신 힘이 있다고 이런 큰 일을 교섭할 수 있겠느냐고 의심하기도 했다.

김 전도사는 처음 미 76공병대대 부대장 와그너 중령과 실무관 장료 헤메 중위와 교섭, 정지작업을 하기로 하였으나 갑자기 부대 사정으로 이행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와그너 중령은 김포 비행장에 주둔하고 있던 미 공군 6167기지 공병대와 교섭하여 도움을 받아 정지 작업을 마쳤다. 이렇게 하여 총신의 역사는 이어갔다. 

이렇게 하여 1965년 6월 7일 아침, 불도저 한 대가 우렁찬 굉음을 내면서 사당골자기의 찬란한 역사를 알렸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였으며, 재학생인 김상정 전도사를 통한 거사였다. 3일 동안 정지작업은 본관건물을 건축할 수 있는 터를 정리했다.

당시 김상정 전도사는 “그렇게 미군부대를 찾아다니며 도움을 청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요. 그러나 타 신학교의 모습에 마음이 아파 학생신분이지만 발벗고 나선거죠.”라고 고백하였다. 총신대학교와 총회는 이러한 김상정 전도사와 미국 부대에 빚을 진 것이다.

▲1965년 6월 14일 기독신문, 미국 공군 소속 6167공병대의 총신 신축부지 정지작업 기사     © 리폼드뉴스

1965년 6월 14일자 기독신문은 이렇게 알리고 있다.

“오래동안 끌어오던 신학교 정지 작업이 의외로 공군 소속 6167공병대대에 의해 빨리 진행되어 제1차 정지작업(본관 신축지)이 9일 완료됐다. 이 정지작업에 수고한 두 병사 Holter 중사와 Sullivan 하사는 뜨거운 태양 볕 아래서 정성을 다하여 불도저를 움직였으며, 보는 이 누구라도 그들의 정성어린 수고에 공감할 수 있을 만큼 열심했다. 자신들이 먹을 것을 가져와서는 나무를 주어모아 커피를 끌여 마셔가며 밤늦게까지 일하고 별빛 아래 담요를 똘똘 말아 감고 자다가는 먼동이 트는 새벽부터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중노동이나 즐거운 캠핑같다’고. 가족과 더불어 미국 남침례교에 소속된 교회에 나가고 있다는 이들은 “신학교 건축”이기 때문에 더욱 정성드리고 있다는 것이다.”
 
1966년 10월 8일자 기독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게재돼 있다.
 
"마리칼 잘라팔아 총신 신축헌금"
"인천 용현교회 유년주일학교 학생인 손혜경 양이 예산관계로 늦추어지는 총회신학교 신축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평소에 아껴오전 머리를 잘라 일금 5백원을 총회신학교에 보내왔다. 이 헌금을 받은 신학교 당국과 학생들이 손양의 이 미거에 크게 감동을 받았으며 또한 전국교회에 화제거리가 되었다." 
 
◈총회신학교 사당동 캠퍼스로 이전(1965년 8월)
 
1965년 8월 말에 한참 건축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건물 안에 입주하여 수업과 침식을 같이 하였다. 당시 신축건물 지하실과 옥상에 임시 기숙사로 사용하였다.
 
◈총신은 총회의 학교이다. 

어떻게하여 지금의 총신대학교가 세워졌는가. 역사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아니 우리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 이러한 교단총회의 직영신학교가 어떻게 총회와 무관한 학교로 운영될 수 있겠는가? 총신대학교에 목을 메고 있는 인사들에게 묻고 싶다. 어떤 이유로 총신대학교에 그토록 관심이 많은가? 어떤 자격으로 총회를 지키려고 하는가.
 
대다수 많은 총신출신자들은 총신을 아끼며 뒤에서 묵묵히 기도해 왔다. 그런데 어느날 총신과 전혀 관련성이 없어 보이거나 그토록 총신을 목숨걸고 아낄 것 같지 않던 자들이 총신의 주인인 것처럼 총신을 지키려고 한다. 무슨 이유와 어떤 자격으로인가. 실로 묻고 싶은 심정이다.
 
총신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자들이 오직 총회 소속 목사라는 이유로 총신대학교를 운영하는 재단이사가 되겠다고 한다. 오로지 지역별 안배 자격이라고 한다. 기각 막힐 노릇이다. 가사 총회가 총신에 관해서 잘못 결의했다고 할지라도 총회를 통해서 재론하기 전까지 총회결의를 따라 주는 것이 교단의 아들들이 취할 행동이 아닐까? 
 
총회와의 관련성 속에 총신대를 운영하겠다고 한다면 누가 이렇게 까지 마음 아파하겠는가? 진정 총신출신이요, 총신이 소속된 총회의 본류에서 묵묵히 기도하고 있는 교단의 아들들은 왠지 구경꾼의 기분이 들고 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제 설명좀 해 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 새롭게 구성될 재단이사회 이사 구성을 지켜보자. 그리고 제101회 총회를 지켜보자. 무엇인가 이제 새로워져야 한다. 어떻게 총신대 출신이 아닌 고신대 출신자들이 총신을 주름잡고 있는가? 1951년 고신측이 이탈하면서 하는 말이 무엇인가, 그들의 회의록에 의하면 기존 장로회가 이교도 사상으로 흐르고 있어서 떠난다고 했다. 그런 고신출신 교수들이 총장을 햐려 하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제 총신대 신학부를 키워야 한다. 그리고 지원해야 한다. 총신대 신학부 출신이 겨우 30% 정도가 신대원에 진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한다. 이제 각성하자. 이제 총신대 운영이사회의 이사 회비를 통해 일정 금액을 제외한나머지 재원으로 총신대학교 신학부 학생들의 장학금을 지급한다는 결의에 백번 찬성한다. 이렇게 하여 이제 하나하나 정리되어가야 한다.
 
오직 총회와 총신을 지키기 위해서...
 
소재열 목사(한국교회사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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