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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모 목사 칼빈 핵심교리 해설
개혁신학과 WCC 에큐메니즘- ③
개혁신학과 교회연합운동] 칼빈 교회관 중심은 ‘연합과 일치’
기사입력: 2010/02/04 [12:20]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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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과 WCC 에큐메니즘- ③ 개혁신학과 교회연합운동] 칼빈 교회관 중심은 ‘연합과 일치’
정준모 목사(대구성명교회·대신대 교수)

  
분파주의 아닌 참된 연합운동 선구자

‘하나님 말씀 안에서’ 대전제 놓지않아


   
  ▲ 정준모 목사  
교회 연합과 일치는 WCC 전유물인가? 교회 연합과 일치 그 자체는 비성경적이고 반개혁신학 운동인가? 개혁신학입장에서 교회 연합과 일치의 기준과 방향은 무엇인가?


1. 개혁교회 역사 뿌리와 교회연합 운동

1529년 말부르크 첫 개신교 교회 연합 종교회의
개신교 첫 교회 연합과 일치를 위한 종교회의가 1592년 독일 헷세에서 개최된다. 당시 회의에 대표적인 신학자들이 대부분 참석하였고 교황으로부터 파면을 당한 루터도 죽음의 위협을 무릅 쓰고 참석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최초의 개신교 종교회의는 실패작이 되고 말았다. 가장 큰 실패의 원인은 상호간의 지나친 불신이었고 그 중심에는 루터의 선입견이 있었다. 그는 스위스와 독일 남부 개혁자들과 교회에 대하여 “우리와 다른 영을 가진 자”들이라고 선언하면서 매우 불신적이고 적대감정을 가지게 된다. 루터는 이러한 신학적 적대감정 때문에 비텐베르그 개혁의 귀한 동지 교수였던 칼슈타트와 분열(1521~1522)되는 비극을 가져오게 된다.

또한 농민들의 혁명적 봉기(1524~1526)와 인간 의지에 관한 논쟁으로 그 귀한 믿음의 동지인 에라스무스와 결별(1524~1525)의 역사적 큰 오점을 남기게 된다. 루터는 로마교 추종자가 아닌 개혁을 추구하는 동반자들 가운데서도 자신의 가르침이나 입장을 전적으로 따르지 않는 자들을 ‘광신자’(schw mer)로 비판하고 경멸하는 불행한 일을 자행하였다. 루터의 지나친 신학적 배타성 때문에 최초로 시도되었던 개신교 연합과 일치를 위한 종교회의는 안타깝게도 결렬되었다.

부써: 개혁교회 연합 운동의 열정적 헌신자
1959년 말부르크 첫 개신교의 교회 연합과 일치의 실패 현장을 목도한 부써는 교회의 하나됨이 교회의 본질임을 깨닫고 교회 연합과 일치를 위한 헌신적 노력과 열정을 불태웠다. 그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와 몸이기 때문에 결코 둘이 될 수 없다는 교회의 일치에 대한 강력한 입장을 가진 교회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리 모두는 영적으로 그리고 세상적으로 한 몸이다” “만일 우리가 그들(루터와 그의 동료들을)을 우리의 형제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이다”라고 강하게 그리스도 중심으로 교회의 하나됨을 주장하였다.

교회 연합과 일치에 대한 부써의 끊임없고 끈질긴 노력으로 1536년 루터와 합의하여 〈비텐베르크 일치신조〉(Wittenberger Konkordie) 결실을 맺게 된다. 부써와 루터는 지난 1529년 말부르크 회의에서 일치를 보지 못한 성찬론에 대한 신학적 입장들에 대하여 합의점을 돌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합과 일치 운동이 북부독일, 남부독일 그리고 스위스까지는 확대되지 못한 안타까움을 남겼다.

그 이유는 첫째는 부써를 두고 ‘위대한 열린 정신’, ‘넓은 가슴’의 소유자라고 부써에게 극찬과 찬사를 아낌없이 보내었던 스위스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와 외콜람파디우스가 1531년 죽음을 맞이했으며, 둘째는 츠빙글리의 후계자인 하인리히 불링거가 그의 선임자보다 북부 독일의 신학자들에 대하여 부정적 시작을 가지고 교회의 일치와 연합에 대하여 츠빙글리와 달리 부써 입장을 이해하고 동조하기 보다는 오히려 불신하고 배척했기 때문이다. 후대 일부 개신교 역사가들은 부써를 ‘중재신학자’, ‘타협신학자’라고 맹공을 퍼붓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부써는 그리스도의 한몸을 역사적 상황에서 이루기 위하여 교회의 일치와 연합에 헌신과 열정을 아끼지 않았던 인물로 역사적 정황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칼빈: 개혁교회 연합 운동의 선구자
16세기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교회연합과 일치를 위한 쌍두마차격 두 인물은 바로 부써와 칼빈일 것이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추방된 이후, 1538년에서 1541년까지 약 3년간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체류하게 된 동기는 부써의 요청 때문이었다. 칼빈은 그곳에 프랑스 난민 교회를 맡아 목회를 하였다. 이 때,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2판과 〈신앙교육서〉를 집필했다.

특별히 칼빈은 그곳에서 부써와 많은 교제를 나누면서, 교회의 연합과 일치 등 교회론에 대한 많은 도전을 받았다. 칼빈이 부써의 신학적 입장을 전적 동의한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칼빈은 부써를 가리켜 “이 시대에 가장 으뜸이 되는 그리스도의 종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극찬하였다. 종교개혁 역사가인 쨩 꾸르부와저는 “부써없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칼빈이 있을 수 없다”라고 평가할 만큼 돈독한 관계를 잘 설명하였다. 칼빈은 1539년 멜랑흐톤을 만나 프랑크푸르트 종교회의에서부터 1541년 개신교와 로마교 사이의 일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교회 연합과 일치에 대한 칼빈의 열정과 노력으로 1549년 볼링거와의 〈취리히 일치신조〉(Consensus Tigurinus)를 작성 채택하여 스위스 지역 개신교 연합의 결실을 맺었다. 멜랑흐톤을 제외한 극우파 루터 후계자들은 스위스 개혁가들에 대한 극심한 반발과 칼빈에 대한 도전과 응수 때문에 칼빈의 의도와 전혀 관계없이 루터파 개혁교회들이 이탈함으로 교회 일치의 꿈이 무산되어 버렸다.

그 결과 개신교는 종교개혁 이후 개혁교회와 루터파 교회 등 두 개의 큰 주류 교회로 출발하게 되었다. 라이프니치 대학의 교수인 칼 리컬은 〈개혁교회의 원리〉에서 “개혁교회의 창설자는 츠빙글리가 아니라 칼빈이다. 개혁교단은 칼빈적 제도이다. 츠빙글리주의는 독일과 스위스에 제한되고 성공회는 영국과 영국식민지에 제한된 반면 칼빈주의는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2. 칼빈의 교회연합과 일치 신학론

분파주의가 아닌 연합운동의 선구자 칼빈
칼빈에 대하여 독선주의, 분파주의, 파벌주의, 왜곡주의자로 오해하고 극한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다. 그러나 칼빈 시대의 목회현장과 그의 교회론을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진정한 교회 연합과 일치를 위해 온 열정을 다 쏟았는지를 알 수 있다. 칼빈 저술가 빌렘 네이언하위스(Willem Nijenhuis)는 칼빈을 “개혁자 중 연합운동의 선구자”라고 다음과 같이 호평을 하였다.

“칼빈은 그의 교회론을 통해 유럽교회의 종교개혁에 아주 특별한 기여를 하였다. 교회의 일치성과 보편성에 대한 신념은 그로 하여금 교회의 가견적 일치의 회복을 위해 지칠 줄 모르게 일하도록 하였다. 바로 이 점이 그로 하여금 개혁자들 중에 교회 연합 운동의 선구자가 되게 하였다.”

칼빈의 신학 사상의 보고인 기독교 강요 4권 1, 2장에 그의 교회 연합과 일치에 관한 신학적 입장을 잘 서술되어 있다. 놀라운 사실은 기독교 강요 4권 1장의 29개 항목 중에서 19개 항목에 걸쳐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거듭 강조할 만큼 그의 교회관 중심에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 사상이 굳게 서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칼빈은 참된 교회는 오직 하나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교회 연합과 분리의 신학적 기준: 오직 하나님 말씀
칼빈은 교회 연합과 분리의 평가 기준을 하나님 말씀으로 본다. 칼빈은 말씀을 떠난 교회, 말씀을 표지로 가지지 않는 교회를 이단적 교회, 배교적인 교회로 보고 이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은 교회분리(schism)로 보지 않았다. 칼빈은 개혁교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분파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톨릭 교회가 진리의 표준인 말씀을 떠나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떠나 새로운 형태로 분리되었다고 본다. 칼빈은 교황과 재세례파를 분파(Sects)로 단정한다. 그는 로마가톨릭교회를 교회의 절대유일한 토대인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분파로 보았다.

그러나 참교회가 아닌 이단 집단, 이단 교리를 수용하거나 참된 핵심 교리를 부정하는 교회에서 이탈하는 것을 결코 분리로 보지 않았다. 칼빈은 로마가톨릭의 문제점을 그들의 악행과 부도덕 문제보다 하나님 말씀을 떠난 잘못한 신앙고백과 교리에 근거를 둔다. 칼빈은 그들은 신성한 진리의 빛이 끊어지고, 하나님 말씀이 파묻히고, 그리스도의 덕이 까마득히 잊어진 결과로 신앙에 대한 교리가 혼합되어 순전함을 잃고 의식들은 오류에 빠지고 거룩한 예배에서 사소한 부분까지도 미신에 더럽혀졌다고 질타하였다.

칼빈은 진리와 거짓을 분간하는 교회의 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았다. 칼빈은 로마가톨릭 교회와 연합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대전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 말씀 안에서 교회 연합과 일치의 근거를 찾았다. 이처럼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연합과 일치, 교회순결과 분리의 토대로 삼았다.

칼빈의 교회 연합과 일치론
1) 칼빈은 교회를 ‘성도의 모임’으로 하나됨을 강조한다. “온 시대에 걸쳐 온 세계를 뻗쳐, 하나의 교리와 그리스도의 한 영(the one doctrine and the one Spirit of Christ)으로 결속된 믿음의 하나됨과 형제의 일치를 기르고 유지하는 모임이다. 이 교회 안에 불일치란 없다”(사돌레토에게 보낸 칼빈의 답신). 2) 칼빈은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교리 즉 진리를 가장 중시한다.

“이 교리에 대한 지식이 사라진 곳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끊어지고, 신앙이 없어지고, 교회는 깨어지고, 구원에 대한 소망은 아주 뒤집어진다.”(사돌레토에게 보낸 칼빈의 답신) 3) 칼빈은 순수한 교리 안에서 일치를 추구하였다. “분열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는 가장 사악하고 가장 해로운 악이다…분열로 교회를 찢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순종하지 않으려는 자들이다. 그러나 거룩에서 단절되는 것에 동의하는 것보다 차라리 의견을 달리하는 것이 낫다.”(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 4권) 4)

칼빈은 교회 연합과 일치를 위해 헌신적 열정을 가졌다. “우리 사이의 형제다운 우정을 강화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무엇입니까?…모든 기독교 교회가 참된 연합으로 일치 되는 것…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든 참된 사역자들과 연합과 친교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하나님이 전파되는 교회들이 신실하게 서로 일치되어야 합니다.”(볼링거에 보낸 편지) 5) 칼빈은 다음 세대에게 교회의 연합과 일치의 유산을 물려주고자 했다. “어느 곳에서든지 서로 만나서 서로 다른 조항들에 대해 충분히 논의한 다음…우리의 후손들을 위해 몇몇 특정한 규칙을 만들고자 합니다…이러한 목적을 위해 나 자신은 열 개의 바다를 건너는 것도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분열된 교회들을 연합시키기 위해 성경의 권위와 무게로 작성하는 것이라면 나는 고초와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영국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에게 보낸 편지) 칼빈의 입장에 양면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칼빈이 허용한 문제들: 루터파 예배의식의 허용 문제, 우상숭배가 아닌 의식들에게 대한 낙스에게의 권면, 스트라스부르그 재세례파의 용납 등이 있다. 또한 칼빈이 허용하지 못한 문제들: 카스켈리옹 사건(1543), 제롬 볼섹 사건(1551년), 세르베투스 사건(1553)등을 들 수 있다. 칼빈은 교회 순결과 일치를 함께 중시한다. 진리의 순결을 외면한 연합과 일치에 분노할 것이며 연합과 일치가 없는 진리의 순결도 역겹게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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