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신적 권위

성경의 신적 권위는 어떻게 나타낼 수 있겠는가?

정규철 | 기사입력 2022/01/03 [23:56]

성경의 신적 권위

성경의 신적 권위는 어떻게 나타낼 수 있겠는가?

정규철 | 입력 : 2022/01/03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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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폼드뉴스) 2022년 새해가 밝았다. 2년째 지속되는 코로나 19 바이러스 사태는 세계적으로 그칠 줄을 모르고 있다. 새해에 종식된다는 희망의 소식이 없지는 않다. 코로나 사태는 목회자들에게도 큰 도전과 과제를 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수적인 교회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서울 명륜교회가 온라인 예배를 진행한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으나 이제는 온라인 비대면 예배가 상식이 되었다. 이러한 추세에서 우리가 최우선으로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성경의 신적 권위는 어떻게 나타낼 수 있겠는가? 새해를 맞이한 요즘 진정한 새로움은 무엇인가?

 

1. 성경

  

길이 어려울 때는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우리의 교회는 개혁교회이다. 개혁교회의 출발을 생각함으로 오늘의 갈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중세의 서슬 퍼런 교권의 분위기에서 루터(1483-1546)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위업을 이루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칼빈(1509-1564)은 성경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기독교강요를 저술하였고, 성경 대부분을 주석하였다. 이것은 굉장한 지성과 신성한 연구의 결과이다.

 

사실 진정한 새로움은 신약성경에 있다. ‘(‘New’ Testament)새 언약이기 때문에 그렇다. 목회자와 설교자들은 늘 같은 교인들 앞에서 지루함을 떨쳐버리고자 신선한 새로움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해 아래 새것은 없어서 새로움만 추구하다가 자칫 성경 자체를 떠나 버리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진정한 새로움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정보는 성경 66권만큼 많이 제공하는 것이 없다.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는 성경의 권위는 성경 자체의 증언에 따라 교황의 권위를 능가하는 최고의 권위임을 종교개혁가들은 담대히 외쳤다. 그래서 성경을 계속 연구할 필요가 있다.

 

(1) 외경은 성경이 아님

 

종교개혁자들은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인 신구약 66권만이 신적 권위가 있는 정경으로 인정하였다. 외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은 외경의 저자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경은 유대인들이 신구약 중간기에 곧 하나님의 계시가 없던 시기에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저술하였다.

 

아직도 로마 가톨릭(73)과 성공회(80)와 정교회(77)는 외경을 포함하여 그들의 정경으로 삼고 있다. 외경을 포함하였기 때문에 성경해석에도 영향을 주어 성상과 성화 숭배를 교리화하였다. 그러나 성상과 성화 숭배는 제2계명 위반이다 (20:4-6). 종교개혁은 외경을 배격하였다.

 

(2) 성경의 무오

  

성경의 신적 권위는 당연히 성경무오를 전제한다. 현대에 무오를 나타내는 영어단어는 두 가지가 있다. 무오 (Inerrancy)와 무류 (혹은 불오, Infallibility)이다. 무오는 신앙의 영역과 과학과 역사에도 오류가 없는 것을 뜻한다. 무류는 신앙의 영역에는 오류가 없으나 역사와 과학의 영역에는 오류가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날 성경의 정확함을 말할 때 무오를 사용한다 (5:18, 10:35, 딤후 3:16 ). 무류는 진정한 무오가 아니다.

 

슐라이어막허, 바르트, 틸리히, 불트만 등이 한때는 다 목사요 목회자요 설교자였다. 아마도 그들은 설교에 새로움을 주고자 성경의 무오를 부정하였을지 모른다. 그들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의 신적 권위를 부정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단지 인간이라고 주장하였다. 바르트는 성경이 인간의 오류가 담긴 고대 종교문서라고 평가하였다. 바르트에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리하여 그의 방대한 교회교의학에서 성경의 거의 모든 내용을 부정하였다. 그 책이 지금은 한글로 번역되어서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2. 이신칭의

 

성경의 신적 권위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면 그 해석의 결과는 어떻게 될까? 성경해석이 무엇이냐에 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해석은 어원적으로 성경 메시지의 전달이다. 성경의 메시지는 복음이다. 복음이 무엇이냐에 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복음은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인격과 그의 구속 사역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의 신적 권위를 주장한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을 해석한 특징의 하나는 이신칭의이다.

 

(1) 믿음

 

믿음의 내용은 우리가 주일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요약되었다. 그러니까 공 예배 시간에 다 같이 고백한다. 사도신경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다. 사도신경은 니케아 신경과 콘스탄티노플 신경과 칼케돈 신경을 통해 그 의미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그래서 사도신경을 요약한다면 주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다. 누구를 막론하고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하면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받을 것이다. 특히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이시고 구속 사역을 하신 분으로 믿고 고백할 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어 영원한 구원 곧 영생을 얻을 것이다 (10:10).

 

(2)

 

로마서 1:17의인은 살리라는 말씀에 따르면, 의는 하나님 앞에서의 생존권이다. 이것이 의가 중요한 이유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기에 누구든지 의가 없이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의로움이 있어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의로운 천국에서 살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자신의 노력과 선행으로 천국의 의에 이를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성육신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믿음으로써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완전히 용서받고 의인이 되어 영생에 이를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신칭의의 복음을 성경에서 발견하여 공표하였다. 이신칭의의 복음을 교회가 이해하여 공표하기까지는 1500년이나 흘렀다. 이신칭의와 관련하여 신구교의 갈등은 독일(1618-1648)과 프랑스(1562-1598) 등에서 소위 30년 전쟁이 일어나서 약 800만 명이 희생되었다. 이신칭의의 복음이 우리에게 전달되기까지는 수많은 피 흘림의 순교가 있었다. 따라서 성경해석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굉장한 용기가 요청된다.

 

(3) 행위

 

이신칭의에서 인간의 행위와 공로는 없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2:17)는 하나님의 명령에 근거하여 이 명령을 지키면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행위언약의 개념에 대해서는 성경 본문이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 2:17은 언약 배반에 대한 형벌을 말한다. 순종을 조건으로 생명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없다. 생명은 이미 창조 때 주어졌다. 아담은 타락했는데도 930년을 살았다 (5:5). 거의 천년을 살았다. 죽음이 온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의 결과이다 (6:23).

 

(4) 구원

 

성경에서 구원은 과거의 구원만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현재의 구원과 미래의 구원도 말한다. 소명과 중생과 회심 혹은 회개와 신앙과 칭의와 양자는 과거의 구원이다. 성화와 성도의 견인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구원이다. 영화는 미래의 구원이다. 물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원은 인간의 행위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포함되어 있다. 구원에 관한 믿음 고백은 과거만 아니라 지금도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

 

(5) 교리

 

교리는 글자대로 하면 가르침()을 정리()한 것이다. ‘독트린’ (Doctrine)의 어원도 가르치다는 뜻이다. 즉 성경의 가르침을 정리한 것이 교리이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다 교리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가 세계적 혹은 국가적 단위에서 (에큐메닉) 공적인 신조의 형태로 수용한 것만 교리라 한다. 고대교회의 니케아 신조, 콘스탄티노플 신조, 칼케돈 신조가 그랬다.

 

종교개혁 이후 17세기에 아일랜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등 4개국의 대표들이 모여 수년간 작성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교리문답과 소교리문답 등의 표준문서는 국가적 범위의 장로교회들이 공적으로 받아들였다.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도 받아들였다. 이 표준문서에 따르면, 성경의 가르침은 크게 믿어야 할 것행해야 할 것으로 나누고 있다. 그러면 믿을 것만을 교리라고는 할 수 없다.

 

교리에는 행할 것도 포함된다. ‘믿을 것은 사도신경에 요약되었고, ‘행할 것은 십계명과 주기도문에 요약되었다. 그러니까 사도신경과 십계명과 주기도문은 성경 전체 가르침의 요약이다. 예수 믿어 구원받았고 받으며 받을 것이니까 십계명대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십계명대로 다 살지 못하였으니까 주기도문의 기도대로 기도하여 죄 용서를 받는다. 이것은 복음이다.

  

(6) 이신칭의에 대한 도전 극복

 

오늘날 이신칭의 교리는 많은 도전을 받고 있다. 유대교 출신들의 바울의 새 관점 학파는 교묘하게 이신칭의를 부정하고 있다. 이미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성경의 권위와 이신칭의 교리를 정죄한 로마 가톨릭은 제2 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서 타종교와의 대화를 채택하고, 예수 믿음 없이도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반기독교적 종교다원주의를 교리로 선포하였다.

 

회중교회와 웨슬리 신학도 믿음과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을 강조하여 이신칭의의 복음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도 종교다원주의를 따르면서 이신칭의를 부정하고 전통적 정통적 기독교를 해체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도전을 복음선포로 극복해야 할 사명이 있다.

 

2년간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 19 사태와 상관없이 우리는 여전히 도전받고 있는 성경의 신적 권위를 지혜롭고 담대하게 주장해야 할 것이다. 성경의 신적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성경연구와 성경해석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 우리 개신교회의 특징인 이신칭의도 강조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교회가 생명력으로 약동할 것이다.

  

정규철 목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및 이사, 예수인교회 협동목사, 전 계약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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