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재7 최종]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에 대한 논쟁(6): 분석과 평가

리폼드뉴스 | 기사입력 2021/03/24 [11:00]

[신학연재7 최종]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에 대한 논쟁(6): 분석과 평가

리폼드뉴스 | 입력 : 2021/03/2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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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폼드뉴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에 대한 논쟁'에 대한 유창형 교수(칼빈대학교 조교수, 조직신학 박사, Ph.D.)의 논문을 연재한다(편집자 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에 대한 논쟁
Debate on the Imputation of Christ’s Active Obedience 

 

   목차

 

. 들어가는 말

 . 이 교리를부정하는 학자들 

   1. 리차드 백스터 

   2. 존 웨슬리 

   3. 서철원 

   4. 정이철  

III. 이 교리를 인정하는 학자들 

   1. 존 오웬 

   2. 헤르만 바빙크  

   3. 박형룡  

   4. 신호섭  

. 분석과 평가 

   1. 이 교리에 관한 성경구절들  

   2. 어느 편이 칼빈과 일치하는가

   3. 이 교리를 부정하는 견해의 장단점 

   4. 이 교리를 인정하는 견해의 장단점 

. 나오는 말 

 

IV. 분석과 평가

 

1. 이 교리에 대한 성경 구절들

 

정이철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교리를 말하는 성경구절이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를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구절은, 로마서 5장 18-19절이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 구절은 예수의 모든 순종이 우리의 순종으로 전가됨으로 우리가 의인이 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사실 적지 않은 개혁신학자들이 이 구절을 그리스도의 능동적 복종의 전가로 해석한다.1)

1) 예를 하나만 든다면, 후크마, 『개혁주의구원론』 (서울: 기독교 문서 선교회, 1990), 300-01.


칼빈도 이 구절을 그리스도의 복종이 우리의 것으로 간주되었다고 한다.2)

2) 여기에 관해서는 정이철을 다룬 항목에서 롬 5:19에 관한 칼빈의 주석을 인용한 부분을 참고하라.


 단지 이 순종이 율법에 대한 순종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명료하지 않기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첫 아담의 범죄와 둘째 아담의 순종을 비교한 것이므로 첫 아담이 행위 언약을 범한 것이라면 둘째 아담의 순종은 행위언약을 만족시킨 것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둘째 구절은 로마서 3장 21절,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에 대한 칼빈의 주석이다.

 

첫째, 우리의 칭의에 대한 질문은 사람들의 판단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에 관해 언급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에 대한 완전하고 절대적인 복종 외에 어느 것도 의롭다고 간주되지 않는다 ... 둘째, 그리스도께서 ... 홀로 의로우시고 그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심으로 우리를 의롭게 만드실 수 있기 때문에3) .... 첫째로 그 안에 율법의 완전한 의가 발견되는데 그것은 전가에 의해서 우리의 것이 된다.4)

3) Calvin,  Commentary on Rom. 3:22=CO 49, 60.

4) Calvin, Commentary on Rom. 3:31=CO 49, 67: “... primum in eo invenitur exacta legis iustitia, quae per imputationem etiam nostra fit.”


위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완전한 의가 나타나고 그것이 전가에 의해서 우리의 것이 된다”는 표현이 율법준수로서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에 대한 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4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라는 구절은 칭의가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말미암았다는 의미이고, 25절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는 구절을 보면, 이 단락이 사실상 죄 사함에 초점이 맞추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럴지라도, 칼빈이 이 단락의 주석에서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복종이 전가로 우리의 것이 된다”는 진술을 했다는 의미에서 의의 전가 교리의 근거 구절이 될 수 있다.


이 교리와 관련이 있는 셋째 구절은 빌립보서 3장 9절이다. “...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여기에서 바울이 가진 의는 율법을 지켜서 얻은 의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그리스도께서 갖고 계신 의가 내 의가 된다. 그런데 이 구절 전후를 아무리 살펴도 그리스도의 의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지켜서 얻으신 의라는 명시적 설명이 없다. 단지 후크마가 그렇게 간주하고 있을 뿐이다.5)  그러므로 이 구절이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를 지지하는 분명한 구절이라고 할 수 없다.

5)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267. “이 구절은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의 어떤 행위의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


셋째 구절, 고린도전서 1장 30절, “그리스도는 ... 우리에게 구속과 ... 의로움이 되셨느니라”를 살펴보자. 이 구절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속과 의가 되셨다는 것이다. 후크마는 이 의를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으로 해석한다. 이 구절을 칼빈은 “그의 죽음으로 우리 죄를 속죄한 것처럼, 그의 순종을 우리의 의로 전가한다”6)고 하였다.

6) Calvin, Commentary on 1 Corin. 1:30. “......he says that he is made unto us righteousness, by which he means that we are on his account acceptable to God, inasmuch as he expiated our sins by his death, and his obedience is imputed to us for righteousness.”


따라서 칼빈의 주석을 따른다면 이 구절도 의의 전가 교리의 지지 구절로 사용할 수 있다. 구절 자체의 의미로는 불명료하지만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셋째,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은 칼빈이 그렇게 해석하고 있듯이,7)

7) Calvin, Commentary on 2 Corin. 5:21. “Righteousness, here, is not taken to denote a quality or habit, but by way of imputation, on the ground of Christ’s righteousness being reckoned to have been received by us.”


 그리스도와 신자의 놀라운 교환으로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어 형벌이 처리되고,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신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가 의인이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으므로 의의 전가 교리를 지지하는 구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럴지라도 구절 자체만으로는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지지하기에는 미약하다.


넷째, 이사야 61:10, “...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이 구절을 오웬은 “의복의 교환”이란 말로 설명했다. 신자의 더러운 옷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제거되고, “구원의 옷과 공의의 겉옷”은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우리에게 전가된다고 하였다.8)

8) Owen, 2:164.


이것은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신부와 신랑의 예물 교환”이라는 비유와 함께 자주 사용되는 비유다. 물론 본문은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이 수치가 가려지고 다시 유대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일차적으로 말하지만, 누군가가 오웬처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를 지지하는 방식으로 해석한다면 논자는 심하게 반대하고 싶지는 않다. 비슷한 구절은 스가랴 3장 4절이다.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9)

9) 루이스 벌코프가 이 구절을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을 입증하는 구절로 인용하고 있다. 『벌코프조직신학 하』, 767.


 이 구절도 비슷한 의미다. 그러나 이런 구약의 구절들에 대한 해석은 의의 전가 교리를 지지하는 강력한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그리스도의 순종이란 말이 명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섯째, 에스겔 18장 14-17절, 특별히 17절, “... 내 규례를 지키며 내 율례를 행할진대 이 사람은 그의 아버지의 죄악으로 죽지 아니하고 반드시 살겠고.” 칼빈은 이 구절에서 요한일서 3:7대로 “의를 행하는 자는 의롭다”를 인용하면서,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간주된다고 하였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그 의를 통해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칼빈의 해석을 따른다면 이 구절은 그리스도가 율법을 준수하여 얻은 의를 신자에게 전가한다는 강력한 구절이 될 수 있다. 물론 이 구절 자체는 의의 전가를 전혀 말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각각의 행위가 각각의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기에 사실상 의의 전가 교리와는 반대되는 구절이다.


다섯째, 마태복음 16:17,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이 구절은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영생에 이르는 길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혹자는 사람이 부패해서 계명을 지켜 영생에 이를 수 없으니 그리스도께서 대신 율법을 완전히 지켜서 신자에게 전가해서 영생을 얻게 해주셔야 한다고 추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해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본문은 예수를 믿고 따른 자들에게 영생이 있고, 율법을 지켜서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구절은 갈라디아서 3:12,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이다. 여기서도 예수께서 신자 대신 율법을 행하셔서 그것을 전가하심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13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라고 나온다. 즉, 수동적 순종의 전가로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받아 의롭다 함을 얻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다고 하고 있지, 그리스도의 율법준수가 우리가 율법을 준수한 것처럼 전가된다는 표현은 전혀 없다. 그러므로 이 단락도 의의 전가 교리를 지지하는 구절이 아니다.


여섯째, 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성자께서 율법 아래 나셔서 율법을 지키셔서 속죄 제물의 자격을 얻으사 속량하셔서 우리를 양자되게 하셨다는 의미다. 여기서도 양자 됨의 수단이 속량에 있다.

 

율법 아래 나셔서 율법을 지키신 것이 능동적 순종이라면 이것이 신자에게 직접 전가된 것이라기보다는 속죄 제물이 되기 위한 자격을 얻으시고 속죄 제물이 되셔서 속량하심으로 우리가 양자가 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이 구절은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보다는 수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를 지지한다. 단지 율법준수는 간접적으로 속량에 기여하고 전가된다고 할 수 있겠다.


일곱째 구절은 마태복음 22장 1-11절, 혼인 예복 비유이다. 여기에서 처음에 들어올 때는 초청에 응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는 예복을 입고 있어야 한다. 그 예복을 의의 전가라고 해석하는 학자들10)이 있다. 그러나 존 웨슬리와 존 칼빈은 이것을 성화된 삶11)

10) George Whitefield, Sermons on Important Subjects by George Whitefied (1714-1770), 서창원 역, 『와서 최고의 신랑 그리스도를 보라』 (서울: 지평서원, 2003), 126.

11) Calvin, Commentary on Matt. 22:1-11; Wesley, Commentary on Matt.22:1-11.


으로 보았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를 지지하는 것으로 쓰이지만 본문은 사실상 그 어느 편도 명백하게 지지하지 않는다. 예복이 무엇인지 본문이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수동적 순종의 전가가 칭의에 충분하다고 하는 성경구절은 너무나 많지만, 지면상 세 구절만 살펴보자. 로마서 5장 9절,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 .” 만약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율법을 준수하여 우리에게 전가해 주셔서 의롭게 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 성경 구절은 클리포드의 말대로 “절반의 진리가 될 것”이다.12)

12) Clifford, Atonement and Justification, 188.


 그러나 이 구절은 분명히 말한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따라서 존 오웬이 말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가 우리의 칭의에 필수적이라는 주장13)은 힘을 잃는다.

13) Owen, 5:274.


이와 비슷한 구절은 로마서 3장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이다. 여기서도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하지, 오웬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로” 의롭게 하심을 얻었다는 말이 없다. 이런 구절들은 신약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셋째 구절은 요한계시록 22장 14절,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이다. 여기서 두루마기는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완전하기에 빨 필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두루마기는 자신의 옳은 행실로 보아야 한다. 이 옳은 행실은 더러움에 물들어 있어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빨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도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를 지지하지 않는다. 


정리하자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가 성경에 아주 명료하게 드러나는 구절은 로마서 5:19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단지 칼빈이나 다른 학자들이 그렇게 해석하는 구절들은 좀 있는 편이다. 그에 비해서 훨씬 많은 성경 구절들이 수동적인 복종의 전가가 의롭게 한다는 것을 진술하고 있다.14)

14) 그리스도의 수동적 복종의 전가만을 인정하는 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Amiraut, Quartre sermons sur led chap, vi de l’epistre aux Hebrieux (Saumur: I. Desbordes, 1657):18-19; Richard Watson, Theological Institutes (New York: Carlton and Porter, 1857), 2:215-34; H. Orton Wiley, Christian Theology (Cansas City: Beacon Hill, 1958), 2:396-97; A. M. Hills, Fundamental Christian Theology (Salem, 1931: Schumu, 1980), 2:188-89; John R. W. Stott, The Cross of Christ (Downers Grove: InterVarsity, 1986): 140. 반면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인정하는 학자들은 본 논문에서 소개한 존 오웬, 바빙크, 박형룡, 신호섭을 비롯하여 수많은 청교도 신학자들, 벌코프, 『벌코프조직신학 하』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2), 766-68;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297-303; A. A. Hodge, Atonement (Philadelphia: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1867), 264 등이 있다.


 이것은 로마서와 히브리서를 비롯한 수많은 신약성경의 구절들을 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2. 어느 편이 칼빈과 같은가?

 

리차드 백스터와 존 웨슬리는 수동적 순종의 전가만을 인정했다는 면에서 칼빈의 주된 강조점과 유사하나,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지 못하고 최초칭의와 최종칭의를 별개로 보았다는 면에서 서철원과 다르고 칭의와 성화를 구별한 칼빈과도 다르다.


정이철과 신호섭이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로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인용한 것은 대체로 정확하다. 그러나 정이철이『기독교 강요』에서 몇 단락을 놓치고 있다. 그런 부분은 다음과 같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이 참사람으로 오셔서 아담의 인격과 이름을 취하여 아담을 대신하여 아버지께 순종을 이루시며, 우리의 육체를 대표하여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만족시키는 값으로 내놓으시고, 그 육체로써 우리가 치러야 할 형벌의 값을 치르셨다.15)

15) John Calvin, Institutes, 2.13.3.


위에서 중요한 표현은 “아담을 대신하여 아버지께 순종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이는 아담이 불순종한 것을 대신하여 순종을 하셨다는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아담이 불순종해서 얻지 못한 의를 둘째 아담이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얻으셨다는 칼빈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칼빈이 능동적, 수동적이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 단락의 의미는 아담의 순종을 대신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분명히 말하고 있다.


칼빈이 의의 전가 교리를 지지하는 또 하나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그가 제시하는 (의)의 성취는 우리가 전가를 통해서 얻는 것이다 ...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우리가 의롭다고 간주된다고 선언하는 것은 우리의 의를 그리스도의 순종에 맡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순종이 마치 우리 자신의 것처럼 우리에게 전가되기 때문이다.16)

16) Calvin, Institutes, 3.11.23.


위에서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 자신의 것처럼 전가된다”는 표현은 확실히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말하고 있다. 그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감당한다. 이 단락 뒤에서 칼빈은 다시 야곱이 형의 겉옷을 입었다고 했을 때 이 겉옷을 “그리스도의 고귀한 순결 밑에서” 숨어서 “죄의 용서”를 받으며 행위의 과오를 덮었다고 함으로 다시 수동적 순종의 전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 단락은 그리스도의 순종의 전가를 말한다고 보아야 한다. 죄 사함과 의의 전가는 그리스도의 한 순종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제시하고 싶은 것은 『기독교 강요』의 다음 진술이다.

 

즉,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이들을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살리라’(레 18:5)고 우리의 행위에 대하여 약속하신 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얻는다는 것이다 ... 만약 율법준수가 의라면, 그리스도께 이 중한 짐을 친히 지고 마치 우리가 율법을 다 지킨 것처럼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케 했으니, 하나님의 은혜를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하겠는가?17)

17) Calvin, Institutes, 2.17.5.
 

위 구절은 확실히 그리스도의 율법준수가 우리가 율법을 지킨 것처럼 전가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이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에 대한 강력한 지지 단락이다. 앞부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로마서 3:21, 로마서 5:19-20, 고린도후서 5:21과 고린도전서 1:30, 그리고 에스겔 18:14-17에 관한 칼빈의 주석도 이 교리에 대한 강력한 지지 구절들이다.


정리하자면, 벌코프가 인정하고 있듯이, 칼빈의 많은 진술들은 칭의를 죄 사함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는 칼빈이 그리스도의 전 생애에 걸친 순종을 강조하되, 수동적 순종인 십자가의 고난의 전가를 통한 죄 사함에 칭의의 강조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8)

18) 유창형, “죄사함과 의의 전가를 중심으로 한 칼빈의 칭의론과 그 평가”, <성경과 신학> 제52권 (2009): 15-27을 참조하라. 루이스 벌코프도 “칼빈과 옛 개혁파 신학자들은 종종 이것이(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에 기초한 죄의 용서) 칭의의 전부인 것처럼 언급하기도 했다”고 인정한다. 『벌코프조직신학 하』 (서울: 크리스찬다이제스트, 1992), 766.


하지만 칼빈은 “칭의가 죄 사함과 의의 전가로 구성된다”19)고 했고, 위에서 살펴본 『기독교 강요』2.13.3; 2.16.5; 3.11.23; 2.17.5, 로마서 3:31, 로마서 5:19-20, 고린도후서 5:21과 고린도전서 1:30, 에스겔 18:14-17에 대한 주석을 고려한다면,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의 전가를 말하고 있기에, 칼빈이 수동적 순종의 전가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도 인정했다고 보아야 한다.

19) 박형룡도 대체로 “칼빈은 칭의와 사죄를 동일시하는 언사를 사용하였으나”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 대한 칼빈의 주석에 의거하여, “칭의는 사죄에 다른 성분을 추가한 것이라는 뜻을 표시하였다”고 주장한다. 박형룡, <박형룡박사저작전집 V 교의신학 구원론> 논자는 박형룡의 견해에 찬성한다.

서철원과 정이철, 백스터와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고난의 전가로 인한 죄 사함이 칭의의 주된 부분이라는 면에서 칼빈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율법준수의 전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칼빈과 다르다. 또한, 그리스도의 수동적 복종의 전가와 능동적 복종의 전가를 둘 다 인정하는 오웬과 바빙크, 박형룡, 신호섭의 주장은 칼빈이 수동적 순종의 전가만이 아니라 적어도 아홉 군데 이상에서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진술하고 있으므로 칼빈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수동적·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를 둘 다 인정하는 부류가 칼빈과 더 가깝다고 판단된다.
    
3. 이 교리를 부정하는 견해의 장단점

 

이 견해의 장점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의인으로서 죄인을 대신한다는 것, 즉 흠 없는 제물만이 제사 제물이 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만약에 율법을 순종하는 것을 영생을 얻기 위한 권리를 획득하는 것으로 한번 계산하고, 다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은 것을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형벌을 치른 것으로 계산한다면 같은 순종을 두 번 계산하는 셈이 된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처럼 보인다.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는 십자가에서 희생제물로 드려지기 위한 준비였다는 것이 이 주장의 요지이다.


둘째 장점은 수동적 순종으로 말미암은 죄 사함을 표현하는 성경구절이 능동적 순종으로 말미암는 칭의교리를 지지하는 구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견해의 상당한 강점이다. 찬송가 가사만 보아도 온통 이 관점을 지지하고 있다. 레위기 전체가 이런 관점을 지지하고 있다. 하나만 살펴보자.

 

레위기 4:32-33, “그가 만일 어린 양을 속죄제물로 가져오려거든 흠 없는 암컷을 끌어다가 그 속죄제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속죄제물로 잡을 것이요.” 여기에서 죄인의 죄는 속죄제물의 머리에 안수함으로 전가된다.

 

그러나 제물의 흠 없음은 속죄제물의 자격으로 필요한 것이지 사람에게 직접 전가되는 의가 아니다. 흠 없는 속죄제물의 피는 죄인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제사드리는 자의 의로움을 가져다 줌으로 계산을 끝낸다. 이는 레위기 전체가 수동적 전가 교리를 지지하고 능동적 순종의 직접적인 전가 교리를 지지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단지 흠 없는 제물이라는 말에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생애가 제물의 자격으로서 수동적 순종의 전제조건이 될 뿐이다.


이 견해는 얼핏 보면 단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신부인 신자와 신랑인 그리스도의 결혼예물 교환이라는 비유로 보면 단점이 나타난다. 신부인 신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신랑인 그리스도에게 전가하고, 그리스도는 자신의 의를 신부에게 전가한다. 그래서 신부는 그리스도의 의로 의롭다고 여겨진다.

 

여기에서 자신의 죄가 신랑에게 옮겨져서 다 탕감될 뿐만 아니라 신랑이 갖고 있는 의, 즉 율법준수도 신부가 한 것처럼 계산된다. 그래서 그 결과 영생과 양자됨을 얻는다. 의의 전가 교리를 인정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견해를 정당화하고 수동적 전가 교리만을 인정하는 자들을 비판한다.


둘째 단점은 만약에 그리스도가 본질적으로 의인이기에 십자가에서 죽어서 우리를 구원한다면, 그렇게 일생 동안 사역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태어나서 아무 때나 돌아가셔도 의인으로서 죄인을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므로 공생애의 사역이 꼭 필요하지 않게 된다.


셋째 단점은 칭의가 단지 죄 사함, 즉 죄의 무전가라면, 신자는 죄를 범하기 전의 아담의 상태에 머물게 된다. 그러면 영생을 얻을 권리가 주어진다고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죽을 수도 있고, 죽지 않을 수도 있는 모호한 상태로 남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우리 대신 지켜서 첫째 아담이 실패한 계명을 완수함으로 영생을 얻을 권리를 얻었다20)고 하는 것이 우리가 우리 죄로 지옥에 가지 않고 그리스도의 공로, 즉 그의 순종의 전가로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더 논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20) 칼빈도 타락 전 아담의 상태는 지상적이며 완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the state of man was not perfected in the person of Adam......whereas before the fall of Adams man’s life was only earthly, seeing it had no firm and settled constancy.” John Calvin, Commentary on Genesis 2:7. “또한, 그의 생명은 몸과 영혼과 같이 모든 면에서 행복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영혼에 바른 판단과 감정의 바른 다스림이 있고, 생명이 다스렸기 때문이다. 그의 몸에도 결함이 없었으므로, 그는 죽음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다. 그의 지상적 생명은 일시적일 수 있으나 그는 죽음과 상처없이 천국으로 이동되었을 것이다.” Calvin, Commenary on Genesis 2:16. 이런 칼빈의 진술은 하나님을 자신의 통치자로 잘 섬길 때, 그 증거로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살았을 때 누릴 영생이라고 할 수 있다.

 

4. 이 교리를 인정하는 견해의 장단점

 

이 교리를 인정하는 것의 장점은 행위 언약을 잘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아담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죽지 않는 영생의 상태에 이르러야 하는데,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실패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 떨어져서 모든 후손이 지옥형벌을 받을 운명에 처해졌다. 율법에 의하면, 율법을 어긴 자는 영벌에 처해야 한다. 이것을 인간이 감당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보내셔서 대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그리고 아담이 마땅히 순종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도달해야 할 영생의 상태에 이르도록, 우리 대신 율법을 순종해 신자에게 전가해 주셨다는 것이다.21)

21) Johnathan Edwards, Sermon on John 16:8, in Sermon and Discourse, 1723-1729(Yale), 14:396.


 그리스도가 율법을 순종했다는 것은 그의 생애 내내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설명은 바로 위에서 제시한 결혼식에서 신부인 신자들과 신랑인 그리스도와의 예물 교환 비유로 잘 설명이 된다.


이 견해의 첫째 단점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순종을 둘로 나누어서 두 번 계산한다는 것이다. 능동적 순종은 영생을 위한 권리로, 수동적 순종은 형벌을 치른 것과 같이, 두 번 계산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일평생 순종한 것은 속죄 제물의 자격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수학적으로 타당해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단점은 흔히 말하는 대로 “우리가 이미 율법을 지킨 것처럼 간주된다면, 다시 말씀을 순종하며 살 필요가 없지 않는가” 하는 율법폐기론의 위험이다. 그러나 후크마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 “칭의가 죄 사함이라면 이미 그리스도의 속죄로 모든 죄가 사해졌으니 얼마든지 죄를 지어도 되지 않는가?”22)라고 반문할 수 있다고 하였다.

22)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300.


후크마의 반박은 논리적이지만 그보다는 성화가 없는 칭의가 없으며 칭의시키는 믿음은 살아 역사하는 믿음이고 선행이 그런 믿음의 증거가 된다고 하여 율법폐기주의를 경계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셋째 단점은 본문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교리를 직접적으로 지지하는 성경 구절이 로마서 5:19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시피 하고, 이 교리를 위해 인용하는 구절들이 이 교리를 선명하게 지지한다고 보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레위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방식으로 성경이 수동적 순종의 전가를 더 많이 강조하는 데 비해서, 의의 전가 교리를 지지하는 네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두 순종을 거의 동등하게 보려는 경향을 조금은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V. 나오는 글

 

논자는 요즘 뜨겁게 인터넷을 달구며 논쟁을 벌이고 있는 정이철과 신호섭의 논쟁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에 관한 찬반의 입장에서 각 편에서 네 명의 학자들의 입장을 다루었다. 그리고 칼빈의 입장은 수동적 순종의 전가를 더 많이 제시하고 있지만, 『기독교강요』 2.13.3, 2.16.5, 3.11.23, 2.17.5, 로마서 3:31; 5:19-20, 고린도후서 5:21과 고린도전서 1:30, 에스겔 18:14-17에 대한 주석에서 명료하게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를 지지하고 있으므로, 칼빈은 능동적, 수동적 순종의 전가를 둘 다 말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따라서 수동적 순종의 전가와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둘 다 강조한 존 오웬, 바빙크, 박형룡, 신호섭이 칼빈과 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각 입장이 가진 논리성과 그 논리의 장단점을 짧게나마 핵심적으로 다루었다. 사실 이 문제는 어떻게 보면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적어도 논자가 소개한 학자들 중 웨슬리를 제외한 양측 진영 일곱 명은 다 개혁신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다 개혁파가 아니라 알미니안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위 이론을 주장하는 누구도 신자가 칭의된 후에 회개를 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선행을 행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의의 전가 교리를 반대하는 입장은 그 교리가 율법폐기주의로 갈까 봐 걱정해서 주장하는 것이고, 찬성하는 입장은 칭의 교리가 로마교회처럼 다시 행위를 조건으로 하는 것으로 변질될까 염려해서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칭의 교리가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이고, 칭의가 성화가 없이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성화와 더불어 구원론의 양대 축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서로 간의 건전한 비판과 대화가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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