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신대 120주년 기념 특집3] 합신 분열(1980)

총회신학대학에서 합신으로 분열(1980)

소재열 | 기사입력 2021/03/18 [03:19]

[총신대 120주년 기념 특집3] 합신 분열(1980)

총회신학대학에서 합신으로 분열(1980)

소재열 | 입력 : 2021/03/18 [03:19]

 

총회신학대학에서 합신으로 분열(1980)

 

 

(리폼드뉴스한국의 장로교회는 미국의 북장로회와 남장로회를 비롯하여 호주 장로교회와 캐나다 장로교회 선교부가 파송한 한국 주재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성장하게 되었다.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복음이 증거된 초기부터 각 지역에 복음이 증거되고 아직 교회가 설립되어 성립되기 이전에 한국인 중심의 믿음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공동체에 선교사들이 직접 관리하고 설교를 할 수 없었다. 이런 경우, 북장로교 선교부가 마련한 피선교지 한국에서의 선교와 관련한 규범이 1891년에 마련되었다. 선교사를 도와 함께 사역했던 한국인 중심의 직분을 열거했다.


선교사를 도와 기독교 책을 직접 팔아 생계도 유지하며 경우에 따라서 예배와 성경공부를 돕도록 하는 매서인(권서인)들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매서인들은 선교사들로부터 훈련을 받아야 했다. 선교사들은 이들에게 성경의 중심사상과 신앙생활의 원리, 전도법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당시 유교적 윤리의식 의해 여성에게 접근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여성 선교사들로는 한계가 있었다. 선교사들을 도와 여성에게 접근하여 전도하기 위해 전도부인이 있었다. 이들 역시 철저히 선교사 들로부터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조사들이 있었다. 선교사들로만 감당하기 힘들었다.

 

선교사들의 일꾼 양성

 

그래서 선교사들을 돕고 교회들을 돌보는 조사들이 있었다. 조사 제도가 도입된 것은 1891년이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편에 의하면 최초의 조사는 백홍준이었다. 조사는 유급으로 사역하였다. 그러나 선교사와 조사가 미치지 못한 지역과 교회를 위해 무보수인 영수(領袖)직을 두었다. 이는 북장로교 선교부가 제정한 선교규범에 의한 직분들이었다.


이렇게 하여 초기 선교사들과 한국인 직분자들의 활발한 효과적인 전도로 복음이 증거되었고 믿는 무리들로 인하여 각처에서 교회가 세워졌다. 교세가 급증하자 교회를 돌볼 수 있는 교역자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890년 초가을 언더우드는 자신의 사랑방에서 신학반(Theological Class)으로 모임을 갖고 성경을 가르치는 사경회였지만 피선교지인 한국에 교회를 섬길 수 있는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시작하였다. 각 지역 사경회에서 우수한 사람을 서울의 언더우드의 신학반에서 훈련을 했다. 이곳 교육을 통해 성경, 교회, 치리 등의 교육이 이루어졌다.

 

1901년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설립하고 초대 교장이었던 마포삼열(S. A. Moffett) 선교사는 1916년 신학교 약사에서 신학교가 신학반의 발전으로 성립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마포삼열, “장로회신학교약사,” 『神學世界』 제1호(1916), 164.).

 

장로회 합동 공의회에서 신학교 설립을 결의(1901)

 

교회 성장에 따른 지도자의 필요성과 네비우스 선교방식에 따라 1901년 장로회 합동 공의회에서 신학교 설립을 결의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편, 82). 학교 장소를 두고 경성(서울)과 평양이 거론되었지만 평양으로 결정되었다. 학교 이름은 ‘대한야소교장로회신학교(大韓耶蘇敎長老會神學校)’라고 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한 강제 병탄 후에 ‘대한’이 ‘조선’으로 변경되었다. 이렇게 하여 평양에 장로회신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이 학교는 1938년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로 스스로 문을 닫았다. 1940년에 일제 의해 선교사들에 대한 강제 출국으로 이어졌으며, 문을 닫은 신학교는 결국 문을 다시 열지 못하였다.

 

이러한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정신을 이어받아 남산에서 장로회신학교가 개교(1948. 6. 3.)되었다. 이 신학교는 총회신학교, 총회총신대학과 총신대학교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총신대학교는 총회가 설립한 신학교로 총회의 지도자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1980년에 와서 총회총신대학(총신대학교)에서 학생 소요사태로 인해 일부 학생들과 교수들이 이탈하여 합동신학교(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전신)를 설립했다.

 

방배동 총회신학교로 분열(복구)


당시(1978년) 총회총신대학이 좌경되었다는 명분으로 방배동에 총회신학교를 설립(복구)했다. 그리고 이 신학교를 운영하는 총회(제64회 총회, 1979)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보수)로 분열되는 아픔을 겪었다. 총회신학대학의 학생들 중에 433명이 총회신학교에 참여했고 200여 명이 남게 되었다.

 

복구신학교의 이사장은 정규오 목사였고 초대학장 서리로 박영환 목사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박아론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렇게 하여 1979년 1월에 총회신학교가 복구되었다. 총회총신대학 뿐만 아니라 총회는 지각변경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1979년 2월 6일과 7일에 긴급 총회총신대학 법인 이사회와 정체이사회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박아론 교수는 소위 복구신학교에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므로 파면하는 결의를 하였다. 그해 전국 춘계노회에서는 복구신학교에 학생들을 추천하지 않기로 하고 불법성을 규탄하며 불법신학교로 규정했다.


1979년의 총회총신대학의 신입생을 모집했다. 그런데 대학부는 244명, 신학부는 무려 422명이 입학하여 약 700여 명이나 되었다. 복구총신으로 이탈한 학생들만큼의 인원으로 회복되었다. 학교는 동요 없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김요나, 「총신 90년사」, 474.).


그해 9월에는 결국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합동보수라는 이름으로 분열되었다. 총회가 분열된 후 신학교가 분열된 것이 아니라 먼저 신학교가 분열된 후 총회가 분열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1959년 통합측과 분열은 먼저 총회가 분열된 후에 신학교가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총회 정치교권 세력이 신학교로 몰려오다 

 

역사적으로 언제나 총회와 신학교의 교권이 서로 연계되어 있었으며, 총회와 신학교의 교권을 장악하려는 보이지 않는 정치적인 암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만큼 신학교의 교권은 총회의 교권을 장악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반대로 총회의 교권은 신학교의 교권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총회와 신학교의 교권에서 중심에서 벗어난 세력이 새로운 중심교권 장악에 실패하자 명분론으로 총회총신대학의 좌경화를 주장하며 별도로 총회신학교를 복구하였다는 평가가 있었다. 이런 형식이 아니면 복구신학교를 설립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총회총신대학의 좌경화 논리는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총회총신대학 개혁안’ - 운영주체 개편


1979년 합동보수로 분열된 이후 1980년 2월 28일에는 총회총신대학 이사회는 학교 운영기구를 개편하여 새로운 학교 발전을 위한 ‘총회총신대학 개혁안’을 마련하여 시행에 들어갔다. 학교를 4원 체제로 운영하는 방안으로 첫째 대학원, 둘째, 대학, 셋째, 신학연구원, 넷째 교역자연수원이라는 학제였다.

 

대학원은 이미 1978년 2월 15일에 문교부로부터 인가 받은 상태였다. 신학석사 과정(Th.M.)과 기독교 교육 석사과정(M.A.)을 인가받아 운영해 왔다. 이 과정의 입학자격은 4년제 정규대학을 졸업한 자라야 했다. 대학은 문교인가를 받은 과정으로 신학과 종교교육학과, 종교음악과 등 3학과였다. 

 

다음은 신학연구원이다. 이 과정은 대학 졸업자가 입학할 수 있으며 3년 6학기 과정이었다. 마지막으로 교역자연수원은 고등학교 졸업한 자로서 만 27세 이상된 자로서 목회경험이나 시무장로 경력 3년 이상 된 자가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또한 지방신학교 졸업자는 만 30세 이상으로 목회 경험이나 시무장로 경력 5년이었다. 여교역자 연수원도 있었다.


이러한 학제 개편에 따른 각각 운영의 주체는 대학원장, 대학장, 신학연구원장, 교역자연구원으로 세분화 하였다. 총학장 제도를 두어 4원 학장을 총괄하고 총학장 직속으로 ‘기획실’을 두었다. 이렇게 개편된 기구에 의해 대학원장에 박윤선 박사, 신학대학장은 김득룡 박사를 대학부장으로 직무상 학장 직무대리로 임명되었다. 신학연구원장은 신복윤 박사를, 교역자연수원 원장에 차영배 박사를 임명하였으며, 총학장에 당시 신학대학장인 김희보 박사가 임명되었다.


1976년부터 총회총신대학의 좌경화가 되었다는 이야기들을 무마시키기 위해 총신은 자체적으로 신학적 입장에 대한 내용을 작성하여 발표했다. 이러한 문제는 총회 분열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소요사태는 발생되었다.

 

방배동 총회신학교 분열 후에도 계속된 소요

 

방배동 총신으로 떠날 학생들은 다 떠난 후에 계속하여 총회총신대학 운영 문제에 비리가 있다는 학생들의 성명서가 나돌기 시작했고 결국 수업거부사태가 일어났다. 1979년 9월 총회가 파회된 후 그해 10월 26일 10ㆍ26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되어 전국이 계엄령 하에서 학교는 정상수업을 할 수 없었다.

 

학생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기숙사 시비에 대하여, 조경사업에 대하여, 학교 운영 경상비에 대한 4억 5천 만 원에 대한 정치자금 설에 대해 감사결과 전혀 사실무근임이 밝혀졌다(김요나, 「총신대학교 100년사」, 490.).


이 보고서는 총회총신대학 전체이사장 최정복 목사, 법인 이사장 백남조 장로, 수습 및 전권위원장 박성겸 등 3인의 명의로 1979년 12월 14일에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듬해인 1980년 2월 22일, 신학원 제73회 졸업식(대학 10회)에서 다시 한번 소요사태가 재발되었다. 1980년 3월 3일 제1학기 개학식을 몇 일 앞두고 교수회는 2월 22일 졸업식에서 소요를 일으킨 5명의 학생들에 대해 학칙에 따라 무기정학을 처분하여 이를 공고했다.

 

교수회는 다시 3일 후 신학원 3명의 학생들에 무기정학을 처분하여 이 역시 공고했다. 이러한 교수회의 강경 대응은 학생들의 강경한 시위로 연결되었다. 이때 내건 구호는 “이영수 물러가라”, “학장 김희보는 사퇴하라”였다. 이들은 호남과 황해도 세력으로서 교권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으나 1960년 대 말부터 1970년에 이르러 교권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했으나 분열 전후하여 중심에서 주변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는 1979년 합동보수의 분열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학생 소요 사태를 위한 박윤선 박사 학장 서리 임명 

 

학내 시위는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교수 이사들의 차량 5대가 파손되는 폭력 시위는 계속되었다. 사태의 책임을 지고 김희보 교수가 사표를 제출했으며, 이사회는 1980년 4월 11일에 이사회를 소집하여 사표를 수리하고 박윤선 박사를 학장 대리로 임명했다.

 

그러나 사직서를 낸 신복윤, 김명혁, 윤영탁, 정성구, 차영배, 박형용 등 6명의 교수에 대해 사직서를 반려했다. 박윤선 박사는 7월 8일 소집된 이사회에 학장 직무대행직을 사임할 의사를 보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9월 신학기 개강에 맞추어 귀국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미국으로 출국하고 말았다.


이 부분에서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이승구 교구는 “총신 상황은 더 악화되어 총신에서는 정암을 다시 모셔 와서 학내 문제를 해결하고자 1980년 4월 21일부터는 학장 서리를 부탁하게 된다. 그러나 정암이 총신에 와 있어도 총신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당시 교권의 대표자인 이영수 목사에게 정암이 한국교회 전체를 위하여 교회 정치로부터 물러나도록 호소해도 듣지 않고, 오히려 위협하는 말로 대응할 뿐 아니라 행정에는 무능한 인물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자 정암은 학장 서리직을 사임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이승구, “정암 박윤선 목사의 생애와 사상”).

 

학생들의 경리 부정 고발 사건, 무혐의 - 사라진 명분


결국 학생 146명은 학교 경리부정으로 당국에 고발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 고발은 무혐의로 종결되었다. 격렬한 학교시위가 진행되는 동안 학교 게시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공고문이 붙었다.

 

개혁신학교(가칭) 개교
한국 개혁주의 신학의 본류이신 신복윤, 김명혁, 박형용, 윤영탁. 최낙재 박사님을 모시고 정통 개혁파 신학교를 개교합니다. 뜻이 있고 결단의 용기를 가진 많은 학우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시간 : 금월(28일) 12시
임시집회장소 : 남서울교회(신반포)
(교통편: 88, 16, 289, 567, 90, 86 신반포 하차)
-총신대 신학부 학우회-

 

위와 같은 공고문은 이미 일부 교수들과 내통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내용이다. 학생들만으로 새로운 신설학교가 설립될 수는 없다. 이미 총회총신대학 일부 교수들이 신설 학교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980년 10월 23일(목) 경건회 시간이 끝나자 주동 학생들은 광고를 통해 ‘합동신학교’의 개교를 알렸다.

 

총신의 부패와 개혁을 주장하면서 신설학교에 합력할 것을 선동했다. 이렇게 하여 700여 명의 학생 중에 400여 명이 신설학교로 떠나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1980년 9월에 문교부에 제출한 신학대학원 인가가 11월 3일에 승인되었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떠났던 학생 중에 300여 명이 다시 돌아왔다. 신설 신학교로 떠난 학생은 겨우 150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

 

신학대학원 인가


문교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신학대학원은 3년 과정의 특수대학원이다. 인가받은 신학대학원(M.Div.) 정원은 60명이었다. 종전의 신학연구원이 신학대학원으로 인가를 받아 승격된 셈이었다. 신학대학원은 편재상 대학과 대학원과는 별도로 특수대학원이 되었다. 이는 교단의 목사를 양성하는 학교로 이 과정을 이수하면 강도사 고시 응시 자격을 부여했다.

 

방배동 총신은 신학 좌경화 합신분열은 총신 부패 주장


결국 학내 사태는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전초전과 같았다. 고발장에 서명한 146명을 비록한 이들은 1980년 11월 11일 남서울교회당(홍정길 목사)에서 개교식을 가졌다.  개교식을 거행한 후 일주일 만인 1980. 11. 18.에 박윤선 박사가 교장에 취임하여 합류했다.


신설 신학교에 참여한 6인 교수(신윤복, 윤영탁, 김명혁, 박형용, 최낙제, 박윤선)들의 신학교 설립취지에 대해 당시 크리스챤 신문에 광고로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설립취지>


1. 교권의 횡포로 말미암아 누적되어온 부조리와 부패 때문에 사분오열된 교단의 정화 및 합동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본 교를 설립한다.


2. 우리 교수일동은 새로운 교단형성을 결코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안에 그대로 머물기를 원한다.


3.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인 개혁주의를 재확인하여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의 주권사항을 내세우며 경건과 학문을 동시에 추구한다.


4. 성경원리에 일치한 교회관을 확립, 로마 가톨릭적 교권주의와 권위주의를 배격하여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시며, 그리스도만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깨우치는 동시에, 교회에 내재하고 있는 불완전성에 대한 계속적인 개혁을 추진한다.


그들은 교단을 만들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계속 합동안에 남기를 원했다. 그러나 졸업생들의 장래 진로를 위해 결국 새로운 교단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때 전두환 정권에 의해 1교단 1신학교 정책이 시행되었다. 합동신학교는 무인가 신학교이며 교단이 없기 때문에 폐교될 상황이었다. 이때 합동신학교를 존치하기 위해 1981년에 교단을 만든 후 1984년에 ‘합동신학교’ 인가를 받았다. 1996년에 신학대학원으로 인가를 받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로 개칭되었다. 신학교 이름을 교단이름으로 사용하였다.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에 소재한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연혁에 의하면 “1980. 11. 11.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을 이념으로 하여 참신한 혁주의적 신앙운동과 생활운동을 펴 나아갈 것을 염원 하면서 서울시 강남구 반포동 271-45 소재 남서울교회에서 합동신학원을 개교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박윤선 박사가 1980. 11. 18.에 합동신학원 초대원장에 취임한 것으로 기록된다.


이렇게 하여 1979년 비주류와 분열 후 또다시 발생된 학생 소요사태는 결국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전초전이었으며, 그 계획대로 합동신학교가 신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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