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신대 120주년 기념 특집2] 총회신학교 복구와 총신의 신학적 입장 발표(1979)

총회신학교 복구(1978)와 총신의 신학적 입장 발표와 분열(1979)

리폼드뉴스 | 기사입력 2021/03/13 [22:15]

[총신대 120주년 기념 특집2] 총회신학교 복구와 총신의 신학적 입장 발표(1979)

총회신학교 복구(1978)와 총신의 신학적 입장 발표와 분열(1979)

리폼드뉴스 | 입력 : 2021/03/13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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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폼드뉴스대한예수교장로회 제64회 총회(1979)의 분열은 정치적인 주류와 비주류의 분열이었다. 총회의 격변기에 소위 정치교권의 중심과 주변의 갈등 표출이 결국은 분열로 이어졌다(제64회 총회). 여기서 주류와 비주류의 개념은 총회의 중심적인 축으로 형성된 정치교권을 주류 측이라고 하고 주류 측에 밀려난 정치교권을 비주류라 한다. 이 두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1970년대의 총회의 역학관계를 이해할 수 없다.

 

해방 후부터 1960년대까지 호남과 황해도 교권이 중심(주류)

 

제44회 총회(1959년)에서 통합측과 분열이 있었다. 이 분열을 포함하여 1950년대는 정통보수신학과 자유주의신학 WCC의 에큐메니칼 신학의 대결이라는 측면에서 장로회가 분열이 있었다. 장로회의 신학적 입장에 대한 투쟁한 그룹이 바로 황해도 구룹의 박찬목 목사와 호남의 정규오 목사가 중심이 되어 총회의 신학과 교권의 중심부를 이끌어 갔다. 이러한 교권의 중심세력들은 1960년대의 총회를 이끌어왔다.

 

1960년대 말부터 영남과 평안도 교권이 중심(주류)

 

그러나 1960년 대 말과 1971년의 총회 내 대회제 실시를 통해 영남의 이영수 목사와 평안도의 김윤찬 목사의 두 지도자가 중심이 되어 주류 측인 호남의 정규오 목사와 황해도의 박찬목 목사를 비주류로 밀어내면서 중심의 주류로 등장했다.

 

제50회 총회(1965년) 정규오 목사가 총회장이 된 이후 제51회 총회(1966년)는 박찬목 목사가 총회장이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호남의 정규오 목사와 황해도의 박찬목 목사 중심의 주류측의 전성기가 되었다. 그러나 제52회 총회(1967년) 평안도 출신의 김윤찬 목사가 총회장이 되면서 상황들은 반전되기 시작했다.

 

1967년 5월 4일에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원’아 설립승인을 받은 후 1967년  6월 3일에 각종 학교인 총회신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1969년 12월 24일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인가를 받았으며, 학교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대학’라는 긴 이름으로 변경했다.

 

1969년 2월에 이미 박형룡 박사가 학교법인 설립 후 설립등기를 마친 후 각종 학교로 인가를 받은 총회신학교의 최초의 교장은 박형룡 박사였다. 1969년 12월 24일은 각종 학교에서 정식 대학인가를 받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대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영남과 평안도의 교권에 평안북도 출신의 김희보 교수의 등장

 

1971년 박형룡 박사가 교장직에서 의원면직(依願免職)되고 김희보 교수가 1972년 2월에 제2대 학장(통 13대)에 취임했다. 김희보 교수는 평안북도 청산 출신이었다. 영남 이영수 목사와 평안도 김윤찬 목사의 주류 세력에 김희보 교수가 총회총신대학에 학장으로 낙점되었다.

 

1971년에 이르러 총회총신대학 이사회의 사당동 캠퍼스 이전을 위한 매각 사건이 발생되어 학교법인 이사회, 전체이사회, 실행이사회가 법인 이사회 이사장과 부이사장을 제외한 전원을 사퇴하고 다시 운영을 위한 이사회를 개편했다. 신학교 문제와 더불어 총회의 정치적인 소용돌이로 급물살을 탔다.

 

1972년 9월에 소집한 제57회 총회에는 전남노회장 김재복 목사와 호남대회장 정규오 목사가 총회신학대학 학장 불법선임을 시정해 달라고 청원하기도 했다. 이미 2월에 김희보 교수를 학장으로 선임에 이의를 제기한 헌의였다.

 

이미 호남과 영남측은 1972년에 총회총신대학의 학장 선임에 대한 문제가 정치적으로 민감했다. 이영수 목사와 김윤찬 목사 측은 자파 세력인 김희보 교수를 학장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호남세의 정규오 목사는 김희보 교수의 학장 선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이같은 청원에 총회 본회는 정치부가 심의하여 내놓은 안을 그대로 받았다. 이때 결의된 내용은 “전남노회장 김재복씨와 호남대회장 정규오씨가 청원한 총회신학교 불법처사와 학장 불법선택 취임에 대한 건은 학장 임명은 절차상 문제가 있었으나 이미 취임 시무 중이므로 인정함이 가한줄 아오며, 여타건은 신학교 이사회에 맡겨 처리하심이 가한줄 아오며”라고 결의했다.

 

학장 선임의 절차는 문제가 있었지만 이미 학장에 취임했으니 인정한다는 결의를 하므로 모두를 충족시키는 결의를 했다. 이로서 총회총신대학의 이사장 백남조 장로와 전체이사회 이사장인 김윤찬 목사, 총회총신대학의 학장인 김희보 교수는 모두 영남세력과 평안도 세력으로 총회와 총회총신대학 내 중심세력으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었다.

 

중심에서 주변으로 전략한 호남과 황해도 교권

 

이제 호남의 대표 지도자인 정규오 목사와 황해도 대표지도자인 박찬목 목사 측은 정치교권의 중심에서 주변인 비주류가 되어가고 있었다. 1975년 12월 16일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총신대학’이 ‘총신대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동안 정규오 목사와 박찬목 목사와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총회의 정통보수신학을 지켰던 박형룡 박사가 1978년 10월 25일에 향년 82세의 일기로 소천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동안 믿고 의지했던 기둥과 같은 학자이며, 교정가인 스승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입관예배 설교는 정규오 목사가, 장례식 설교는 노진현 목사가, 하관예배 설교는 증경총회장 박성겸 목사가 맡았다. 박형룡 박사는 장로회 총회의 스승이며, 학자이며 총회를 정통보수신학의 기초위에 든든히 세웠다.

 

이런 일들을 해방 후 교회를 재건하며 선교사들로부터 이어왔던 옛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신학적 전통을 계승하는 데 앞장섰던 목회자가 정규오 목사와 박찬목 목사의 주류 세력들과 함께 하여 이룩해 낸 성과였다. 그런데 그 스승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총신의 좌경화 명분으로 방배동에 복구 신학교 이사장 정규오 목사의 변

 

총회와 총신대학교의 중심교권에서 밀려난 정규오, 백동섭, 박찬목, 박병진, 노진현, 이성헌 목사 등은 ‘옛 총신 보수의 요새’를 다시 구축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방배동에 총회신학교를 세우는데 합의하였다.

 

제64회 총회(1979. 9. 20.)에서 분열되기 1년 전에 총신대학교를 개혁하고자 총신 복구신학교가 탄생하였다. 복구신학교 이사장은 정규오 목사였다. 그는 1978. 12. 15. 이사장 취임사에서 “현 총신대학은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직영하는 신학교로서는 완전히 이탈하여 신학적으로나 행정적으로나 운영적인 면에서 사실상 관계가 없게 되었으므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를 복구하여 명실상부하게 총회가 직영하는 총신을 만들기 위하여 지난 [1978] 12월 7일 서울 방배동 영광교회당에 총신 복구를 위하여 이사회가 모여 불초한 종이 이사장에 피선되었다”고 하였다.

 

정규오 목사는 이어서 “현재 우리의 총회 상황에서는 도저히 개혁이나 정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졌음을 하루 속히 정통보수신학을 회복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고 언급하며, “나는 백년 전통과 정통보수신학을 계승하는 평양신학교, 장로회신학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대학을 이어받는 총회신학교를 복구하기로 하고 각 노회에서 이사가 선출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이사회를 조직하게 되었고 그 이사장에 취임케 된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나는 결코 별개의 총회를 자진해서 조직하지 않는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이같은 복구신학교가 출현하게 되자 ‘대한예수교장로회 전국연합회 회원 일동’ 이름으로 발표된 1979년 2월 27일자 「기독신보」 성명서에서 “우리는 총회와 신학교가 가지는 철저한 정통의 보수신앙을 사수하며 신학사상의 변질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소위 총회복구 신학교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밝히며 “본 총회를 끝까지 지킬 것”이라고 다짐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정규오 목사가 총신 복구신학교를 세우자 “이영수 목사 등 당시 주도권을 잡고 있던 측은 개혁을 위한 반응보다는 총신 복구신학교의 불법성만을 강조”하자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정규오 목사는 “나는 신학과 신앙이 같을 때에는 … 절대로 분열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신학과 신앙이 같다는 의미는 “총회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신학과 신앙이 동일하다고 믿는 고로 총회의 분열을 결사 반대한다”고 하였다.

 

이같은 성명서를 발표한 이유에 대해 “총회신학교의 정비재건, 총회의 정화, 총회의 분열을 방지하고 하나되는 운동에 다소라도 도움이 될까하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전국교회 앞에 이상 성명합니다”라고 밝혔다.

 

제64회 총회(1979년) 분열과 분열전 총신의 신학적 입장 발표

 

이같은 성명서는 제64회 총회가 회집되기 2개월 전에 발표하였다(1979. 7). 1979년 9월 제64회 총회가 대구동부교회당에서 개최되었지만 총신 정화를 외치는 총신 복구신학교 운영에 동참했던 측은 총회 장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에 총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1979년 11월 6일 청암교회당에 집결하여 개혁총회의 전명(前名)인 합동보수(合洞保守) 총회를 결성하였다.

 

1979년 제64회 총회에서 분열은 두 세력 간의 다툼이었고 호남 중심의 정규오 목사 중심의 교권 세력이 영남 중심의 이영수 목사 중심의 교권 세력의 갈등으로 빚어진 분열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주류 측의 총신 김희보 학장의 성경해석의 신학적인 문제가 도화선이 되기도 하였다.

 

이 문제는 1976년 겨울호 『신학지남』에 김희보 학장의 “족장시대의 이방법(異邦法)들에 관한 소고”가 발표되자 이서이 문서설로 비화되었고 심지어 총신이 좌경되었다는 비난과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 문제가 불거지자 1977년 7월에 승동교회에서 전국 노회장 연석회의를 통해 문서설이 아니라는 취지의 설명회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총신이 좌경화 되었다고 하자 제64회 총회(1979년) 직전에 칼빈의 5대 강령에 입각한 “총신 교수의 신학적 입장”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총신이 좌경화 되지 않고 여전히 정통 보수신학에 의해 학교가 운영되고 있음을 전국교회에 알렸다.

 

소재열 목사(한국교회사 Ph.D.)

-위의 글은 소논문으로 작성된 내용을 요약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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