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신대 120주년 기념 특집1] 총신대 사당동 캠퍼스 매각 미수 사건

1971년의 총신의 먹구름 진압

소재열 | 기사입력 2021/03/13 [14:04]

[총신대 120주년 기념 특집1] 총신대 사당동 캠퍼스 매각 미수 사건

1971년의 총신의 먹구름 진압

소재열 | 입력 : 2021/03/13 [14:04]

 

1965년 3월 29일자 기독신문 총신 교사 신축 기공예배 기사; 총신은 전국 교회의 지원으로 건축됐다.  © 리폼드뉴스

 

(리폼드뉴스문교부로부터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원’에 대한 설립승인(1967. 5. 4)을 받은 후 1967년  6월 3일에 각종 학교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그 후 1969년 12월 24일에 대학인가를 받았다. 학교명칭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대학’으로 변경하였다. 긴 이름의 학교 명칭이었다.

 

1969년 2월에 이미 박형룡 박사가 학교법인 설립을 허가받고(1967. 5. 4), 5월 7일에 설립등기를 마친 후 1967. 6. 3.에 각종 학교로 인가를 받은 총회신학교의 최초의 학장은 박형룡 박사였다. 1969년 12월 24일은 각종 학교에서 정식 대학인가를 받아 대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다. 처음 대학으로 인가를 받은 학교 명칭이 바로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대학’이었다.

 

신학교의 어려움은 계속되다.

 

대학인가를 받았지만 1959년 통합측과 분열한 이후 합동측은 경제적인 어려움이 극심했다. 전국 교회의 도움을 요청하면서 신학교를 위한 지원을 받기 위한 동기부여로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만큼 다급했으며, 명분이 있는 일이었다.

 

1966년 봄부터 시작한 사당동의 신축공사는 처음에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경제적인 자금문제로 늘 어려움을 겪었다. 전국 교회의 지원이 있었지만 만족할 정도의 자금에는 이르지 못했다. 건축비는 그렇다치더라도 신학교 운영을 위한 실제적인 자금은 늘 부족했다.

 

사당동 신학교 부지와 교사 매각과 이전 계획 파장

 

교육부로부터 설립허가를 받은 학교법인 이사회는 1967년 6월 15일에 첫 이사회로 회집되었다. 이때 이사회는 어려운 학교 사정을 감안하여 이사들이 먼저 솔선수범하기로 하고 이사 분담금을 책정하여 재원 일부를 담당하기로 했다. 장로 이사는 월 3만 원, 목사 이사는 월 1만 원으로 하여 월 30만 원으로 하기로 하고 그해 7월부터 실시하기로 결의했다. 이 이사회를 학교법인 제1회 이사회라 한다.


1970년에 이르러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원’은 학교 발전과 미래를 위한 목적으로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1970년 11월 16일 승동교회에서 실행이사회가 모였다. 실행이사회란 법인이사 전원과 전국 노회에서 파송된 전체이사 가운데 일부로 구성된 이사회였다.

 

이날 모임 실행이사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대학’을 발전을 위하여 사당동 현 부지와 교사를 매도하고 새 후보지를 마련하여 이전하기로 하고 이전할 후보지를 위해 7인 위원(김윤찬, 김처호, 양재열, 문재구, 고응진, 이환수, 양화석)을 선임했다. 이러한 결정들은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 공개적으로 이 일을 추진할 경우, 제대로 추진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학교법인 소유의 부지와 교사를 처분하려면 주무관청인 문교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승인을 미룬 채 1970년 12월 7일에 1억 4천 5백만 원에 매매 하기로 하고 원매자와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금으로 1천 4백 5십만 원을 받았다.

 

이 계약금 가운데 150만 원은 문교부의 수속을 위해 양평에 52만 평의 땅을 계약하였다. 이러한 계약을 마친 후인 1972년 2월 3일에 문교부에 학교이전 승인 신청을 하였으며,  1971년 2월 9일에 학교법인 이사회 결의가 있었다. 신학교 이전과 계약은 실행이사회의 결의로 진행하였지만 법적인 매매 체결은 학교법인 이사회의 결의가 있어야 했다.

 

학생들의 소요사태와 성명서 발표

 

1966년 신학교 신축을 시작한 7년 가까이 공사는 완료되지 않았으며, 전기시설 공사마져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생들의 불만은 터져 나왔다. 마치 책임질 사람이 없는 것처럼 신축교사가 답보상태였다. 당시 교수들의 급료도 지급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결국 학생들의 불만은 가득했다.

 

300여 명의 학생들은 1971년 7월 8일에 예정된 1학기를 종강하고 방학을 6월 23일로 앞당겨 발표하여 학생들의 소요를 막아보려고 하였지만 오히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말았다. 학생들의 요구는 첫째 지방신학교를 철폐하라. 둘째, 지방신학교 이사로 총신이사로 겸직한 겸직이사 물러가라는 요구조건을 내세웠다. 겸직 이사들이 총신에는 관심이 없고 지방신학교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에 현 총신의 문제해결에 무관심 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하기 방학이 되자 대학부와 신학부가 연대하여 각 학급에서 3명씩 대표들을 뽑아 21인 전권위원회를 조직하고 방학 중에도 계속 투쟁하기로 하였다. 21인 전권위원회는 이사회와 총회를 향하여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작성하여 전국 교회에 호소했다.

 

<대 이사회>


1. 학원 교육 시설을 완비하라
  ① 기숙사를 신축하라
  ② 현 교사를 완공하라.
  ③ 전기를 가설하라.
  ④ 학습시설을 확보하라.


2. 실질적인 교수진을 강화하라.
  ① 교육령에 입각한 참신하고 능력있는 교수진을 보강, 확보하라.
  ② 학교에 지대한 공이 있는 노교수를 명예교수로 추대하라.


3. 학원경영의 합리화를 기하라.
  ① 현 교사 불법적인 매각을 즉시 중지하라.
  ② 3천만 원 모금을 조속히 완료하라.
  ③ 교수, 강사의 처우를 개선하라.
  ④ 공석 중인 총무처장을 능력있는 행정가로 조속히 발탁하라.
  ⑤ 실무이사를 학교에 상주하라.

 

<대 총회>


4. 현재 이사진을 개편하라.
  ① 불법적인 교사 매각을 시도한 이사는 사퇴하라.
  ② 파별 및 지방색을 선동 노정해온 이사는 사퇴하라.
  ③ 지방신학교 책임자 및 그와의 겸직이사는 사퇴하라.
  ④ 효율적 이사업무 수행 불능의 노이사는 사퇴하라.
  ⑤ 참신하고 능력있는 새 이사진을 구성하라.


5. 총회 직영 신탁 교육기관인 본교의 발전을 위해 지방신학교를 폐쇄하라.

이에 이사회와 각 노회와 총회는 조속한 시일 안에 합법적 방안을 모색하여 명확한 결정을 내리고 구체적 해결에 임하라.

 

<행동강령>
이상과 같은 우리의 요구 사항이 관철되었다고 인정될 때까지 전국 각노회장의 추천으로 본교에 입학한 우리 3백여 학우는 자퇴를 각오하고 끝까지 단결, 투쟁한다.

 

총회신학대학 실행이사회의 사태 수습

 

이같은 학생들의 성명서가 나가자 총회신학대학 실행이사회는 1971년 7월 15일과 16일에 평안교회당과 역전 미흥여관에서 번 갈아 모여 사태 수습을 위한 대책을 논의했다. 미흥여관은 한 권사가 운영한 여관으로 지방에서 서울에 상경한 인사들이 단골 숙소로 사용한 곳이다.

 

일차적으로 학생들의 요구인 공석 중인 총무처장에 양화석 목사를 선임하고 전기공사를 조속한 시일내에 마무리 하도록 했다. 각 교실의 미장 공사는 방학중에 진행하기로 했다. 자금이 부족하므로 기채하여 공사를 진행하기로 하고 이 일을 위해 문재구, 백동섭 목사와 양재열 장로를 선임했다. 학생 전권위원회는 실행이사회가 학생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줌에 따라 새학기부터 수업을 진행한다며 통지하였다.

 

학교법인 이사, 전체이사, 실행이사 전원 사퇴 결의와 재편

 

제56회 총회(1971. 9. 23)가 회집되기 직전인 9월 13일에 학교법인 이사회가 승동교회에서 모였다. 이날 회의진행은 학교법인 이사장인 백남조 장로기 진행했다. 이사회가 그동안 물의를 빚어온 총회신학대학 사태에 책임을 지고 이사장과 부이사장을 제외한 법인 이사 전원 사퇴하기로 결의했다.

 

또한 다음날인 9월 14일에는 승동교회에서 회집된 실행이사회는 이사장인 노진현 목사의 사회로 회의를 가졌다. 이날 학교법인 이사회, 전체이사회, 실행이사회 등 3개 이사회는 모든 해산키로 했다. 대신 32개 노회에서 파송한 1인씩으로 하여 총회신학대학 임시운영위를 조직하기로 했다. 또한 총신대 재산 보호를 위한 7인 위원회를 조직했다.


전체이사회는 제56회 총회에 청원서를 제출하면서 총신 사태 해결을 위해 9인 위원을 선정하였다고 보고했다. 청원서에서는 “본 신학교 매매설은 교회의 물의를 야기시켰고 학생들의 수업거부 등을 원만히 해결하지 못하였음을 책임지고 재단이사 중 이사장 백남조 부이사장 김인득 씨를 제외한 전원이사가 사퇴하였고 실행이사 전원도 사태하였다”고 보고 했다. 이 보고서에서 이미 매매 계약을 한 상태에서 “본 신학교 매매설”이라고 했다.


재단이사 선택 방법으로 “운영이사 재단이사 연석회의에서 선택하되 목사, 장로 반분비례로 택하며 1년에 30만원 이상을 헌금하는 이로 하고 일시 불시는 100만원 이상 헌납하는 이로하여 총회인준을 받아야 하며 책임액을 납붙치 못하면 이사직이 자동 상실키로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학교 기본 재산 처리는 반드시 총회 인준을 받아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제56회 총회 본회는 총회신학대학 이사회가 정상화 될 때까지 임시운영위원으로 각 노회에서 1인씩 파송된 이사들을 인준하였으며, 운영위원 소집은 총회장이 하기로 했다. 또한 총회신학대학 재산 방매계약서 따르는 사후처리위원으로 7인을 선정하여 처리하기로 하되 위원선정은 임원회에 일임하기로 했다.

 

총회신학대학 재산보호위원회(위원장 배태준 장로)의 헌신적 노력


총회임원회가 임명한 7인 위원은 배태준, 이팔만, 장덕호, 김상도, 김광철, 최경섭, 고응진 등이었으며, 위원장은 배태준 장로였다(서기 이팔만). 공식 명칭은 ‘총신재산보호위원’이었다. 동 위원회가 제57회 총회(1972년)에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사당동 총회신학대학의 전 및 임야 17,371평, 건물 984.17평이었다. 백남조 장로가 18,000평 기증은 실제적으로 17,370평이었다.


제59회 총회(1974)가 서울 평안교회당에서 회집되었다. 총회신학대학 재산보호위원회는 보고를 통해 “총회신학대학 부동산 전체를 145,000,000원에 매매하려고 14,500,000원 계약금을 받은 것을 반액인 7,500,000원 주고 화해하였다”고 보고했다.

 

또한 “광주군에 있는 임야를 사려고 계약금 2,300,000원, 중도금 4,000,000원 준 것을 판사람 역시 딴곳에 땅을 샀다가 총신과 매매성립이 못됨으로 손해 본 것을 이유로 한푼도 줄 수 없다는 것을 여러차례 설득하여 2,000,000원 받고 화해하고 종결하였다”고 보고하여 3년 동안 총회신학대학 부지 매매 사건을 없었던 것으로 하여 원래 상태로 종결되었다. 이러한 결과를 얻기까지 위원장인 배태준 장로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다.


이러한 어수선한 혼란기에 1972년 2월에는 박형룡 박사에 이어 제2대 학장(통13대)으로 김희보 박사가 취임했다. 박형룡 박사가 1969년 2월에 초대 학장직을 맡을 때가 73세였다. 1972년에는 76세 고령이었다.

 

총신대 발전계획 7개년 

 

총회총신대학의 사당동 캠퍼스 매매 사건으로 전 이사들이 사퇴하고 새로운 운영을 위한 이사들로 구성된 총회총신대학은 7개년 건설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전국 노회와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총회총신대학 7개년 계획은 1973년도에 기숙사 완공, 1975년에 도서관 완공, 1977년에 강당 완공, 1979년에 대학원 건물 완공을 목표하였다. 이를 위해 전국 교회가 8,079,250원을 헌금하여 동참했다.


이러한 7개년 계획에 따라 1973년 11월 17일 연건평 410평의 기숙사를 완공했다. 이 기숙사는 외국의 도움없이 순수 본 교단총회 교회가 합심하여 자립으로 건축하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신학부 교사 70평이 증축되고 대학부 본관 신축을 위해 1975년 4월 18일에 기공식을 갖고 이듬해에 마무리했다. 1973년에는 전체이사회 이사장은 김윤찬 목사, 법인이사회 이사장은 백남조 장로였다.

 

제60회 총회(1975년)에서는 대한예수교장교회 총회총신대학의 이사회 변경된 정관은 총회가 모르는 중에 이루어진 것으로 불법이므로 원상회복하기로 결의했다(전체이사회에 맡겨 하도록 하다). 그때는 총회 결의에는 순종했지만 요즈음은 사립학교법을 내세워 총회 결의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대학원 인가와 박형룡 박사 소천


1978년 2월 15일에는 대학원을 인가받았다. 신학석사(Th.M.) 20명, 기독교교육과(M.A.) 10명을 정원으로 하여 학생들을 모집할 수 있게 되었다. 박형룡 박사는 1978년 10월 25일 새벽. 대치동 아파트 자택에서 아무런 유언 없이 향년 82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했다.


1978년의 총회는 어수선했다. 정치교권의 중심부에서 비주류로 전략된 호남과 황해세력은 영남과 평안도 세력에게 밀려나면서 총회 직영신학교 안에서도 변화와 리더십의 교체가 있었다. 박형룡 박사가 소천을 전후하여 총신대학교가 좌경화 되었다며 방배동에 총회신학교를 복구한다며 신학교 간판을 걸고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1979년 9월 제63회 총회에서 방배동 총회신학교 관련 인사들 중심의 호남과 황해 세력이 정치적인 비주류으로 합동총회 안에서 분열되고 말았다. 1975년 12월 16일에 이르러 ‘총회총신대학’이라는 학교명칭을 ‘총신대학’으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재열 목사(한국교회사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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