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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폼드뉴스) 문교부로부터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원’에 대한 설립승인(1967. 5. 4)을 받은 후 1967년 6월 3일에 각종 학교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그 후 1969년 12월 24일에 대학인가를 받았다. 학교명칭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대학’으로 변경하였다. 긴 이름의 학교 명칭이었다.
1969년 2월에 이미 박형룡 박사가 학교법인 설립을 허가받고(1967. 5. 4), 5월 7일에 설립등기를 마친 후 1967. 6. 3.에 각종 학교로 인가를 받은 총회신학교의 최초의 학장은 박형룡 박사였다. 1969년 12월 24일은 각종 학교에서 정식 대학인가를 받아 대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다. 처음 대학으로 인가를 받은 학교 명칭이 바로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대학’이었다.
신학교의 어려움은 계속되다.
대학인가를 받았지만 1959년 통합측과 분열한 이후 합동측은 경제적인 어려움이 극심했다. 전국 교회의 도움을 요청하면서 신학교를 위한 지원을 받기 위한 동기부여로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만큼 다급했으며, 명분이 있는 일이었다.
1966년 봄부터 시작한 사당동의 신축공사는 처음에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경제적인 자금문제로 늘 어려움을 겪었다. 전국 교회의 지원이 있었지만 만족할 정도의 자금에는 이르지 못했다. 건축비는 그렇다치더라도 신학교 운영을 위한 실제적인 자금은 늘 부족했다.
사당동 신학교 부지와 교사 매각과 이전 계획 파장
교육부로부터 설립허가를 받은 학교법인 이사회는 1967년 6월 15일에 첫 이사회로 회집되었다. 이때 이사회는 어려운 학교 사정을 감안하여 이사들이 먼저 솔선수범하기로 하고 이사 분담금을 책정하여 재원 일부를 담당하기로 했다. 장로 이사는 월 3만 원, 목사 이사는 월 1만 원으로 하여 월 30만 원으로 하기로 하고 그해 7월부터 실시하기로 결의했다. 이 이사회를 학교법인 제1회 이사회라 한다.
이날 모임 실행이사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대학’을 발전을 위하여 사당동 현 부지와 교사를 매도하고 새 후보지를 마련하여 이전하기로 하고 이전할 후보지를 위해 7인 위원(김윤찬, 김처호, 양재열, 문재구, 고응진, 이환수, 양화석)을 선임했다. 이러한 결정들은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 공개적으로 이 일을 추진할 경우, 제대로 추진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이 계약금 가운데 150만 원은 문교부의 수속을 위해 양평에 52만 평의 땅을 계약하였다. 이러한 계약을 마친 후인 1972년 2월 3일에 문교부에 학교이전 승인 신청을 하였으며, 1971년 2월 9일에 학교법인 이사회 결의가 있었다. 신학교 이전과 계약은 실행이사회의 결의로 진행하였지만 법적인 매매 체결은 학교법인 이사회의 결의가 있어야 했다.
학생들의 소요사태와 성명서 발표
1966년 신학교 신축을 시작한 7년 가까이 공사는 완료되지 않았으며, 전기시설 공사마져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생들의 불만은 터져 나왔다. 마치 책임질 사람이 없는 것처럼 신축교사가 답보상태였다. 당시 교수들의 급료도 지급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결국 학생들의 불만은 가득했다.
300여 명의 학생들은 1971년 7월 8일에 예정된 1학기를 종강하고 방학을 6월 23일로 앞당겨 발표하여 학생들의 소요를 막아보려고 하였지만 오히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말았다. 학생들의 요구는 첫째 지방신학교를 철폐하라. 둘째, 지방신학교 이사로 총신이사로 겸직한 겸직이사 물러가라는 요구조건을 내세웠다. 겸직 이사들이 총신에는 관심이 없고 지방신학교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에 현 총신의 문제해결에 무관심 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대 이사회>
<대 총회>
이에 이사회와 각 노회와 총회는 조속한 시일 안에 합법적 방안을 모색하여 명확한 결정을 내리고 구체적 해결에 임하라.
<행동강령>
총회신학대학 실행이사회의 사태 수습
이같은 학생들의 성명서가 나가자 총회신학대학 실행이사회는 1971년 7월 15일과 16일에 평안교회당과 역전 미흥여관에서 번 갈아 모여 사태 수습을 위한 대책을 논의했다. 미흥여관은 한 권사가 운영한 여관으로 지방에서 서울에 상경한 인사들이 단골 숙소로 사용한 곳이다.
일차적으로 학생들의 요구인 공석 중인 총무처장에 양화석 목사를 선임하고 전기공사를 조속한 시일내에 마무리 하도록 했다. 각 교실의 미장 공사는 방학중에 진행하기로 했다. 자금이 부족하므로 기채하여 공사를 진행하기로 하고 이 일을 위해 문재구, 백동섭 목사와 양재열 장로를 선임했다. 학생 전권위원회는 실행이사회가 학생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줌에 따라 새학기부터 수업을 진행한다며 통지하였다.
학교법인 이사, 전체이사, 실행이사 전원 사퇴 결의와 재편
제56회 총회(1971. 9. 23)가 회집되기 직전인 9월 13일에 학교법인 이사회가 승동교회에서 모였다. 이날 회의진행은 학교법인 이사장인 백남조 장로기 진행했다. 이사회가 그동안 물의를 빚어온 총회신학대학 사태에 책임을 지고 이사장과 부이사장을 제외한 법인 이사 전원 사퇴하기로 결의했다.
또한 다음날인 9월 14일에는 승동교회에서 회집된 실행이사회는 이사장인 노진현 목사의 사회로 회의를 가졌다. 이날 학교법인 이사회, 전체이사회, 실행이사회 등 3개 이사회는 모든 해산키로 했다. 대신 32개 노회에서 파송한 1인씩으로 하여 총회신학대학 임시운영위를 조직하기로 했다. 또한 총신대 재산 보호를 위한 7인 위원회를 조직했다.
총회신학대학 재산보호위원회(위원장 배태준 장로)의 헌신적 노력
또한 “광주군에 있는 임야를 사려고 계약금 2,300,000원, 중도금 4,000,000원 준 것을 판사람 역시 딴곳에 땅을 샀다가 총신과 매매성립이 못됨으로 손해 본 것을 이유로 한푼도 줄 수 없다는 것을 여러차례 설득하여 2,000,000원 받고 화해하고 종결하였다”고 보고하여 3년 동안 총회신학대학 부지 매매 사건을 없었던 것으로 하여 원래 상태로 종결되었다. 이러한 결과를 얻기까지 위원장인 배태준 장로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다.
총신대 발전계획 7개년
총회총신대학의 사당동 캠퍼스 매매 사건으로 전 이사들이 사퇴하고 새로운 운영을 위한 이사들로 구성된 총회총신대학은 7개년 건설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전국 노회와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총회총신대학 7개년 계획은 1973년도에 기숙사 완공, 1975년에 도서관 완공, 1977년에 강당 완공, 1979년에 대학원 건물 완공을 목표하였다. 이를 위해 전국 교회가 8,079,250원을 헌금하여 동참했다.
제60회 총회(1975년)에서는 대한예수교장교회 총회총신대학의 이사회 변경된 정관은 총회가 모르는 중에 이루어진 것으로 불법이므로 원상회복하기로 결의했다(전체이사회에 맡겨 하도록 하다). 그때는 총회 결의에는 순종했지만 요즈음은 사립학교법을 내세워 총회 결의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대학원 인가와 박형룡 박사 소천
1979년 9월 제63회 총회에서 방배동 총회신학교 관련 인사들 중심의 호남과 황해 세력이 정치적인 비주류으로 합동총회 안에서 분열되고 말았다. 1975년 12월 16일에 이르러 ‘총회총신대학’이라는 학교명칭을 ‘총신대학’으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재열 목사(한국교회사 Ph.D.) <저작권자 ⓒ 리폼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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