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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연재4]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에 대한 논쟁(4)

정이철 목사의 견해

유창형 | 기사입력 2021/03/12 [17:14]

[신학연재4]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에 대한 논쟁(4)

정이철 목사의 견해

유창형 | 입력 : 2021/03/12 [17:14]

▲유창형 교수(칼빈대학교 조교수, 역사신학)   ©리폼드뉴스

 

(리폼드뉴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에 대한 논쟁'에 대한 유창형 교수(칼빈대학교 조교수, 역사신학)의 논문을 연재한다(편집자 주).

 

   목차

 

. 들어가는 말

 . 이 교리를부정하는 학자들 

   1. 리차드 백스터 

   2. 존 웨슬리 

   3. 서철원 

   4. 정이철  

III. 이 교리를 인정하는 학자들 

   1. 존 오웬 

   2. 헤르만 바빙크  

   3. 박형룡 

   4. 신호섭

. 분석과 평가 

   1. 이 교리에 관한 성경구절들  

   2. 어느 편이 칼빈과 일치하는가

   3. 이 교리를 부정하는 견해의 장단점 

   4. 이 교리를 인정하는 견해의 장단점 

. 나오는 말 

 

 4. 정이철

 

4.1. 정이철의 주장


정이철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수동적 의의 전가를 주장하는 청교도 신학자들과 이들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주장하는 신호섭을 그가 운영하는 “바른믿음”에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는 칼빈과 서철원의 글을 인용하면서 신호섭을 비판한다. 그 중에 하나는 베자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수동적 순종의 전가를 말했는데, “베자는 칼빈의 제자였으나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을 바르게 습득하기 못했다고 평가받고 있다”고 하였다.1)

1) 정이철, “존 칼빈을 퍼킨스, 에임스, 오웬과 묶어 도매금으로 넘기지 마십시오”,접속일. 2020.1.14.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730.


 이는 피터 툰과 유사한 견해2)이며, 칼빈과 칼빈의 후계자들의 불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2) Peter Toon, The Emergence of Hyper-Calvinism in English Nonconformity, 1689-1765 (London, 1967), 15-16.


첫째, 정이철은 그리스도의 율법준수 전가를 반대하였다. 정이철은 신호섭의 책, 『개혁주의 전가 교리』를 소개하면서 칭의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전가와 그리스도의 율법준수의 전가로 이루어진다는 신호섭의 주장을 반대하면서,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율법준수가 우리에게 하나님 백성되게 하는 의를 전가하여 준다는 내용이 단 한 줄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기독교 강요』 3.11.3; 3.11.19; 1.6.2; 서철원 『구원론』, 116-117; 『그리스도론』, 167; 갈라디아서 3:13; 에베소서 2:14; 로마서 3:25 등을 제시한다. 서철원의 견해는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다. 논자는 정이철의 주장이 타당한지를 살펴보기 위해서 나중에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의의 전가와 관련된 성경구절을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여기에서는 정이철의 주장만 진술하고자 한다.


둘째, 그는 신호섭이 그리스도의 율법준수의 전가의 근거로 인용한 칼빈의 저작을 잘못 해석하였다고 한다. 정이철은 칼빈이 『기독교 강요』 3.11.4에서 “로마서 4장에서 그는 처음으로 칭의를 의의 전가라고 부르며 칭의를 죄의 용서에 포함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여기서 의의 전가란 그리스도가 율법준수를 이룬 것을 우리에게 전가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의의 전가를 만든 원인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였기 때문이라고”3) 했다. 정이철은 다른 본문도 인용하였다.

3) 정이철, “이렇게 복음을 왜곡하고 되려 존경받는 사람은 거짓 선생입니다.”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763.

 

오히려 반대로 그는 값없는 죄 사함에 완전한 의를 결부시키면서, 죄가 가려진 사람들이 복되고, 하나님께서 불법을 사하신 사람, 곧 하나님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않으시는 사람들이 복되다고 선언한다. 곧 바울은 그 사람이 본질적으로 의롭게 때문이 아니라 의를 전가 받아 의로운 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가 복되다고 판단하고서 그의 복된 상태를 인정하는 것이다.4)

4) 칼빈, 『기독교강요』, 3.11.11


위에서도 의의 전가라는 말이 나오는 데 정이철은 그 의가 율법준수로 인한 의의 전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의의 전가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할 뿐이라고 하였다. 다음 인용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고 정이철은 말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과연 어떻게 죄를 제거하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단절을 해결하셨으며, 또한 어떻게 의를 얻어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자비와 친절을 베푸시게 만드셨느냐고 묻는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분이 복종하는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를 위한 의를 이루셨다고 대답한다.5)

5) 칼빈, 『기독교강요』, 2.16.5.


위 문장을 정이철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함으로 의의 전가가 가능했다는 뜻으로 해석함이 좋을 것”6)이라고 했다.

6) 정이철, “이렇게 복음을 왜곡하고 되려 존경받는 사람은 거짓 선생입니다.”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763.


얼핏 보면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함이 그리스도가 율법에 능동적으로 순종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이철은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나누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복종하는 모든 과정이 의의 전가되었다고 한 것이다.


셋째, 정이철은 칼빈의 로마서 5장 19절의 주석을 인용하면서 신호섭을 비판한다.

 

그리고, 그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종을 통해 의롭게 되었다고 선언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버지를 만족시킴에 있어서 우리를 위해 의를 제공했다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특유한 의가(iustituae qualitatem)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고유하게(illi proprium) 있는 것들로서 우리에게 전가될 수 있다. 동시에, 바울은 그것을 순종이라고 부름으로써 그것이 어떤 종류의 의인지 보여준다.

 

만약 우리가 행위에 의해 의롭게 됨을 추구한다면,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 가져와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 특별히 주목하자. 그것은 율법의 이 부분이나 저 부분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완전한 순종이다.7)

7) John Calvin, Commentary on Romans 5:19=Calvini Opera 49, 101. “Deinde quum pronuntiat,nos Christi obedientia constitui iustos: hinc colligimus, Christum, eo quod patri satisfecerit, iustitiam nobis comparasse. Unde sequitur, iustitiae qualitatem esse in Christo: sed nobis acceptum ferri quod illi proprium est. Simul qualis sit Christi iustitia interpretatur, quum vocat obedientiam. Ubi adnotemus, quaeso, quid nos afferre in conspectum Dei oporteat, si velimus operibus iustificari: nempe legis obedientiam, nec una quidem aut altera in parte, sed numeris omnibus absolutam.” 이후로는 John Calvin, Commentary on Romans 5:19 라고 표기함.

 

정이철은 특이하게도 위 주석을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죄인을 살릴 의를 얻어 전가하였다고 주장하는 신교수를 오히려 곤란하게 만드는 내용”이라고 해석하면서, 위 주석이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거짓 신학을 단 방에 무너뜨리는 내용”이라고 하였다. “의가 그리스도 안에 본질로서 존재하는 데 바로 이 그리스도께 본질로 속한 의가 우리에게로 전가된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고 칼빈이  말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율법과 아무런 관련이 없이 죄인들을 의롭게 만드시기에 처음부터 충분하신 분”이라는 내용이라고 해석한다.

 

4.2 그의 주장에 대한 분석과 평가


정이철의 처음 주장에서, 성경에 그리스도의 율법준수의 전가란 용어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대체로 논자는 찬성한다. 그러나 예수는 분명히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셨고 이런 것은 세례를 받으신 것, 할례를 받은 것,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말과 행동만 한 것 등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일평생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했다고 보아야 한다. 용어가 없다고 해서 그 의미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했다. 일평생 순종하신 모든 것이 우리의 죄를 사해주고 우리를 의롭게 한 것이다.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된 것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 없는 자로 간주하신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율법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되어서” 라고 말하는 성경구절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교리를 지지하는 구절들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논자는 이런 구절들을 비교 분석하는 장에서 다룰 것이다.


정이철의 두 번째 주장에서, 『기독교강요』 2.16.5는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는 죄책을 제거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 둘째는 복종하는 모든 과정을 통해 의를 얻어서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자비와 친절을 베푸시게 한 것이다. 따라서 첫째를 수동적 순종의 전가로 보고, 둘째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로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에 수동적 순종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기독교강요』의 이 부분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전가 교리의 지지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이철의 세 번째 주장에서, 논자가 로마서 5장 19절에서, qualitatem이나 proprium은 “고유한, 특징적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본질로서”라고 해석하는 것보다 합당하므로, “그리스도에게 특징적으로(혹은 자산으로) 속한 의”라고 해야 옳다. 왜냐하면, 율법의 완전한 복종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신호섭과 정이철의 주장처럼, 그리스도께 본질로 속한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면 그리스도가 평생 한 순종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의롭게 태어났고, 살아있을 동안에 항상 의로웠기 때문에 아무 때라도 그의 본질적인 의로 속죄 제물을 드려서 우리를 무죄하게 만들고 의롭다고 선언 받도록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많은 생애 동안 순종하신 후에 장성한 상태에서 속죄 제사를 드렸는가 하는 의문이 따른다.


로마서 5장 19절에 대한 칼빈의 주석은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이 믿음으로 우리에게 전가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구절이 칼빈이 그리스도의 율법준수가 신자에게 전가되었다고 주장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다.8)

8) 페스코는 “롬 4:6-7; 고후 5:18-21, 롬 5:19에 대한 분석을 통해 칼빈은 칭의가 죄사함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이루어진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고 한다. J. V. Fesko, “Calvin on Justification and Recent Misinterpretations of His View,” MJT (2005): 92.


 그런데도 정이철이 이것을 무시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 강요』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가 없다는 주장은 틀렸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은

III. 이 교리를 인정하는 학자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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