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길선주 목사

리폼드뉴스 | 기사입력 2021/03/01 [15:22]

1919년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길선주 목사

리폼드뉴스 | 입력 : 2021/03/01 [15:22]

 

▲ 대한국예수교장로회 독노회(1907) 7인 목사임직(원안은 길선주 목사), 앞줄 한석진, 이기풍, 길선주, 송인서, 뒷줄 방기창, 서경조, 양전백(본 사진은 목사안수 기념이 아닌 대한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 졸업기념(1907. 6. 20.) 사진이다.  © 리폼드뉴스

 

길선주 목사

길선주 목사(吉善宙, 1869325-19351126)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아 임직한 7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189729세 때 세례를 받고, 1898년에는 교회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1901년 장대현교회의 장로가 되고, 1902년 조사가 되어 평안도와 황해도지방을 맡아 전도하였다.

 

길 목가는 정국의 혼란과 국운의 비극을 염려하여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독립협회 평양지부를 조직, 사업부장을 맡아 구국운동에도 앞장섰다. 목사 안수를 받고 쟁대현교회 목사가 되었으며,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장대현교회 건물을 세웠다.

 

그는 한국 개신교사상 최초의 가장 큰 영력을 가진 목회자로, 부흥사로 활약하여 많은 사람을 개종시켰고 부흥운동을 통하여 심령의 역사를 크게 나타내었으며,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3년 동안 계속된 그의 부흥운동으로 한국교회는 전국적으로 부흥운동이 번져나갔다.

  

그러나 그는 1928년 봄 길선주는 사경회 때 임박한 전쟁 발발을 예언함으로써 경찰법 위반으로 안동경찰서에 체포되어 29일간 구류를 살기도 했다. 

 

그는 일생의 가시로 여겼던 시력이 1900년에 완전 실명하여 1903년 수술을 받고 다소 회복될 수 있었지만 그의 시력 저하는 목회사역과 저술 활동에 걸림돌이 아닐 수 없었다. 요한계시록에 심취하였고, 말세론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였다

 

평양신학교 제1회 길선주 목사 졸업증서  © 리폼드뉴스

 

그러나 그는 출옥 후 옥중에서 정리한 말세론에 대한 강의안은 전국의 부흥회에서 강론하였다. 특히 주님의 재림을 지나치게 사모한 나머지 재림의 징조를 통해 1919년 재림설과 2002년 재림설을 주장함으로써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3·1운동 때에는 기독교를 대표하여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를 공포하여 2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일부 민족주의자들 중에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에 한 명인 평양 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가 31일 탑골공원 근처에 있는 음식점인 태화관 모임에 참석했으나, 중간에 소변을 보러 나가는 척 하면서 도망갔다고 주장했다. 이런 이유로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며 친일파로 모함하여 몰아세웠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쁜 꾀를 써서 남을 어려움에 빠뜨리는 모함은 늘 존재해 왔다.  

 

당시 每日申報(1919. 3. 7.) 보고에 의하면 길선주는 220일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린 후 평양을 떠날 때 서울 선언식 날짜는 몰랐으나 참석할 계획은 가지고 일단 황해도 장연에 사경회로 갔다. 눈이 흐려 잘 보이지 않던 그는 선언식에 제 때 못 갈 수도 있으므로, 선언서에 찍을 도장은 미리 빌려 준 터였다.

 

1주일 간의 사경회에 참석한 뒤, 그는 228일 오전 8시 사리원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 그러나 기차는 예정보다 늦게 31일 오후 6시에 남대문역에 도착했다. 그래서 33(실제로는 29인 참석)이 회집한 서울 태화관 모임에는 불참했다

 

▲ 길선주 목사 말세도     ©리폼드뉴스

독립선언서 연명자 중 동석치 않았던 길선주(吉善宙), 김병조(金秉祚), 류여대(劉如大), 정춘수(鄭春洙) 4명을 제한 전원은 독립선언과 시위가 벌어진 후 집합소인 명월관 지점에서 경성의학전문학교 생도 서영환으로 하여금 조선총독에게 독립선언을 통고한 후 몰려 온 일경에게 자진 피체되었다

 

이와 같은 내용이 기사화 되기도 했다. 1937년 회고록을 쓴 헐버트(Homer B, Hulbert) 역시 길선주 목사와 관련한 삼일운동을 서술했다. 이 서술에서 31일 서울역에 늦게 도착한 길선주 목사는 친구들이 재빨리 다가가 서명자들이 모두 체포되었으니 도망가라고 말했으나, 길 목사는 다른 서명자들이 있는 곳이 바로 자신이 있을 곳이라며 곧바로 경찰서로 걸어가 조사를 받아 투옥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길선주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일은 어렵지 않았으니, “국민이 된 이상은 독립하고 싶지 않은 국민이 어디있소라고 말했다. 길선주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미결수로 20개월 간 감옥 생활을 했다. 재판 결과 경성 복심법원에서 무죄를 언도받았다. 자신은 독립선언이 아니라 독립청원으로 알고 명의를 빌려주었다고 일관되게 말했기 때문이다. 길선주 외에도 비슷한 이유로 여러 명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무죄 판결은 이미 18개월 정도 복역한 뒤였다.

 

길선주 목사는 무죄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독립유공자로 포상이 안 되다가 2009년에 이르러 독립장으로 포상을 받았다. 33인의 다른 분들은 대한민국장이나 대통령장을 받았다. 그는 19351126일 길선주 목사가 향년 67세로 강서군 고창교회에서 사경회 도중 뇌일혈로 쓰러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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