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복음의 꽃 피웠던 승동교회

소재열 | 기사입력 2021/02/20 [14:24]

찬란한 복음의 꽃 피웠던 승동교회

소재열 | 입력 : 2021/02/20 [14:24]

 

 

승동교회  © 리폼드뉴스

 

1892년 9월 21일.

한 선교사가 아내와 몇 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제물포를 통해 경성(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제물포에서 다시 목선으로 미지의 세계인

강화도를 지나 한강을 거슬러 양화진 나루터에 도착했다.

한치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두운 밤 10시였다.

 

32살의 나이에

피선교지인 조선에 들어온 그는

소 울음소리 모()자를

자신의 성씨로 하여 모삼열(牟三悅)이라 했다

아버지와 형이 목사요, 동생은 장로를 둔 집안이었다.

 

목사님, 미국 사람도 한국말을 씁니까?’

한국말로 얼마나 설교를 잘했으면

이런 질문을 받았을까?

그는 피선교지인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한글 말을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의 마을로 이사하여 그들과 함께 어울렀다.

 

▲ 무어 선교사의 가족(1902)  © 리폼드뉴스

 

그들 가운데는 백정들이 있었다.

동물을 도살하는 끔찍한 방법 때문에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백정들이 잡은 고기를 먹으면서도 백정은 싫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푸는 일이 금기시 되었다.

그들은 교회에 나오면 안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전통과 관례를 깼다.

복음을 전했고 세례를 베풀고 교인으로 받았다.

 

교인 중에 양반들이 그를 가슴 아프게 했다.

백정과 함께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단다.

20여 명의 교인 중 절반 이상이 출석을 거부했다.

결국은 그들은 교회를 떠나 자신들의 교회를 세웠다.

 

▲ 무어 선교사가 전도한 백정인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6번)이 세브란스 의학교 제1회 졸업을 했다.  © 리폼드뉴스

 

타협안이 들어왔다.

예배 드릴 때 양반들은 앞자리에

백정들은 뒷자리에 앉도록 해 달라.

모삼열 선교사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다른 선교사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옳았다.

외골수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

복음 이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는 선교사였노라고.

복음안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은 하나다.

노예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피조물이다.

백정도 복음 안에서 모두 하나다.

 

그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 화재가 발생했다.

그로 인해 백정의 문제로 떠난 그들과 재연합을 했다.

이 교회가 홍문섯골교회이다.

복음 안에서 하나되지 못할 일이 없노라.

백정 문제로 분열된 교회가 다시 하나되었다.

 

역사는 이 동현교회를 중앙교회(Central Church)라 했다.

모삼열 선교사 세운 곤당골교회(1893년),

홍문섯골교회, 동현교회는  

모두 승동교회 전신이다.

 

그의 아내가 폐결핵에 걸렸단다.

병이 악화되어 입국한지 9년째 되는 해에

치료차 미국으로 일시 귀향했다.

 

선교사 공의회에서는 기회는 이때라!

그가 미국으로 돌아가 없는 틈을 이용하여

공의회의 지시와 허락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가 섬기는 교회를 폐쇄시켜 버렸단다.

1902. 9. 20. 그가 귀국하여 목회현장에 돌아왔다.

자신이 전도하여 설립한 교회가 폐쇄되었으니

그 쓰라린 아픔을 어떻게 표현한다는 말인가? 

그는 선교부에 대항할 수 없었다.

 

▲ 제중원, 구리개(동현)에 위치(1897)  © 리폼드뉴스


교회가 폐쇄되었지만 교인들의 신앙까지

폐쇄 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계속하여 동현병원(제중원, 구리개)에서

종전교회의 복음의 정신을 이어갔다.

모삼열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인 19022,

2회 선교사공의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회장은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 소속인 이눌서였다.

그들의 선교구역은 호남이었다.

 

폐쇄된 교회 교인들 중심의 동현병원 내 동현교회에

이눌서를 교회목사로 임명했다.

교회로 인정한 셈이었다.

그는 1906년 2월까지 시무했다.

남장로회 선교사를 북장로회 선교구역에 있는 교회에

교회 목사로 임명하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미국 남북장로교회 선교부가 이 교회를 섬겼다.

 

모삼열 선교사는 눈물과 열정으로 세운교회가

다시 선교부로부터 승인을 받은 것을 보았다.

그는 1906. 12. 22. 향년 46세 나이로 소천했다.

피선교지인 이땅에 들어온지 14년째의 일이었다.

 

그는 바로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 소속

사무엘 포먼 무어(Samuel F. Moore, 1846-1906)였다.

그가 세운 교회가 바로 승동교회이다.

승동교회는 이 거룩한 교회 설립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왼쪽 위: 제중원, 구리개(동현)에 위치(1887-1902), 왼쪽아래, 승동(현 인사동)으로 옮긴 승동교회(1904), 오른쪽 위:1912년 교회 건축 완공(1913.2.16, 헌당) 오른쪽 아래:1958년 증축 1000석의 규모의 교회   ©리폼드뉴스

 

19193월 1일

독립만세 운동의 중심지인 파고다 공원과

태화관에 인접해 있던 승동교회.

31독립만세 운동을 위한 거사계획을 세웠던 장소라!

진원지로서 그 역할을 어찌 잊으랴!

 

1940년 4월 19일. 

국신학대학교의 전신인 조선신학원이

승동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이 학교의 역사에서 승동교회의 흔적이 기록된다.

승동교회는 조선신학원을 개교토록 장소를 제공했다.

그럼에도 승동교회는 이 학교의 정신을 따르지 않고

총신대학교의 전신인 남산 장로회신학교와

총회신학교(총신) 정신을 따르는 교회로 남기로 했으니

이는 현존하는 총신대학교 소속 모교회라

 

▲ 1993년 3월 1일, 삼일절 73주년 기념예배 및 기념표지석 건립 기념  © 리폼드뉴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이 이루어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과 같은 기쁨이었다.

일제에 의해 폐쇄된 총회를

1946년611-14일 남부총회에서 복구했다.

이 일이 승동교회에서 이루어졌다.

그렇게 승동교회는 해방 후

한국장로교회의 희망의 산실(産室)이었다.

 

▲ 합동측이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분열 후 고신측과 합동했다(1960) 제44회 총회에서 분열 후 승동교회에서 모였다고 하여 승동측이라고 한다.  © 리폼드뉴스

  

1959년 1124일(제44회 속회 총회).

1960922일(제45회 고신측과 합동총회) 

승동교회에서 회집되어 그 현장을 지켰다. 


승동교회는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적 정통성,

신앙과 신학의 정체성을 지켜내며

한국교회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의 한 중앙에 서 있다.

합동측을 왜 승동측이라는 별명이 붙었는지 우리는 안다.

 

옛 경성인 서울에 승동교회는 이렇게 찬란한 복음을

전했고 지켰으며 계승하고 있다.

! 그 어찌 복음의 정신을 잊으랴!

2021년은 교회 설립 128주년을 맞이한다.
고난 속에서도 찬란한 영광의 복음을 이땅에 전하소서.
 

▲ 승동교회는 현 대한예수교장로교회 총회(합동) 경기노회 소속으로 담임은 최영태 목사이다. 승동교회는 6월 16일을 설립기념일로 지키고 있다. 2021년 6월 16일은 교회 설립 128주년이 된다.  © 리폼드뉴스

 
소재열 목사(한국교회사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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