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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김광열 교수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글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인간론에 대한 성경적 이해, 개혁주의적 이해를 총체적 복음의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다.
2. 아담의 타락의 영향 아래 놓인 인간존재- “완전히 망가짐”의 의미
a. 원죄교리(죄의 전가 교리)
두 번째 단계에서의 인간에 대한 관점들 중에서 개혁신학의 특징을 말해주는 가르침들 중의 하나는 원죄교리에 대한 논의에서 확인된다
. 원죄교리는 아담의 죄가 그의 후손들에게로 전가되었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다. 그러나, 어떻게 아담의 죄가 그의 후손들에게로 전가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그 근거가 무엇인가에 대해 기독교 역사상에 다양한 설명들이 제시되었다.
아담과 그의 후손들 사이에 죄의 연관성을 반대한 신학자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펠라기우스(Pelagius)였다. 그의 신학적 논쟁의 상대자인 어거스틴(Augustine)을 반박하면서, 원죄교리는 하나님의 공정성을 무너뜨린다고 보았다. 하나님은 원죄 때문에 인간을 정죄할 수 없으며, 스스로 범하는 자범죄에 의해서만 죄의 행위가 성립된다고 본 것이다.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원죄의 영향 아래있는 것이 아니라, 범죄 전의 아담과 같이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범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여 범하는 죄의 행위에 의해서만 죄인으로 판단받게 될 뿐이라고 주장했다.
아담의 역할은 단지 그의 후손들에게 하나의 전례를 남겼다는 점에서만 찾아진다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은 그의 범죄를 모방함으로서 죄인이 되는 것이지, 아담의 죄가 전가됨으로 죄인이 된다고 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의 관점은 로마서 5장에서 말하는 바울의 가르침에서 벗어난다. 바울은 아담의 죄와 그의 후손들의 죄 사이에 매우 밀접하고도 실제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초대교부 터툴리안의 가르침을 따라 실재론(Realism)이라는 관점으로 아담의 죄와 그의 후손의 죄와의 연관성을 설명했다.
아담의 후손들은 실재로 아담 안에 존재함으로서 아담의 범죄에 동참했으며 따라서 아담과 함께 죄의 책임을 져야한다고 본 것이다. 실재론을 지지하는 이들이 제시하는 근거성구들 중의 하나는 히브리서 7:9-10이다. 그 구절 속에서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을 만나 십일조를 바쳤는데, 또한 그것을 레위가 바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그것은 레위가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설명된다. 그렇다면, 마찬가지 원리에 의해서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범죄할 때에 그의 후손들이 그의 허리에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같은 어거스틴의 실재론이 펠라기우스의 오류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또한 몇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로 성경의 가르침은 아담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었다고 선언하는데 (롬5:12 이하), 실재론에 의하면 아담이 범죄할 때, 하와는 아담의 몸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와는 아담의 범죄 때문에 죄인이 되었다기 보다는 자신의 죄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다. 둘째로는 롬5:12-21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아담과 그리스도의 평행구조의 원리와 충돌하는 가르침이 된다는 점이 지적될 수 있는 것이다.
죄의 전가교리에 대한 개혁신학의 관점은 언약적 대표설(Covenantal representative)로서 설명된다. 아담이 행위언약의 대표로서 에덴 동산에서 범죄하였으므로 그가 대표하고 있는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된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은혜 언약의 대표로서 십자가의 사역을 감당하셨으므로 그의 은혜 언약의 행정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가 이루신 사역의 공로로 의인되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후크마와 같은 신학자는 언약적 대표론이 실재론의 진리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헤르만 바빙크의 진술을 언급하면서, 언약적 대표설과 실재론을 결합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 두 관점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그러나, 언약적 대표설을 실재론과 조화시켜 이해하는 문제와는 상관없이, 여기에서의 초점은 개혁신학의 관점은 -펠라기우스나 알미니우스의 관점들과는 달리- 아담의 죄의 전가교리에 근거한 원죄론을 성경적인 가르침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 교리는 곧이어 인간의 전적부패와 전적 무능력의 교리로 이어진다.
b. 전적 부패의 의미 이와같은 원죄 교리에 대한 개혁신학의 가르침은 아담의 타락 이후의 인간의 상태가 또한 전적 부패한 존재가 되었음을 강조한다.(롬3:9-18) 그리고 이 전적 부패 (total depravity)의 교리는 전적 무능력(total inability)을 함축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전적 무능력이란 아담의 타락 이후의 인간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철학적 사고나 수학문제를 계산해 낼 수 있는 능력도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인정할 만한 영적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적 부패와 전적 무능력에 대한 개혁신학의 가르침은 개혁신학의 구원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타락한 인간이 전적부패하여 전적으로 무능력한 상태에 있으므로, 하나님의 전적이고 주권적인 은혜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게 되는 구원관인 것이다. 미국의 개혁신학자 B. B. Warfield는 The Plan of Salvation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기독교회 안에서 제시되어온 다양한 구원관들에 대해서 분류하면서, 개혁신학의 구원관의 특징을 제시해준다.
로마 카톨릭의 사제주의적 (Sacerdotalism) 구원론, 알미니안의 보편구원론, 아밀라주의(Amyraldianism)의 일관성 없는 특정구원론등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적인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는 역사상의 다양한 구원론들과 그들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개혁신학의 구원관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의한 구원임을 일관되게 가르치는 구원관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개혁신학의 구원관은 바로 아담의 타락 이후에 전적 부패한 인간 존재를 말하는 개혁신학 인간이해의 가르침과 맞물려 있음을 보게 된다.
워필드가 그 책에서 첫 번째 분류 대상으로 언급하는 것이 바로 Pelagius의 자력구원론(autosoterism)인데, 그 분류의 기준은 “자연주의(naturalism)인가 아니면 초자연주의(supernaturalism)인가?”였다. 즉,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주어지는 구원인가? 아니면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으로 이뤄질 수 있는 구원인가? 에 대한 문제였다.
펠라기우스가 자력구원론을 말하게 된 이유는 바로 그가 원죄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서 전적 부패와 전적 무능력을 거부하고,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인간은 자기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인간은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을 행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반면에 개혁신학의 구원론은 초자연주의적 구원관이라는 것이다. 즉, 구원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을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고 가르치고 있음에 주목하고, 따라서 아담의 타락 이후로 하나님께서 인정할 만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불가능한 존재가 된 것(롬 3:9-18; 롬 5:12-21)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혁신학의 구원관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 주권적인 은총으로만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구원관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전적 부패란 아담의 타락 이후의 인간들이 모두 최악의 타락한 상태로 떨어졌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죄들은 다른 죄 보다 더욱 악한 죄이기도 하고, 또 모든 사람들이 항상 최악의 범죄들을 저지르면서 사는 것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전적 부패란 부패함과 타락한 죄성이 인간의 존재와 삶의 모든 영역들에 미쳤다는 의미에서 전적 부패인 것이다.
우리의 최선의 행동들, 율법을 지키려고 애썼던 행동들에 있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행동한 부분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타락한 죄성은 우리의 모든 생각들, 말들, 의지와 이성 그리고 행동들에까지 그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시51:5; 마15:16-20; 요3:6; 롬8:5-8)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를 떠나서는 우리는 모두 죄의 종이고,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기 때문이다.(엡 2:1-2)
3.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주어지는 총체적 회복을 바라보는 인간
a. 총체적 복음 안에서 주어지는 총체적 회복을 바라보는 인간이해 이와같은 두 번째 단계에서의 인간의 존재와 상태에 대한 개혁신학의 가르침은 결국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며, 따라서 –항상 최악의 범죄를 저지르면서 살지는 않을지라도- 삶의 모든 영역들 속에서 총체적으로 타락한 존재임을 말해준다. 그런데, 개혁신학은 인간의 존재에 대한 가르침을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죄의 영향력 아래 살아가는 부패한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져오는 총체적인 회복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개혁신학의 관점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총체적 회복을 경험하는 세 번째 단계에서의 인간이해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타락한 인간의 삶에 총체적 회복을 가져오는 총체적 복음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
총체적 복음의 관점은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미쳐진 죄의 영향력이 광범위하다고 보는 “전적 부패”의 “총체성”과 맞물려있다. 죄의 영향은 총체적이어서 개인적, 영적 차원을 넘어서 (육체를 포함한) 전인적, 사회-경제적 차원과 우주적 차원을 포함한 인간의 전포괄적인 삶을 죄의 통치 아래로 끌어 내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다면 온 세상의 구주로 오신 예수님이 베푸시는 복음의 회복의 역사도 마찬가지로 모든 영역에서 죄의 영향력을 걷어내는 전포괄적인 회복의 역사이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주님의 복음은 총체적 복음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설명되는 “총체적 복음”의 회복 역사의 조망 속에서 인간 이해를 말하게 되는 것이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저작권자 ⓒ 리폼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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