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하나님 중심적 설교’의 한 모델로서 정근두 목사 설교 연구(4)

김창훈(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실천신학)

김순정 | 기사입력 2020/08/08 [18:57]

[논문] ‘하나님 중심적 설교’의 한 모델로서 정근두 목사 설교 연구(4)

김창훈(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실천신학)

김순정 | 입력 : 2020/08/08 [18:57]

 

 

앞서 이 문제를 원론적으로 접근했다면 오늘은 각론적으로 하나씩 뜯어봅시다. 우선 본문 열두 절을 한 번 분석해 봅시다. 처음 두 절은 전체적인 주제의 선언입니다. 3절부터 5절의 상반 절까지는 혀의 위력에 대해서 말하고, 5절 하반 절부터 8절까지는 혀의 속성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9절부터 12절까지는 혀의 기능을 말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야고보서를 이해하는데 오는 어려움은 무엇을 말하느냐 보다, 왜 그 말을 하느냐를 아는데 있다고 지난번에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각 구절의 내용보다는 앞뒤 연결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야고보서가 전체적인 흐름을 가진 편지라기보다는 설교 요점을 모아 놓은 것이 아니냐고 불평합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 구절, 한 구절을 파고 들면 풍성한 생명수가 솟아나는 것 같습니다. 30분 설교에 다 담을 수 없는 풍성한 샘이 솟기 때문에 설교요약이라고 보아도 말이 됩니다. 어쩌면 구절 하나하나가 야고보 선생에게는 설교 요점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본문은 아무 구절이든지 깊이 파면 솟아 넘치는 샘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아래 기록된 공동 서신 제 1호를 앞 뒤 연결이 없이 기록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이 편지를 기록했을 때는 앞 뒤 말의 배열에 타당한 이유가 있었는데, 다만 우리가 야고보 수준의 영성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야고보의 심정에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왜 그 말 다음에 이 말이 나오는지 따라 잡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말인지 앞뒤 연결이 어렵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우리의 수준을 부끄러워하면서 앞뒤의 연결에 대해 궁리해 보는 것이 말씀을 대하는 바른 자세일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논리적인 흐름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껏 야고보 선생은 신앙공동체가 신앙공동체답지 못한 문제의 원인을 규명했습니다. 그리고 신앙 공동체를 치료할 처방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을 했습니다. 때로는 얼굴을 들고 듣기 거북하리만큼 신랄한 지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타이르듯이 알아듣도록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문제를 지적하는 동시에 방책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이 6절까지의 말씀이라 본다면 오늘 본문 7-10절은 어쩌면 그의 설교의 적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충분하게 설명을 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그들의 상황에 따라서 적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성경 구절이라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뒤 흐름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명령을 가장 자연스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앞부분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문제는 과연 앞부분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 같은 본문과 같은 경우에는 앞 문단과의 관련을 찾아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오히려 야고보서 전부를 일련의 설교 제목들을 모아 놓은 책으로 취급해야 할 결정적인 증거로 이 본문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야고보 선생이 즐겨 전하던 설교 제목의 하나로 보아야 하며, 앞부분과 무관하다는 입장입니다. 얼핏 보면 정말 그런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표면적인 관련을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야고보 선생의 가슴 속에 타오르던 그 열정을 동일하게 가지고 본문을 읽어 본다면 그 뜨거움 속에 녹아 있는 관련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4) 필요할 때 단어의 원어적 의미를 살피면서 본문의 의미를 설명한다. 구체적인 예들을 찾아보자.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시험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2절에서 말하는 온갖 기쁨으로 맞이할 여러 가지 시험이라는 말과 12절에서 말하는 우리 모두가 통과해야 할 시험이라는 말은 꼭 같은 헬라어 페이라스모스’(πειρασμς)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험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 다양하기 때문에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 들여다본다는 것은 마치 마리아와 베드로가 부활절 새벽에 예수의 빈 무덤 앞에 가서 거기 무덤이 빈 것을 보고 혹시 어디에 예수님의 흔적이 있을까 해서 두리번거리며 들여다보았다고 할 때 사용된 말과 꼭 같은 말입니다. 마치 하늘의 천사들이 죄인인 우리에게 이 구원의 복음이 어떻게 해서 들려졌는지, 이 구원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세히 살펴볼 때만이 우리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아름다운 옷으로 번역되었는데 똑같은 헬라어 에스데타 람프란’(ἐσθτα λαμπρν)가 누가복음 2311절에는 빛난 옷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군병들이 조롱하고 난 뒤에 예수에게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다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는 아름다운 옷이라고 바꾸었습니다. 오히려 빛난 옷이라고 해석했더라면 의미를 더 살릴 뻔 했습니다.”

 

““돌아서다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이 말은 회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향해서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22:32)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이키다는 말이 여기에서 돌아서게 하라하고 같은 말입니다. 네 스스로 돌이키라고 베드로를 향해서 주님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야고보는 공동체를 향해서 곁길로 나간 사람을 돌이키도록 노력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타락의 자리에서 부터, 열심이 식어진 자리에서 부터 돌이키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즉 지금 영적으로 잠을 자고 있는 그를 깨우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이미 만난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위험한 자리에 있습니다. 그대로 방치해 두면 안 될 위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은 신앙 공동체 모두에게 마지막으로 그들의 직무를 깨우치고 있습니다.”

 

5)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난해한 부분들의 의미를 설명함으로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예들을 찾아보자.

 

야고보 선생은 무엇을 자랑하라고 명합니까?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 무슨 선문답 같기도 하고 수수께끼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잘 보면 낮은 형제라는 말은 부한 형제라는 말과 대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낮다고 하는 말의 일차적인 의미는 경제적으로 비천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높은 신분을 자랑하라고 명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가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자랑하라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기뻐하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을 살 때에 여러분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여러분에게 주어진 새로운 신분으로 인해서 자랑하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은 고귀한 하나님의 자녀 된 그 신분 때문에 자랑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또한 반대로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니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영적으로 빈곤하고 비천한 자임을 알게 되었으니 그것을 자랑하라는 말입니다. 전에는 돈 좀 가졌다고 세상에 무서운 것 없이 사람 무시하고 살았는데, 이제 예수님을 알고 나니까 그것이 별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죄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겸비해졌으면 그로 인해 자랑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누리는 축복이 아닙니다. 특히 부자가 자신의 낮아짐을 안다는 것은 특별한 은총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입니다(10:25 참조). 가능성이 없다는 겁니다. 부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자가 자기가 자기 집에서 일하는 종들이나 비천한 자와 마찬가지인 죄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 엄청난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자유의 율법을 따라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왜 율법을 자유의 율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야고보 125절에는 자유롭게 하는 율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자유의 율법이라고 표현합니다. ‘자유롭게 하는 율법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것은 율법의 기능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율법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짓는데서 부터 벗어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율법은 죄책감으로부터, 이미 지은 죄의 부담감으로부터 우리의 양심을 자유하게 합니다. 율법은 지금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미 지은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처지는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율법을 들을 때 자유합니까? 아니면 아직도 율법이 여러분을 속박합니까? 죄를 지은 인생에게 하나님의 율법은 무섭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밝게 비치면 비칠수록 우리의 삶이 폭로가 되니까 두려워합니다. 율법을 알면 알수록 우리의 죄가 드러나니까 양심의 고통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우리가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양심이 속박을 당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삶에서 어떤 열매를 거둘 것입니까? 오늘 본문이 말하는 열매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열매를 가리켜 의의 열매라고 합니다. 의의 열매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의의 열매란 의로운 열매로 볼 수도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이 이 씨를 심었습니다. 그럼 화평케 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산상보훈을 보니까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5:9)”

 

“(다음으로) “의의 열매란 의로운 행동이 산출한 열매로도 볼 수 있습니다. 열매를 맺게 한 것으로서의 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좀 쉽게 풀어 보면, 성경에는 공의의 열매를 화평이라고 했으며(32:17 참조),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지 않는 곳에는 어떤 화평도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 사이의 화평을 이룬다는 것은 신기루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의의 열매는 이렇게도 해석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작점이 의가 될 수도 있고 궁극적인 열매가 의가 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열심히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열매를 주렁주렁 맺게 되기를 원합니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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