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회고] 광복 전의 악랄한 일제의 교회탄압

소재열 | 기사입력 2020/08/04 [02:10]

[역사회고] 광복 전의 악랄한 일제의 교회탄압

소재열 | 입력 : 2020/08/04 [02:10]

▲ 신사참배 모습  © 리폼드뉴스

 

【(리폼드뉴스)일제는 모든 종교, 종파를 막론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이에 천주교 신사참배를 정식으로 공인했다(1932 교리서 내용 수정, 1936.5 로마 교황청 참배 허용 훈령). 천주교회는 처음에 개신교회들과 함께 신사참배에 반대했다. 그러나 독일, 이태리, 일본이 ‘3국 동맹’을 맺은 이후, 바티칸의 교황사절 마렐라(P. Marella) 대주교는 일본 정부에 의해 설득당하고 말았다.

 

1936년 5월 25일 교황청 포교성은 “신사는 황실 존경과 애국용사 존경을 나타내는 애국심의 발로이며 자발적인 것”이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 천주교회는 훈령을 받아들여 신사참배를 결정했다.

 

감리교 역사 신사참배를 공인했으며(1936), 1938년 9월에 재확인하였다. 감리교 총리사 양주삼은 1936년 4월 10일자 『監理會報』에서 신사 문제에 순응하였다. 1936년 6월 29일 총독부 초청 좌담회에서 일제의 입장을 따르겠다고 했다. 1938년 9월 3일 성명서를 통해 신사참배가 교리에 위배 되지 않는다고 확인했다.

 

▲ 남산의 조선 신궁(1918년 착공-1925년 완성)  © 리폼드뉴스

 

캐나다 선교회는 1938년 10월 21일에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수용하기로 하였다. 안식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등 대부분이 신사참배에 응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제27회 총회(1938.9.10)에서  신사참배 결의결의했다. 1938년 2월 평북노회는 신사참배에 굴복했고, 9월 총회까지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굴복하고 말았다.

 

총대들은 일제에 의해 총회에서 신사참배에 동의, 침묵, 아니면 총대에서 사퇴하라고 압박을 받았다. 총회 당일 사복형사 2명이 각 총대와 동행했다. 총회 장소에는 경찰간부 수 십인이 칼을 차고 자리를 잡았고 총대들 사이에 사복경찰들이 끼어 앉았고 양편 좌우에도 무장경관이 둘러쌌다. 주기철, 채정민, 이기선, 김선두 목사들은 사전 구속되었다.

 

제27회 총회가 파하자 총회장 홍택기 목사와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는 임원들을 인솔하여 신사참배를 했다. 총대들도 총회가 끝난 후 남산에 가서 신사참배를 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신사참배 결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남산의 조선신궁 총회임원들 신사참배를 하고 있다.  © 리폼드뉴스

 

“아등(我等)은 신사가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 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하고 추히 국민정신 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함.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선교사들은 1시에 따로 모여 총회의 결정에 대해 “① 이 결정은 하나님의 말씀과 총회의 헌법에 위배된다. ② 모든 총대들은 동의안에 대해 발언권과 거부권을 무시당했다. ③ 강압으로 이루어진 결정은 일본정부에 의해 인정된 종교자유에 위배된다.”라며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38년 10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시국대응 기독교장로회대회”를 개최하였다. 3천 명이 참가한 가운데 황국 신민서사를 제창하고 조선신궁을 참배했다. 그리고 신도대회 개최하여 황거요배, 국가합창, 무운장구를 기도한 후 산회했다.

 

1938. 9. 10.에 제27회 총회를 마치고 나서 1938년 12월에 장로교회의 홍택기, 김길창, 감리교회의 양주삼, 김종우, 성결교회의 이명직 목사는 일본 이세신궁과 가시하라 신궁을 참배했다.

 

일제의 징발, 창씨 개명, 1943년-1945년에 이르는 각 지역 교구 회의록에 의하면 창씨 개명한 목사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 리폼드뉴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39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 장로회 연맹’을 조직하여 일본에 협조했다. 총회에 정인과 목사는 “우리 장로교 교우들이 다른 종교 단체보다 먼저 시국을 철저히 인식하고 성의껏 각자의 역량을 다하여 전승, 무운장구 기도, 전사병 위문금, 휼병금, 국방헌금, 전상자 위문, 유족 위문 등을 사적으로 공동 단체적으로 활동한 성적은 이하에 숫자로 표시되었습니다. … 애국반원들의 활동의 소식을 들을 때 … 이만하며 하는 기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각 종교와 교파별 신사참배 결의가 확정되자 일제는 더욱 교회와 총회를 압박하고 나섰다 이제 각 교파별로 일본기독교로 예속시키거나 해산 및 통합을 시도했다. 1943년 5월에 조선예수교장장로회 총회를 해산하고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안에 예속시켰다. 1943년 8월에 감리교 역시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으로 예속시켰다.

 

1943년 12월 28일에 안식교 아예 해산시켰으며, 그해 12월 29일에 성결교도 해산시켰다. 해방을 앞둔 1945년 7월 19일에 모든 종파를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통합하고 말았다. 조선의 개신교를 장악할 목적으로 기존의 각 교파의 총회를 해산하고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통합하여 관리하게 되었다.

 

제27회 총회(1938)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자 신사참배 문제로 평양신학교가 폐교되자 교역자 양성의 길이 막혔다. 보수신학자인 박형룡 박사는 국내에 없는 상황이었다. 친일 성향의 인사들 주축이 되어 신학교를 재건했다.

 

일제의 강제 징발(좌), 아동들까지 조선신궁 참배에 동원하다(우)  © 리폼드뉴스

 

1938년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결의된 다음해인 1939년에 채필근 목사가 중심이 되고 서울의 김영주, 차재명 목사가 동조하고, 전북의 김대현 장로가 재정을 지원하여 조선신학교 설립 기성회가 발족했다.

 

1940년 4월 경기도 지사의 강습소 인가를 받아 승동교회에서 조선신학교(한신대 전신)가 개교하였다. 이는 친일 인사들에게 신사참배 가결에 대한 답례와 같은 것이었다.

 

  조선신학교(1940) 승동교회 안© 리폼드뉴스

학원장은 김대현 장로였으며, 이사는 김영주, 함태영, 조희렵, 한경직, 윤인구, 김관식, 오건영 등이다. 김재준 목사는 교수가 됐다. 설립목적으로 “복음적 신앙에 기해서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고 충량유위(忠良有爲)한 황국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한다.”였다.

 

승1940년 2월 채필근 목사는 총독부 인가를 받은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1941년 2월에는 평양신학교 황민화를 위한 목사 재교육 실시를 교육목표로 삼았다.

 

 1940년 10월 20일에 애국주일 예배를 실시하여 ‘국방헌금’을 하였으며, 1940년 12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 장로교연맹 해체’를 해체하고 ‘국민총력연맹’을 결성하였다. 또한 1941년 8월 14일에는 ‘총회 중앙상치위원회’가 ‘전시체제 실천 성명서’를 발표하여 애국기 헌납, 금속품 공출, 폐품 회수, 조선장로교도 애국기 헌납 기성회 조직을 하였다.

 

1941년 11월 22일 제30회 총회 총대 일동이 개회 다음날 아침 평양 신사에 참배를 하기도 했다. 1941년 10월 30일부터 11월 1일까지  72명의 노회 대표들이 신궁터를 근로봉사(청소)하기도 했다(제30회 총회결의, 1941).

 

1942년 2월 10일에는 애국기 1대와 기관총 7정 자금 15만 317원 50전을 헌납했다. 이에 일본 해군성은 비행기 이름을 ‘조선장로호’로 명명했다.

 

 일본 해군성은 비행기 이름을 ‘조선장로호’로 명명했다. © 리폼드뉴스

 

1942년 4-5월에 교회의 종 헌납 공문발송하고 11월 현재 1,540개 교회 종이 헌납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이름의 마지막 총회가 1942년에 해집되는 해에 찬송가 가사 개정 및 삭제가 이루어졌다.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31회 총회(1942년 10월 16일) 평양 서문외교회당에서 회집되었다. 개회 전에 대동아 공영권 건설을 지지하는 선언문 채택하였으며 9월 20일에 해군에 헌납한 전투기 명명식 갖다(조선장로호)는 보고가 있었다. 외국 선교사 전원이 출국한 상태였으며, 총회 회의록 일본어로 정리되었다.

 

결국 1942년 총회를 끝으로 폐쇄되고 1943년 5월에는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을 만들에 이에 편입하고 말았다.

 

1943년 4월 3일 기독교단 대표자들이 일본대표자들과 함께 나라현 가시하라 신궁에 가서 신사참배 후 "대동아전쟁 적국인 미국의 항복을 비는 기도회"가 열린 일본 나라현 가시하라 입구에서 기념촬영. 신궁에  우측에서 좌측으로 첫번째 유호준, 류재한(뒤편이 홍택기), 김응순, 양주삼  © 리폼드뉴스

 

일제는 교회에 요구하는 수준이 더해갔다. 1943년 8월에 채필근 통리사의 “결전태세 확립방책” 공문은 그해 9월부터 주일 오전 집회만 허용한다고 했다. 1944년 1월 12일에 평북노회장 김진수 목사의 공문은 제2차 애국기 헌납기금 모집의 건, 징병제 실시에 따른 국민태세를 정비하는 운동에 관한 건을 발표했다.

결국 1944년 7월 19일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이 아닌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모든 교파 통합을 시도하고 말았다.

 

이어서 1944년 6월에는 총독발표문 10개 조항이 발표되었다.


1. 구약금지, 신약에서 재림과 최후심판은 삭제(천황모독)
2. 교회병합, 한 지역에 한 개 교회만 둔다.
3. 모든 교회 안에 작은 신사를 설치, 천조대신지궁(天照大神之宮) 푯말 부착
4. 교회지도자들과 임원들은 모두 미소기하라이(淸淨)
5. 교회모임은 1주일에 한번 1시간 미만, 지역경찰서의 사전 허락
6. 일요일에도 평상시와 같이 사업과 모든 일을 지속

▲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설립 임원 및 교구장들(45.5.7)     ©리폼드뉴스

7. 그리스도인들은 신사참배에 지도 역할을 한다.
8. 복음 설교자는 총독부로부터 허락을 맡은 자로 제한
9. 서구식 교회 건물은 일본식 건축양식으로 개조
10. 한국인 교회는 항상 일본 기독교회와 긴밀한 관계 유지

 (마치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일제시대 교회 탄압에 버금하는 법령이 될 것이다.)

 

이런 내용은 본 교단 총회가 해산되고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이 아닌 ‘일본기독교조선교단’ 내 각 교구에서 시행하였으므로 각 교구 회의록에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종전 각 지역의 노회를 폐쇄하고 교구로 통합하였다.

 

1945년 8월 15일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가 다가오자 일제는 더욱 악랄한 교회탄압이 이어졌다. 일제는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새벽이 다가온다는 진리를 모르고 있었다.


(계속) 다음은 1945년 해방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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