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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박형룡 박사와 함께 한국장로교의 신학을 지킨 51인 신앙동지회,「불기둥」 창간호(1947. 12. 9)에 실린 “파수군에게”에 대한 “요명”시이다. 이 시는 신앙동지회의 결연한 의지를 엿보게 하는 시이다. 너 예루살렘 성 위에 파수보는 자여 잠 들었느냐? 밤은 정적에 깃들이고 달빛은 평화에 요를 편다. 마는… 저기 성 돌밑에 여우의 짖는 소리 들리지 않느냐? 저기 들보 위에 가마귀 우는 소리 들리지 않느냐? 너 성성(聖城) 시온을 지키는 자여 나팔을 불라!! 저 기드론 계곡에 복병이 어른긴다. 저 애굽도로 위에 병거 소리 요란타 오오 성성에 닥쳐온 운명의 날을 파수군이여 나팔을 불라 잠을 깨워라 새벽은 이미 닥쳐와 먼 동이 트이건만 엊저녁 향락에 지친 시온은 아직 잠잔다. 피에 주린 원수의 칼이 문전에 매복하고 언덕에 기어오르는 적병의 거센 숨소리 네 넋을 서리치는데 어찌하려나 파수군이여 오! 잠든 파수군이여! 나의 파수군이여 만유 주의 말씀을 다시 듣자 “내가 시온에 파수군을 세우노라 너는 깨어 칼이 올때 나팔을 불라“ -게으름이냐 - 겁이냐 - 뇌물이냐 너는 오직 이들을 물리치고 목쉬게! 피나게! 나팔을 불라. 오! 어찌하리오. 예루살렘 성위에 파숫군이 잠들었으니… 도적은 담을 넘고 원수는 성거리에 흥소컨만 이리에게 찢기는 양 떼 같이 우박맞은 채소밭 같이 내 사랑하는 예루살렘이 노략 당하건만 종시 파숫꾼은 잠잠 하였도다. 제사장은 여우굴에 잠들고(렘2:8) 선지자는 부엉이 나태래 밑에 숨었고 사도라는 자마져 벙어리 개 같이 짖지 못하는 이때 누구냐!! 시온을 사랑하는 자여 나팔을 불라. 정규오 회장 역시 학교측으로부터 많은 유혹이 있었음을 밝히면서, 끝내 진리를 택하게 되었던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학우들 사이에는 동요가 점증하게 되었다. 학교측에서는 이를 알아차리고 선교사 방위량 목사를 청하여 특별집회도 가졌고 개별 접촉의 무마작전도 전개했다. 나 역시 김재준 목사에게는 한번, 송창근 교장에게는 몇 차례 부름을 받고 외국 유학의 유혹과 권면을 받기도 했다. 학교당국에서 전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나는 이를 거절했다. 외국유학이 일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큰 일인 것은 틀림이 없지마는 한국교회가 자유화 될 때 받은 피해는 보다 더 큰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총회는 해방 후 교회 재건을 비롯해서 각 노회 재건, 총회 재건으로 인하여 어수선하였다. 그동안 지켜왔던 장로교의 정통보수신학에 대한 회복과 재건보다도 노회와 총회를 재건하는 일이 더 급한 문제였다. 이러한 어수선한 교계 분위기 때문에 총회 직영신학교인 조선신학교에서는 장로회 총회의 신학적 입장이나 교리, 신조에 대해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 탈선적인 신학을 외친 조선신학교 교수들은 자신들이 이미 정해 놓은 교육이념과 교육 목표를 착실히 실행해 옮겨가고 있었는데, 교수들이 생각지도 못한 일이 신학교 학생들에게서 일어났다. 1946년은 조선신학교로서는 큰 혼란의 한 해가 된다. 조선신학교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는데, 신학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학생들을 통해서 논쟁이 시작된다. 자유주의 교수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과 이념을 학생들에게 주입시켰는데 한계를 노출하게 된다. 왜냐하면 일부 신학생들의 정통보수신학에 대한 열망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수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이념을 장로회 총회에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신학생들을 자신들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어야 하기에 신학생들부터 설득해야만 했다. 그러나 평양신학교에서 정통보수신학의 훈련을 받고 입학한 학생들과 남한의 교회에서 선교사들을 통해 정통보수신학과 신앙의 배경 속에서 성장하여 목회자가 되겠다고 신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자유주의 신학이 뚫고 들어가기에는 너무나 견고하였다. 교수들의 자유주의 신학 중심의 강의 내용은 학생들의 노트에 적나라하게 기록되고 있었다. 해방 후 자유주의 신학이 한국장로교회를 점령하려고 할 때 점령군을 저지하는 1차 저지선은 조선신학교 내 정통을 사랑하는 학생들, 즉 51인 신앙동지회였다. 학교 측은 이 학생들 중 주동자 6명을 퇴학시키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6명뿐만 아니라 51명 외에 10여명도 함께 조선신학교를 자퇴함으로 이제 조선신학교는 정통보수신학과 거리가 먼 신학교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60명의 학생들의 자퇴는 조선신학교가 정통보수신학과 거리가 멀다는 것과「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신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조선신학교 입장에서는 이 사건을 자신들만의 교권을 형성하기 위해 정통보수신학과의 차별화를 보여준 계기로 생각했을 것이다. 총회가 교수들을 함부로 제거할 수 없다는 사실과 자신들과 뜻을 함께 하는 신학교 이사들과 총회 인사들이 있다는 사실은 그들로 하여금 양보할 수 없는 의지를 불태우게 하였다. 당시 조선신학교 내에서 교육되어진 김재준, 송창근 등의 자유주의적인 신학 입장이 정통보수신학의 성경관과 다르며, 현대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과 다르다는데 동의한다면, 당연히 그 당시 조선신학교 내 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하고 저항했던 신앙동지회가 한국장로교회의 정통개혁신학을 지킨 파수꾼들이었다는 평가에도 동의하게 된다. 본 교단(예장합동), 교단의 정체성과 개혁신학을 보수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소재열 지음, 한국장로교회사 중에서> <저작권자 ⓒ 리폼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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