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E에 대한 박형룡 박사의 평가

“총회신학대학 교수로서 국내외의 조직체와의 관계하는 일은 이사장과 학장의 허락으로만 하기로 하다”

소재열 | 기사입력 2010/02/09 [03:41]

NAE에 대한 박형룡 박사의 평가

“총회신학대학 교수로서 국내외의 조직체와의 관계하는 일은 이사장과 학장의 허락으로만 하기로 하다”

소재열 | 입력 : 2010/02/09 [03:41]
소재열 목사 지음 <한국장로교신학 전통> 중에 제10장 한국장로교회의 분열 중에서 통합측과 합동측의 분열의 원인 가운데 WCC 문제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내에서 어떤 경로를 따라 문제가 제기되었는지에 관한 역사적인 고찰과 진행과정, 또한 대책과 대안이라는 주제로 연재한다. 주)는 원본에는 있지만 생략한다. 책은 2월 중순 출간예정.(리폼드뉴스 편집자주)

▲ 박형룡 박사가 귀국하여 부산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할 때 취임사를 하고 있다. 뒤에는 박윤선 박사가 보인다     © 리폼드뉴스
“에큐메니칼 운동 반대, W.C.C. 탈퇴 건의서”가 제43회(1958) 총회에 제출되었지만 본회의 석상에는 상정되지 못하게 되자, 이 건의서의 내용에 대한 반박문과 성명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런 사태는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있게 될 분열을 예고하였다. 결국 제44회 총회는 임원선거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장로교는 제3차로 합동측과 통합측이 분열되고 말았다. 여기서 박형룡의 N.A.E.와 W.C.C.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주목해 볼만 하다. 제3차 분열 이후 박형룡 박사의 W.C.C.에 대한 글은 그리 많지 않다.
 
다만 1972년 그가 1935년의 저서인「선평」을 수정 증보하여 출판한「현대신학비평」 제12장에 “에큐메니칼 운동 신학”에서 다루고 있다. 1958년 3월 신학지남을 통해 발표한 에큐메니칼 운동을 다룬 글보다 훨씬 더 강경한 논조였다. 에큐메니칼 운동을 “교회 통일을 향한 운동”이라고 단정하고 그들은 “자유주의의 대광장”으로 몰아가는 교리무관심주의자들이라고 비판했다. 또 W.C.C.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장이 되었고, 공산국가에 대하여 지나치게 호의적이며 공산국가의 이익을 위하여 활동하고 있는 사례들을 적시하면서, 에큐메니칼 운동이 용공성일 수밖에 없음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박형룡은 1958년의 글에서는 W.C.C. 운동에 대한 하나의 대응수단으로 보수주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언급하였었다. 보수주의 에큐메니칼의 좋은 사례로 ‘국제기독교협의회’(ICCC)와 ‘복음주의연합’(N.A.E.), ‘세계복음주의동맹’(W.E.F.) 등을 언급하였다. 이 모든 국제기구들은 “성경 전부의 전적 권위를 참으로 수납하는 신자들 중에 보다 더 친밀한 협력을 격려하기를 욕망”하는 단체들이다.
 
물론 보수주의 에큐메니칼 운동들 사이에도 그 강도의 치이가 있어서 ICCC가 W.C.C.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적’(對敵)하는 것이라면 N.A.E.나 W.E.F.는 W.C.C.와의 관계를 끊을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박형룡은 이 국제기구들을 정통적인 복음을 믿는 보수주의 단체들로서 인정하였었다.
 
그래서 1953년에는 신학적으로 이상이 없다고 해서 박형룡 박사의 찬성하에 ‘한국 N.A.E.’가 조직되었다. 그래서 박형룡과 고락을 함께 했고 추종했던 ‘51인 신앙동지회’를 N.A.E.라고 했다. 이 N.A.E.가 합동과 통합이 분열될 때는 합동의 별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N.A.E.측이었고 분열 당시 합동측에 소속되어 있었던 많은 목회자들이 N.A.E.에 개인적으로 가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1년에 박형룡은 N.A.E.를 신복음주의로 비판했다. 그 N.A.E.가 신학적으로 잘못되었음을 비판하였는데, 1972년의 그의 글에서는 보수주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하여 과거의 평가와 전혀 달랐다. 그는 N.A.E.나 W.E.F.와 같은 보수주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거부하고 I.C.C.C.만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한다. 그 이유는 N.A.E.나 W.E.F.는 ‘신복음주의자’들의 집단으로, 또 그들 단체가 W.C.C.와 같은 운동을 거부하지 않기 때문이며, 칼 맥킨타이어의 ‘미국기독교협의회’(A.C.C.C.)를 거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N.A.E.는 용공적이며 그 지도자들이 친공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여 비판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N.A.E.는 “신복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운동이라는 것, 이단을 묵인하고 선포한다는 것, 배도교단 안에 머무는 타협자들의 집단이라는 것, 세계 전도대회의 용공행위(容共行爲), N.A.E. 지도자들의 친공활동”이라는 문제로 비판하였다.

1959년의 분열이 있기 전에는 박형룡을 추종하던 사람들이 N.A.E. 파로 불리웠고 박형룡도 N.A.E.에 대하여 호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세력화 된 이 N.A.E. 그룹을 통하여 W.C.C.를 반대하였고, 교단 분열 때는 합동측의 중심 축이 되었었다. 그런데 1972년에 와서 박 박사는 “전에 우리 교단의 지도자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N.A.E.에 가입한 것은 우리 교단이 W.C.C에 가입하여 있을 때에 잘 살피지 않고 경솔히 한 일”이었다고 시인한다. 그러면서 “N.A.E.는 W.C.C.에 비해서 보수적이라는 관념을 가졌으며 W.C.C. 에큐메니칼 측과 대립할 때에 우리는 N.A.E.측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만족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10년이 지나 N.A.E. 가 “신자유주의 내지 신 이단” 집단이라는 것이 밝혀진 지금에 와서는 “악에 참여하지 말고 멀리 피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그대로 묵과하여 두면 멀지 않은 장래에 우리 교단 안에도 미국에서와 같이 신복음 자유주의 이단 신학의 창궐(狼觸), 각종 이단이설의 허용, 용공친공활동(容共親共活動)의 성행(盛行)으로 인하여 우리 교회 본래의 정통신학 노선은 잃어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I.C.C.C. 에 대하여는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정통신앙을 옹호함에 매우 철저하고 강경하게 싸워 왔다”고 극찬한다. 또한 ‘개혁주의 에큐메니칼 대회’ (Reformed Ecumenica1 Synod, R.E.S.)에 대하여서도 이들이 과거에는 W.C.C. 에 대하여 도전적 태도를 취하였으나 최근 들어 영향력 있는 교회와 개인들이 W.C.C.에 가입함으로 ‘좌경’(左傾)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런데 합동측 총회에서도 1963년 R.E.S. 5회 대회 때에 명신홍 박사를 보내었고 1968년 암스테르담의 6회 대회 때 대표들을 보내어 정식으로 가입한 바 있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R.E.S.의 신학적 좌경을 알게 되어 1972년 제57차 총회에서 R.E.S.로부터 탈퇴하였다.

이처럼 박형룡이 W.C.C., N.A.E.를 비롯해서 보수주의 에큐메니칼에 대하여 태도변화를 보인 이유에 관해 장동민은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W.C.C.에 관하여, 그리고 N.A.E.에 관한 정보를 접하면서 그들의 실체가 더 잘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또 다른 원인으로 “W.C.C.를 용공으로 그리고 급기야는 N.A.E.도 용공친공으로 몰아서 이를 반대한 데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두려움과 사회적인 콤플렉스를 추측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박형룡의 3천만환 사건으로 인한 교장 사퇴의 문제나 한국장로교 내에서 에큐메니칼(W.C.C.)측과 복음동지회(N.A.E.)측의 정치적인 갈등,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고질적인 지방색의 문제(많은 사람들은 합동측이 황해도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통합측은 평안도 출신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고 이해한다)가 있었다”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입장을 취한 중요한 이유는 박형룡의 국제기독교협의회(I.C.C.C.)와 그 대표자인 칼 맥킨타이어(Carl McIntire)와의 관계 때문이라고 한다. 박형룡은 신복음주의 비평에서 N.A.E.와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와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에 우리 교단의 지도자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N.A.E.에 가입한 것은 우리 교단이 W.C.C.에 가입하여 있을 때에 잘 살피지 않고 경솔히 한 일이었으나 N.A.E.는 W.C.C.에 비해서 보수적이라는 관념을 가졌으며 W.C.C. 에큐메니칼 측과 대립할 때에 우리는 N.A.E. 측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만족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N.A.E.로부터 탈퇴하라는 총회 결의가 있은 후에도 우리 교계는 N.A.E.를 보수주의 신앙 운동으로 만 알고 지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참된 보수주의 신앙 운동이 아니라는 것이 판명된 지금에는 이 운동을 멀리 피해야 될 것이다.

박형룡은 한국복음주의 연맹에 대해서도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는 WEF(World Evangelical Fellowship)의 미국과 다른 각국의 지부의 명칭이니 한국에는 ‘복음주의 연맹’이라고 칭하나 ‘한국 N.A.E.’가 더 잘 알려지는 명칭이다. 이 N.A.E.는 신복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진행되는 에큐메니칼 운동이니 W.C.C.소속 교파들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개인적으로 바른 신앙을 지킨다는 국제적 연합이다. ⋯ N.A.E.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결국 W.C.C., 공산주의, 기타 과격한 신사상 운동들과 친선 우호 하는 일”이라고 평가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크리스차니티 투데이」, 칼 헨리, 한국복음주의 연맹, 로잔언약, 빌리 그래함 등에 대해서 신복음주의라고 비평한다. 이 같은 박형룡의 비평에 권성수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박형룡 박사의 신복음주의 신학에 대한 이런 비판은 당시 교회사적 위치를 고려하여 평가되어야 하겠지만, 그가 살아 있다면 지금 현재의 한국 복음주의 협의회와 복음주의 신학회 활동을 어떻게 보겠는가 하는 질문이 솟구치는 것을 억제할 수 없다. 그의 신학전통에서 교육받고 현재 활동하는 많은 신학자들이 이상과 같은 신학적 태도를 가질 때 소극적이고 분파적인 활동을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질문도 역시 제기된다.

계속해서 권성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적 정통신앙과 신학을 사수하면서도 ‘성경에 따라 전통을 항상 개혁하는’ 자세로 창조적 학문 활동을 하며 개혁신학으로 한국과 세계에 뛰어 들어 공헌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 박형룡의 조직신학이 성경해석의 고귀한 신학적 테두리를 제공한 것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것이 오해되어 성경으로 하여금 삶 전체를 총체적으로 변화시키는 성경 자체의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쇠고랑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성경해석은 정통적 조직신학의 넓은 테두리 안에 있으면서도 성경의 지평을 바로 파악하고 그것으로 현대의 지평을 변혁시키도록 하는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작업을 계속해 나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박형룡과 그의 시대는 분명 자유주의 신학, 신복음주의 신학, 현대주의 신학과의 투쟁을 위해서 조직신학적 접근에 의한 변증작업은 정통보수신학을 지키기 위한 유익한 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신학보다, 조직신학이 상위 개념의 신학으로 극찬 받은 시대였을 것이다. 이는 정규오의「박형룡 교의신학 전집 출간 기념설교」(1973년10월 29일)에 잘 나타난다.

총회를 진두지휘하는 어떤 이사는 조직신학 보다는 성서신학이 보다 중요하다는 발언 등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어떤 유력한 장로는 “박 박사님에게 당신이 목사이냐 당신이 한국교회와 총신을 망쳐 놓았다”고 주먹질을 하는 장로를 나는 목도했다. 어떤 목사교수는 박 박사의 입장을 공공연하게 비난하는 소리를 들은바 있다.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의 관계에 대한 체계적인 정립에 소홀하여 오로지 조직신학 관점이 상위개념의 신학으로 인정하고 있던 그 시대의 한계는 성경신학과 그 지평속에서 펼쳐지는 삶의 적용, 즉 권성수의 지적대로 “삶 전체를 총체적으로 변화시키는 성경 자체의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는 약점이 있던 시대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또한 그 시대는 한국장로교회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비진리와의 투쟁과 논쟁 속에서 변증적인 작업을 위해서는 조직신학의 방법론이 도움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박형룡은 N.A.E.을 신복음주의 신학으로 평가하며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1) 신복음주의자들이 근본주의를 혹평하고 있다. (2) 그들이 “과학의 빛에서 성경을 해석”고 있다. (3) 사회복음운동을 받아들이고 있다. (4) 신복음주의자들의 비분리주의(non-separationism)를 반대한다. 이와 같은 신학적인 이유로 신복음주의를 비판했다면 신학 외적 이유로 장동민은 총신과 총회 내 정치적인 역학구도 속에서 “신복음주의 비판의 신학 외적 요인들”에 관해 언급한다.

1953년에는 신학적으로 이상이 없다고 해서 박형룡 박사의 찬성하에 ‘한국 N.A.E.’가 조직되었다는 정규오의 언급은 N.A.E.에 대한 박형룡의 신학적 입장을 인정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10년 지난 후에는 박형룡은 N.A.E.를 신복음주의로 비판하면서 신학적으로 잘못되었다면서 1953년에 잘 살피지 않고 N.A.E.에 가입한 것은 잘못이며, 이제 “신자유주의 내지 신 이단 집단”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에는 피해야 하며 1959년 합동과 통합측이 분열될 당시 합동측에서는 개인적으로 N.A.E.에 가입한 자들은 탈퇴해야 한다는 총회 결의를 따르라고 말한 것은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이러한 혹독한 경험을 한 대한예수교 장로회 제59회 총회(합동; 1974)는 “총회신학대학 교수로서 국내외의 조직체와의 관계하는 일은 이사장과 학장의 허락으로만 하기로 하다”는 결의를 하게 된다.

혼란의 시대에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신학을 정립하고 교회를 지키는 일은 그냥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르면서 얻어진 하나님의 축복들이다. 2천년 교회사를 통해 볼 때 하나님은 시대 시대마다 순수한 하나님의 복음을 지키며 전승하도록 인도해 주셨다. 그 복음이 증거 되어진 곳에 교회가 설립되었고 그 교회를 통해서 지상 최대의 사명인 진리 투쟁이었다. 진리의 타협은 진리의 왜곡을 가져오고 그 결과 교회는 많은 혼란으로 이어진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시행착오를 범하며 정리하기에 시간이 없다. 그동안 한국장로교회는 너무나 많은 시행착오를 범했다. 단순히 외국 서적을 번역하여 그들의 주장을 반복하여 되풀이 한다고 해서 되는 그런 시대는 지났다. 충분한 비판과 검증을 통해서 성경적 신학을 정리하고 지킴으로 교회에 봉사하는 신학이 되었듯이 교회를 생각하는 신학적인 사명은 매우 중요하다. 선조들이 이룩해 놓은 거룩한 신학 작업들을 평가절하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런 분들이 이룩해 놓은 결과에 수해자들이다. 진리보수와 전승을 위해서 제도적인 차원 까지를 생각해야 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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