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의 원인 WCC 문제, 역사적 전개과정

51인 신앙동지회의 복음주의 협회(NAE)와 세계교회협의회(W.C.C.)

소재열 | 기사입력 2010/01/22 [23:01]

분열의 원인 WCC 문제, 역사적 전개과정

51인 신앙동지회의 복음주의 협회(NAE)와 세계교회협의회(W.C.C.)

소재열 | 입력 : 2010/01/22 [23:01]
소재열 목사 지음 <한국장로교신학 전통> 중에 제10장 한국장로교회의 분열 중에서 통합측과 합동측의 분열의 원인 가운데 WCC 문제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내에서 어떤 경로를 따라 문제가 제기되었는지에 관한 역사적인 고찰과 진행과정, 또한 대책과 대안이라는 주제로 연재한다. 주)는 원본에는 있지만 생략한다. 책은 2월 중순 출간예정.(리폼드뉴스 편집자주)


▲ 1959년 제44회 총회(대전중앙교회)에서 분열된 이후 서울 연동교회에서 연동측(통합측)이 직전회장 전필순 목사의 사회로 총회가 진행되고 있다. 합동측은 승동교회에서 모였다.     © 리폼드뉴스
김의환 박사는 “한국 보수주의 교회를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해방 후 오늘날까지 한국 장로교회가 분열을 거듭한 여러 가지 원인 중의 하나는 국제적인 교류에 있어서 바른 지식과 판단의 결여를 들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발언은 1970년에 발행된 자신의 저서인 “도전받은 보수신학”에서 밝힌 내용이다.

박형룡 박사 역시 같은 시기인 1971년 10월에 기독신문을 통하여 “신복음주의 비평”을 통하여 자신이 지도했던 신앙동지회가 1953년 7월에 한국 복음주의협회(NAE)를 조직하였고 박형룡 박사의 찬성하에 이루어진 NAE를 회고하면서 “총회가 W.C.C.에 가입한 것이나 교직자들이 NAE를 조직한 것이나 다 교회의 국제 친선 교제에 열중하여 잘 살피지 않고 경솔히 한 일이었다”고 고백하였다. 즉 박형룡 박사 역시 1953년의 “한국NAE” 역시 국제적인 교류에 대한 판단 착오를 인정한 셈이었다.

신앙동지회가 중심이 된 “한국복음주의협회”(NAE)는 1954년 이후부터 등장한 W.C.C.와의 대결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진행되었다. 1959년까지 치열했던 NAE와 W.C.C.의 대립은 결국 우리 총회 안의 거대한 국제적인 기구와의 교류 문제로부터 출발하였으며 이로 인한 정치적, 교권적, 신학적 문제가 얽혀 장로회 총회는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합동과 통합이라는 두 교단으로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W.C.C.와 NAE의 국제기구와의 교류가 어떻게 진행되었고 이 문제가 어떤 형태로 분열의 씨앗이 되었는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1947년 4월 18일 대구제일교회에서 개회된 제33회 총회는 “명년에 개최된 세계교회연합회에 대표 파견키로 하다(W.C.C.)” 라고 결의하였다. 이 같은 제33회 총회 결의에 따라 1948년 제34회 총회에서는 “세계기독교 연합회 총회 경비 보조로 백불”를 지원했고 “김관식 목사의 세계기독교 연합회 출석을 위하여 매삭여비로 백불씩을 보조”하기로 결의하게 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W.C.C. 창립총회에 김관식 목사를 옵저버 자격으로 대표를 파견하여 참석하였다. 그로부터 6년 뒤 제2차 W.C.C. 총회가 1954년 8월 15일부터 31일까지 미국 일리노이주 에반스톤에서 열렸다. 이때 총회에서 파송한 대표는 이미 1953년 제38회 총회에서 “세계기독교 연합회에 초청한 대표 2인 선정건은 노회장회에 일임하여 공천하기로”결정하였다. 제40회 총회(1955) 때 총무 보고에 의하면 “김현정, 명신홍 목사는 W.C.C.(에반스톤) 대회에 참석한 일”에 대해 보고한 것으로 보아 노회장회는 제38회 총회에서 일임해 준 대표를 김현정, 명신홍 목사 2인을 공천했음을 알 수 있다.

총회는 두 사람을 대표로 파송하여 W.C.C.의 신학적 입장과 성격을 정확히 파악한 후 보고해 줄 것을 요청했다. 장로교 외에도 감리교가 정식 대표를 파송했고 한국기독교 연합회와 YMCA가 대표를 파송했으며 김정준도 이때 신문기자의 자격으로 참석했다. 이 대회는 “세계 희망은 그리스도이다”라는 주제로 전 세계 163개 개신교단 가운데 132교단과 헬라정교회에서 파송한 1242명의 대표들과 499명의 방청객을 포함 24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에반스톤의 노스웨스턴 대학(Northwestern University)에서 열린 것이다.

제2차 W.C.C. 총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대표는 총회에 보고한다. “W.C.C.에 참석하였던 김현정 목사의 보고 강연”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 큰 잘못은 W.C.C. 총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대표들은 “W.C.C. 총회의 자유주의적 노선을, 그 때 참석한 대표들로부터 충분히 보고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참석하고 돌아온 두 대표인 김현정 목사와 명신홍 목사의 상반된 보고는 한국장로교회 안의 두 조류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1956년 9월 제41회 총회(회장 이대영)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찬반양론을 벌린 끝에 에큐메니칼 연구위원을 발족시키게 되었다.

“경북노회 차태화씨의 헌의한 에큐메니칼 연구위원을 설치하여 달라는 건은 허락하고 위원은 한경직, 안광국, 황은균, 전필순, 유호준, 박형룡, 박병훈, 정규오 제씨로 선정하여 주실일이오며.”

위원 구성은 에큐메니칼을 지지하는 자로서 한경직 전필순 유호준 안광국 목사였으며, 반대자는 박형룡 박병훈 황은균 정규오 목사였다. 위원회 위원장은 한경직 목사 서기에는 정규오 목사로 조직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구성 분포가 말해 주듯 한국장로교회 총회 안에는 에큐메니칼을 지지하는 그룹과 이를 반대하는 그룹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하는 실질적인 지도자는 당시 영락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한경직 목사였으며, 이 운동을 반대하는 실질적인 지도자는 박형룡 박사와 정규오 목사였다. 한경직 목사는 WCC를 이끌고 있었으며, 정규오 목사는 NAE를 이끌고 있었다.

1956년 9월 제41회 총회에서 에큐메니칼 연구위원이 구성된 이후인 같은해 12월 13일에 기독교서회 사무실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지자인 한경직 목사의 사회로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강의를 2일 동안 실시했다. 연구위원회를 상대로 하여 에큐메니칼 운동을 객관적으로 조명해 보자는 의도에서였지만 강의는 이 운동을 지지하는 쪽의 의도대로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마포삼열 선교사의 아들 마삼락 선교사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강의를 하였는데 1910에 조직된 세계선교협의회(I.M.C)에 뿌리를 둔 W.C.C.가 교회의 연합운동이지 한 교회를 세우려는 세계교회 단일화 운동은 아니라는 사실, 에큐메니칼 운동이 이제 세계적인 추세라는 사실, W.C.C.는 특별한 교리가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주로 믿는 교파의 연합”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둔 신앙연합운동이라고 강의를 하면서 앞으로 한국교회가 세계교회 가운데 하나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에큐메니칼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강력하게 천명하였다.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는 연구결과를 제42회 총회(1957년)에 보고하였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제42회 총회, 회의록, 65-66; 에큐메니칼 연구 위원장 한경직씨의 보고는 다음과 같이 받기로 가결하다.

<보고서> 1957년 9월 23일.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 위원장: 한경직
총회장 귀하. 다음과 같이 보고하나이다.

1. 조직- 위원장: 한경직 서기: 정규오. 위원: 전필순 유호준 황은균 박형룡 박병훈 안광국
2. 총회와 에큐메니칼 운동과의 관계
1) 1948(9)년 암스테르담에서 모인 W.C.C. 대회에 김관식 목사가 참석하였다가 귀국하여 보고함으로서 정식 가입하게 되었음.
2)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모인 W.C.C. 대회에 본 총회에서는 김현정 명신홍 목사를 대 표로 파송하였음.
3) 에큐메니칼 운동이란 무엇인가?
에큐메니칼이란 말은 헬라어 오이쿠메네(ὀικουμεευε)에서 나온 말로서 우주 혹은 한 집이란 뜻이다. 이 에큐메니칼 운동을 하는 지도자들 중에는 두 가지의 사상적 조류가 있는데
(1) 전교파를 합동하여 단일교회를 목표로 하는 이와
(2) 교회간의 친선과 사업적인 병합을 목표로 하는 이가 있다.

4. 본 위원회의 태도
친선과 협조를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과거에나 현재에도 참가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계속 참가하기로 하며 단일 교회를 지향하는 운동에 대하여는 반대하기로 태도를 결정하였사오며

5. 청원 - 1) 관하 각 교회에 본 운동에 대한 사실을 주지케 하기 위하여 팸플릿을 출판코자 하오니 출판비로 금 30만환을 허락하여 주실 일이오며. 2) 본 위원회를 계속 허락하여 주시고 위원으로 인톤, 마삼락, 명신홍, 김형모 4씨를 보강하여 주실 일이외다.

이 같은 보고는 어느 한쪽의 입장을 반영하기보다는 이 운동을 지지하는 자들과 반대하는 자들 사이의 일종의 타협안이었다. 즉 단순한 친선과 협조라는 면에서는 W.C.C.를 지지하지만 교회의 단일화에 대해서는 반대한다는 것이다. 추가 임명을 요청한 네명 중에 명신홍 인돈 선교사는 반대하고 마삼락, 김형모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하는 이들이었다.

1957년 연구위원들의 첫 연구보고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오히려 제42회 총회가 지나자 에큐메니칼에 대한 찬반논란이 더욱 격렬해졌다. 연구위원들의 견해차는 더욱 심화되어 타협점을 찾기가 점점 더 힘들어져 갔고 회의는 물론 대화와 토론도 불가능해졌다. 제42회 총회가 지난 후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는 무기 정회에 들어갔다.

이듬해 1958년 제43회 총회에서는 아무런 연구 결과를 내놓을 수 없었다. 총회에서 에큐메니칼 연구위원들이 보고조차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찬반논란이 심각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에큐메니칼 연구 위원장 한경직씨의 보고는 아래와 같이 받기로 가결하다.

1. 조직
위원장: 한경직 서기: 정규오
위원: 전필순, 황은균, 유호준, 정규오, 한경직, 박형룡, 박병훈, 인톤, 마삼락, 명신홍, 김형모

2. 보고
작년 총회에서 본 위원에게 위임한 에큐메니칼 운동에 관한 연구와 책자 발행에 관하여는 형편상 실행치 못하였음을 보고하나이다.

결국 에큐메니칼 연구 위원회는 조직보고만 했을 뿐 아무 보고도 없었다. 에큐메니칼 연구위원들이 아무 내용도 보고할 수 없었다는 것은 당시 얼마나 이 문제에 관한 찬반 논쟁이 치열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에큐메니칼 연구 위원의 한사람이었던 신학교 교장인 박형룡 박사의 소위 3천만환 사건이 일어났다.

여기서 통합측과 합동측의 인식의 차이, 역사의 기록이 달라진다. 통합측에서는 “총회가 분열하게 된 근본적인 동기는 W.C.C.대 NAE의 대결이 아니라 박형룡 교장의 3천만환 부정지출을 은폐하기 위해 에큐메니칼을 걸고 나온 것이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통합측에서는 분열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박형룡 박사 3천만환 사건이라고 한다. 그러나 합동측에서는 이미 W.C.C.를 지지하는 측과 반대하는 NAE 측의 대립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첨예한 대립이 있어 왔다. 따라서 합동측에서는 통합측이 W.C.C. 문제로 분열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중간에 터진 3천 만환 사건을 줄기차게 분열의 가장 큰 원인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본다.

W.C.C.로 인한 갈등과 대립은 1954년 제2차 W.C.C. 총회 이후 1956년 41회 총회, 1957년 제42회 총회 당시 W.C.C.와 NAE 계열의 대치상황은 박형룡 박사 3천만환 사건보다 시기적으로 앞서 있다. 이미 W.C.C. 문제는 총회의 엄청난 문제로 분열되어 갈등과 대립이 진행된 후인 1958년에 박형룡 박사의 3천만환이 최종 지출되었고 이 문제가 1958년 3월 신학교 전체 이사회에서 박형룡 박사의 사표로 일달락 된 사건이다. 그러나 통합측에서는 3천만환 사건을 분열의 역사적 배경으로 전면에 등장시키며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이 부분은 정치적 배경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할 것이다.

1958년에 들어와서 총회 안에서는 이미 갈등과 대립의 주범인 W.C.C. 문제로 인하여 W.C.C.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이 뚜렷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W.C.C.를 찬성하는 이들은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장로교 서교회 소속 선교사들과 한경직, 전필순, 유호준 김형모, 계일승, 안광국 등 좀 더 개방적이거나 온건한 이들이었고, 반대하는 이들은 이대영, 박형룡, 명신홍, 이정노, 권영호, 이환수, 김윤찬, 황은균, 박찬묵, 조동진(이상 서울), 양화석, 고성모, 정순모, 박종삼, 문재구, 정규오(이상 호남), 박병훈, 노진현(이상 영남) 등 교계 중진들이었다. W.C.C.의 반대 운동의 실질적인 주역은 박찬목이었다.

1958년 제43회 총회(회장 노진현)에서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는 회원들이 연서를 받아 “에큐메니칼 문제 W.C.C. 탈퇴 건의서”를 제출하게 되었다. 이 건의서는 “세계교회연합회(W.C.C.)가 지향하는 것은 개신교의 한계를 넘어 가톨릭과 유니테리안을 포함한 신앙과 교회 제도의 보편화를 통하여 단일교회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이처럼 “동방정교 가톨릭과 3위일체 신관을 부인하는 유니테리안까지를 포함”하여 연합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친선과 협력의 한계를 넘어 “신앙과 교회 제도” 자체에 대한 재검토를 위하며, 결국 이것은 장로교 기본교리에 대한 중대한 위협일 뿐만 아니라 W.C.C.운동이 “신앙과 예배의 통일을 지향하는 단일교회운동”임을 말해 준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이 같은 건의서는 당시 서기였던 김상권 목사가 접수만 받아 놓은 상태에서 총회 본회의 석상에 상정하지 않고 백지화 되고 말았다.

1950년 4월 고려신학교의 박윤선의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 비판 이후 물밑에서 대립하던 에큐메니칼 세력과 복음주의 세력은 1956년 제41회 총회가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를 조직함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하고, 1958년 제43회 총회에 에큐메니칼 운동 반대 W.C.C. 탈퇴 건의서가 헌의됨으로 NCC와 미국장로교회 한국선교부가 주도하던 에큐메니칼 세력과 “한국NAE”가 주도하는 복음주의 세력 간의 대립이 본격화 되었다. 이 대립은 한국 교회의 유일한 주간 신문인 「기독공보」의 지면을 통한 논쟁으로까지 확대 되었다.

처음에는 NCC 총무인 유호준이 우제(愚濟)라는 익명으로 “에큐메니칼 운동 반대 W.C.C. 탈퇴 건의서에 대한 답변서”라는 유인물이 전국 교회에 살포되었지만, 이 내용은 곧 「기독공보」지상에 게제 되기에 이르렀다. 그 내용은 복음주의 지도자들의 에큐메니칼 반대 운동이 “몰이해하고 무식 인사들의 획책”이라는 불온 용어로 시작되고 “불순한 교권운동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한 부패한 교권주의자들”이라고 저주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우제의 글의 내용은 왜곡과 허위와 W.C.C.의 에큐메니칼 정신을 가장 성서적이고 정통 신학적인 것이라고 위장 선전하는 문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조동진 목사는 미국에 있으면서 이러한 내용을 읽고 “우제의 에큐메니칼 운동 반대 W.C.C. 탈퇴 건의서에 대한 답변서”에 대한 반론(反論)을 작성하여 “사실 은폐 부당하다 - 우제의 답변서에 답함”이라는 제목으로 ‘정제(正濟)’라는 자신의 아호로 기독공보에 가감 없이 게재되었다. 찬반논란이 격렬해지면서 총회는 이 운동을 반대하는 자들과 찬성하는 자들 사이의 대립이 표면화 되었고, 이로 인해 교단 안에는 분열의 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1959년 4월 9일 이를 우려한 총회장 노진현, 총무 김상권, 그리고 증경총회장과 몇 몇 교단 지도자들은 승동교회에 모여 “피차 오해와 편견으로 교회 발전에 지장을 초래할 우려”가 있음을 표명하고 “교회평화의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59년 4월 11일 발표된 이 해명서에는 당시 총회장 노진현, 총무 김상권 목사를 비롯, 증경총회장 이인식, 이대영, 전필순, 한경직, 명신홍과 교계 중진들인 유호준, 이환수, 강신명, 배명준, 김윤찬, 안광국, 박찬목, 김성준, 그리고 기독공보사 채기은이 공동 서명했다.

서명한 이들 대부분이 에큐메니칼운동을 지지하는 이들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들이 발표한 해명서는 지금까지 특별했던, 불과 3개월 전의 전투적인 W.C.C. 강변과 달리 상당한 양보를 통해 교단의 화해를 도모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화해의 분위기는 다시 경기노회 총대 사건이 발생하면서 난기류가 나타나 복잡한 현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959년 5월 14일 경기노회는 봄 정기노회에서 일어난 정치적인 사건이 발생되었다. 이 부분은 분열의 정치적인 배경에서 자세히 다르기로 한다.

에큐메니칼 세력과 복음주의 세력간의 대결은 장로교회 안에 여러 지방노회로 확산되었다. 1959년 8월 3-9일까지 전북 부안군 산내면 격포리에서는 호남지구 선교협의회 주최로 남장로교 선교구약안에 있는 10노회(충남, 대전, 군산, 김제, 전서, 전북, 전남, 순천, 목포, 제주)에 속한 목사 105명과 500여명의 신도들이 모여서 한국장로교회 최대 관심사인 에큐메니칼 운동을 연구 검초한 결과 W.C.C.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은 한국교회 유익보다는 해가 많았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1959년 8월 7일에 “호남지구 목사수양회” 이름으로 “에큐메니칼 운동 반대 W.C.C. 탈퇴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또 다른 지역들, 경북과 경남 지역과 충청남북도 등의 노회와 목사 등의 연명 성명서가 줄을 이었다.

남장로회 선교구역인 호남지역에서 W.C.C.를 탈퇴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자 당황한 한국 주제 남장로교 선교회는 같은 해인 1959년 9월 17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안의 어떠한 집단의 분파적 선동도 찬성하지 않으며 또 이에 가담하지도 않을 터”라는 사실을 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타 선교회에 비해 전통적인 복음주의적인 입장에 서 있는 남장로교회라 할지라도 본국 교회가 미국 기독교연합회(NCC)와 W.C.C.에도 가입되어 있는 상황에서 W.C.C.를 탈퇴하겠다는 10개 노회의 성명서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같은 우려는 훗날 W.C.C. 지지와 반대로 인한 대립으로 인해 총회가 분열될 때 W.C.C. 지지파인 연동측인 통합측 노선을 지지하였다. 그렇다면 44회 총회를 전후하여 남장로회 선교회는 어떤 사람들과 함께 분열될 때인 제44회 총회를 준비해 왔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갈등과 대립, W.C.C.로 인한 성명서 전은 결국 1959년 9월 24일에 대전중앙교회에서 소집된 제44회 총회에서 표출되어 분열되고 말았다.

필자가 볼 때 합동과 통합의 분열은 총회내 교권세력의 대립이 분열에 대한 역사적 배경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교권은 WCC라는 신학적인 문제로 형성된 교권이었다고 본다. WCC에 대한 평가가 단순히 교회간의 친선을 도모하는 연합체인가? 아니면 단일교회를 추구하는 신학적 이념을 추구하는 연합체인가에 대한 각각의 평가에 대한 결과로 찬성파와 반대파라는 교권이 형성되었다면 그것은 교권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인 문제인 셈이다. WCC를 반대하는 반대파가 신앙동지회의 NAE가 주축이 되어 총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지킨 사건으로 볼 수 있다.
 
다음 연재 : <N.A.E.에 대해 박형룡 박사의 평가>

소재열 목사(교회사, 법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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