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원 교수, “CHAT GPT와 설교”

김순정 | 기사입력 2026/05/30 [07:59]

이상원 교수, “CHAT GPT와 설교”

김순정 | 입력 : 2026/05/30 [07:59]

 

  © 리폼드뉴스


총회 신학부(부장: 윤삼중 목사)가 5월 21일 개포동교회에서 신학포럼을 개최했다. 이 글은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은퇴교수인 이상원 교수가 신학포럼에서 발표한 내용을 요약, 편집한 것이다.

  

1989년 미국 한인교회 부목사 사택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이 부목사는 보여줄 것이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서재로 데리고 갔다. 서재에 들어서자 책꽂이에 노랑 서류 봉투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래서 이 봉투들이 다 뭐냐고 물으니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본문에 대해서 한국의 명설교자들이 행한 설교를 전부 다 수집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이제 저의 평생 설교 준비는 끝났습니다. 본문이 주어질 때 수집한 자료를 읽고 정리하면 짧은 시간 안에 명설교가 나오니까요.”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이 부목사님이 행하는 설교는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이 부목사의 목회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2001년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되었는데 서울에 있는 중형 교회 담임 목사로 어떤 K 목사님이 초청을 받았다. 교인들은 후보자들의 설교를 듣고 난 후 탁월한 설교를 한 K 목사를 청빙했다. K 목사는 1년 가까이 주일예배 설교를 했고 그의 설교는 교인들에게 명설교로 감동을 주었다. 그런데 초신자 한 명이 우연히 인터넷으로 어떤 유명한 목사의 설교를 듣던 중 담임목사의 설교가 이 목사의 설교와 예화까지 똑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초신자는 1년 동안 행한 담임목사 설교가 이 유명한 목사의 설교와 똑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은 당회에 전달되었고, K 목사는 사임하게 되었다.

 

오늘날 CHAT GPT가 번역과 작성, 에세이, 논문, 작곡, 이미지 생성, 동영상 만들기, 의료 기술, 법률 판단, 언어능력 등의 많은 분야에서 인간이 넘볼 수 없는 탁월한 데이터 처리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설교자가 설교의 독특성을 간과한 채 설교 준비에 무분별하게 CHAT GPT를 사용하면 앞에 인용한 부목사나 K 목사가 가졌던 것과 비슷한 감정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할 수 있다. 설교자와 목회자로서의 생명이 순식간에 끝날 수 있다. 이 발제는 두 부분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전반부는 CHAT GPT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으로서 약한 인공지능의 기능과 한계를 살피고 이어서 강한 인공지능의 시발점이 되고 있는 CHAT GPT의 정의와 기능과 한계를 다룰 것이다. 후반부는 설교를 준비하고 해가는 과정에서 제 GPT의 도움을 받는 것에 뒤따르는 문제가 무엇인가를 정리를 하게 된다. 

 

약한 인공지능과 강한 인공지능

 

인공지능이라는 용어는 1955년 존 매카시가 신경학자들인 마빈 민스키와 프로버트 시먼과 함께 컴퓨터에 인간의 지적 활동을 가르치는 연구 계획서를 작성해서 넣으면서 처음 사용을 했다. 이 용어가 공식 석상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51년에 미국의 한 대학교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였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지성이 지닌 연산 혹은 논리적 추론의 능력과 비슷한 능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화된 컴퓨터 시스템을 뜻한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약한 인공지능과 강한 인공지능으로 보통 나눈다. 약한 인공지능은 인간이 컴퓨터 프로그램의 입력한 정보에 따라서 작동하는 인공지능이다. 그래서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컴퓨터로부터 도움을 얻는 것들이 바로 그 약한 인공지능에 해당한다.

 

강한 인공지능은 논리적 추론과 연산의 능력뿐만 아니라 인간의 말이 지닌 문맥과 의도와 결과까지도 추정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춤으로써 인간과 대화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초인의 단계까지 나타나는 기계를 뜻한다. 사실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연산의 능력을 굉장히 초월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별로 대단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 기계의 기능이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기 시작한 것은 벌써 고대 때부터 시작이 됐다. 예를 들어서 자동차의 기능은 인간을 월등히 추월하고 그 다음에 총의 기능, 모든 기계의 기능이 초월한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기능이 더 뛰어나다고 해서 존재의 탁월성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기계의 기능이 물리적 기능도 있고 역사적 기능도 있고 여러 가지 기능이 있는데, 그 기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재 인간의 신분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고 여기에는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월등한 기능을 가진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의 위치를 능가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 기계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너무나 크게 대단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 약한 인공지능에 대해서는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 시스템을 가리키는 것이다. 

 

강한 인공지능은 인공지능의 발전을 거듭해서 마침내 논리적인 추론의 능력뿐만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정신 기능들, 지성, 감성, 감정, 의지,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까지 모두 감춘 상태는 아니고 갖춘 것으로 보인다. 강한 인공지능의 개념이 신화나 공상과학에 등장하는 상상의 존재도 논의가 되어 왔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하늘을 날았던 소녀 이카로스 이야기가 등장한다. 아버지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는 왕의 탄압을 피해서 크레타 섬의 궁전을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깃털을 붙여서 날개를 만들어 탈출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다. 이때 다이달로스는 이카로스에게 일정한 고도를 유지하도록 했지만, 이카로스가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높이 날다가 추락을 한다. 또 대장장이의 신 불카누스가 금으로 의자를 제작해서 자기 마음대로 조정하는 것 등에 로봇의 개념이 들어가 있다. 

 

기원전 3세기에 아폴로니우스 로디우스가 쓴 아르고흐의 모험에 보면 크레타섬을 지키는 청동괴물이 등장한다. 이 괴물은 하루 세 번 섬을 돌면서 섬을 지키는데 괴물의 약점은 다리에 박힌 못을 뽑으면 죽는 것이다. 또 피그 발리온 신화에 피그 발리온은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한 여인의 실물을 만들어 사랑하게 되었고 그 여인상과 같은 여인과 결혼시켜 달라고 기도했는데 아프로디테가 응답하여 여인상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그 여인과 결혼하게 된다. 오늘날 로봇으로 이런 여자를 만들어 아내를 대신하고 살겠다는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1931년 제임스 트레이디를 위해서 영화화된 프랑켄슈타인이 있다. 이후에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1939년 조디 갈란트의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양철 휴머노이드라든지 1963년 일본 만화 아톰, 철인 28호, 마징가 제트, 울트라맨, 로버트 태권V 이런 것들이 다 강한 인공지능의 상상 속 형태가 된다. 1977년 스타워즈, 토이 스토리, 로보캅 등은 다른 인공지능에 대한 생산물이다. 공상과학에서 상상 속에만 구상해온 인공지능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시작한 첫 기계 장치가 바로 CHAT GPT이다. 이 CHAT이라는 말을 영원히 CHAT과 대화한다는 뜻이다. 사람과 기계가 대화한다는 것이다. GPT에서 G는 Generative의 첫 글자인데 ‘생성적이다’라는 뜻이다. CHAT GPT는 인간이 묻는 질문에 대해서 기계적으로 답변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대화하는 가운데 인간의 의도와 목적을 파악하거나 주장한 다음에 데이터로부터 질문자의 의도에 맞는 답변을 새롭게 만들어서 답변을 제시한다. 그래서 답변을 생성해낸다. 그래서 Generative G라는 용어를 쓴다. 그것은 개인 리포트일 수도 있고 에세이일 수도 있고 소설, 동영상일 수도 있다. 

 

즉 GPT는 몇 개의 단어와 의도를 말해주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서 내놓는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도 몇 개의 성경본문과 신학적 성향 이런 것들을 몇 개만 집어넣으면 완벽한 작품을 만든다. P는 Pre-trained의 첫 글자로서 미리 학습된다는 뜻이다. CHAT GPT는 어떤 방식으로 학습하는가? CHAT GPT를 가리키는 관리 이름을 언어 모델이라고 하는데 CHAT GPT의 언어 모델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어린이들이 언어를 학습하는 방법과 CHAT GPT가 학습하는 방법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성인들이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는 언어의 규칙인 문법을 배운 다음에 문법이라는 규칙에 맞춰서 다른 사람의 말을 이해하고 자기 의사를 배운다.

 

반면에 어린이들은 문법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완성된 말들을 그냥 수없이 많이 듣는다. 그러면 어린이들이 저절로 굉장히 패턴에 익숙해지면서 자동적으로 말을 알아듣고 말을 구사하게 된다. 반복이 되면 두 가지 언어 학습 방법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탁월한가? 후자가 언어 학습에 다 탁월하다. CHAT GPT가 바로 이런 방법으로 인간이 언어로 된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한다. CHAT GPT는 무지막지하게 학습하려고 한다. 그것을 딥러닝이라고 한다. 채집되는 방대한 양의 언어 데이터를 통계나 규칙에 따라서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와 단어 사이의 패턴을 학습하고 얻은 패턴의 특징을 가지고 질문한 다음에 나올 다음 단어를 예측해서 과정을 대신해 준다. 또 학습 계획과 콘텐츠를 제공하고 광고와 마케팅 문구를 작성하고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뿐만 아니라 이미지를 작성하고 영상을 제작하고 컨셉을 디자인하고 헬스케어를 실행하고 법률연구 초안 작성과 분석을 진행하고 금융자본과 비서 업무를 대행하는 등 전역에 걸쳐 자료를 제작한다. 의사도 임상 경험이 많은 의사가 좋은 의사이다. 그런데 임상 경험이라는 게 무조건 환자를 만나 봐야 된다. 그렇게 임상 경험이 풍부한 의사가 나중에 좋은 의사가 된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사실 Deep Learning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인식의 한계도 있고 시간도 한계도 있고 30-40년 지나면 세상을 떠나야 한다. 

 

T는 Transformer이 첫 글자이다. 작업을 수행하는 이해 가치를 의미한다. 2022년 11월 30일 미국 기업 오픈 AI의 텍스트 기반 대화형 인공지능 모듈 CHAT GPT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CHAT GPT를 이용해서 2억 개에 이르는 단백질 구조를 예측해서 결과를 공개함으로써 지구상에 존재하는 100만 종의 생명체가 만들어낼 수 있는 단백질 구조 전체를 규명했고 폐암 진단에서 영상의학과 전문의보다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 판사보다 더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결을 내릴 수 있음이 입증되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사실 GPT는 약간 자폐에 해당된다. 자폐아는 어느 한 영역에 대해서 굉장히 탁월하지 않는가? 그런데 다른 영역에 대해서는 인간관계나 이런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약하다. GPT는 그런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천재적인 자폐아와 같은 그런 존재다. CHAT GPT는 현대인의 생활에 혁신적인 변화와 편의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치명적인 몇 가지 문제들을 가진다.

 

CHAT GPT의 치명적 문제들

 

몇 개 자료만 입력하면 아주 예쁘고 아름답게 정말 PDF 자료를 만들어 주는 그런 프로그램이 있다. 제가 쓴 글을 한번 집어넣었더니 단 1분 만에 자료를 완벽하게 만들어 냈다. CHAT GPT는 전기가 흐르는 동안에 스크린에 생성되는 화면처럼 활동하다가 스위치를 끄면 소멸되어 없어져 버리는 화면과도 같은 존재이다. 살아 움직이는 실체로서의 자아를 가진 생명체가 아니라 CHAT GPT 본질에 대해 특성에 대해 철학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공리적인 효용성에만 맞추어서 이용하는 데만 집중하지 말고 적어도 목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살아있는 인간의 생명과 여부를 다룬 목사로서 CHAT GPT가 성경론적 관점에서 볼 때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존재인가를 성찰할 수 있다. 살아 움직이는 실체로서의 자아를 가진 생명체가 아니다. 굉장히 중요하다. CHAT GPT는 추상화된 데이터만을 보고 지식을 얻을 수 있을 뿐 단 한 번도 지식의 원천이 되는 실체를 접촉할 수도 없고 실체를 만난 일이 없다. 그것은 여자를 만나서 연애를 한 번도 해본 일이 없는 남자가 연애 소설만 많이 읽고 연애란 무엇인가를 알리는 책을 쓰는 것과도 같다. CHAT GPT가 전달한 내용 중에는 현지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환각을 마치 사실처럼 말하는 것들이 있다. 

 

CHAT GPT에 음식에 관한 정보를 요구하면 온통 산해진미로 가득 찬 아름다운 세계를 전개하는데 현실에서는 먹을 게 하나도 없을 수 있다. CHAT GPT는 마치 현실이 모든 맛있는 음식으로 꽉 찬 세계인 것처럼 아주 리얼하게 제시한다. 거짓말쟁이고 사기다. 그렇지만 CHAT GPT는 자신이 말하는 것이 환각인지 사실인지 구분할 능력이 없다. 거짓 정보와 사실 정보를 구분할 능력이 없다는 뜻이고 거짓말쟁이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CHAT GPT는 제공된 데이터에 근거해서 확률적으로 적절한 대답을 제시하는 것일 뿐 정확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 CHAT GPT가 제공하는 대답의 특징은 자료의 출처를 밝히지 않는다.

 

CHAT GPT에게는 자료의 편향성을 판별할 능력이 없고 입력된 자료들로부터 확률적으로 높은 것을 선택하므로 입력된 자료들이 편향되어 있을 경우 출력한 대답은 편향적이 될 수 밖에 없다. 또한 CHAT GPT는 출처를 밝히지 않기 때문에 CHAT GPT 자체가 저작권과 개인 프라이버시까지도 침해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CHAT GPT와 설교, 설교문 이용, CHAT GPT의 활용이 보편화되기 시작하면서 목회자들에게 가장 큰 유혹으로 찾아오는 것은 설교문 작성을 CHAT GPT에 의뢰하는 것이다. 사실 목회를 하다 보면 얼마나 할 일이 많은가?  

 

일주일에 10번, 20번의 설교가 다가오는데 그 설교를 어떻게 다 감당하는가? 초인적인 어떤 걸 요구한다. 그러다 보니까 목사들에게 그런 자료가 있으면 좋겠다고 기대하는 것이다. 몇 개의 제시어만 주면 한 편의 깔끔한 설교문을 몇 초나 몇 분 안에 만들어 주는 CHAT GPT는 설계자에게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온다. CHAT GPT만 옆에 있으면 평생 설교작업이 끝난다. 본문만 입력하면 그냥 아름다운 설계 한편이 나온다. 그걸 잘 정리해서 활용하면 굉장히 좋은 도구다. 

 

그러나 CHAT GPT를 이용해서 쉽게 설교문을 작성하는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일 수 있다. CHAT GPT가 사업, 법률, 의료, 예술, 창작, 공동체, 경영 등의 많은 영역에서 행정적인 개인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목회자가 설교문 작성을 CHAT GPT에게 의뢰하는 관행은 순식간에 설교자로서뿐만 아니라 목회자로서의 생명을 끝내버릴 수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왜 그런가? 

 

첫째로, 목회자가 설교를 통해서 전달해야 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의 말씀은 두 부분으로 구성이 된다. 하나는 인간이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가에 관한 복음이고 다른 하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하는 윤리이다. 설교자는 복음과 윤리를 모두 잘 전해야 된다. 복음은 영혼을 구원해 내는 구원사역이 되며 실제로 영혼을 구원해 내실 것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사역이다. 실체로서의 영혼을 강조했고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은 실체로서의 경험이 있어야 이 사역의 본질을 다르게 알고 설명할 수가 있다. 그러나 CHAT GPT는 영혼이라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은 경험이 전혀 없다. CHAT GPT는 또 신체가 없기 때문에 복음이 약속하고 있는 신체적 부활이 무엇인가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CHAT GPT가 작성하는 설교는 구원의 경험이 전혀 없는 말의 논리적 연결에 지나지 않으며 거짓이나 환각일 수가 있다. 윤리를 위해서는 구체적인 실천 현장에서 하나님이 주신 생활지침을 진행해 본 경험이 있어야 하고 그 경험을 실체적으로 예상할 수 있어야 한다. CHAT GPT에게는 윤리적 실천의 현장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다. 따라서 윤리에 대한 CHAT GPT의 설계도 거짓인 동시에 환각이다.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실체이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현실 속에서 사는 것도 실체이다. 

 

둘째, 설교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조명과 인도하심을 의지해서 전하는 작업이다. 성령의 조명과 인도하심은 인격체를 가진 자에게만 임하고 역사한다. 따라서 실체로서의 인격체가 없는 CHAT GPT는 성령의 조명과 인도하심을 받을 수 없으므로, 단지 설교문은 작성한 작품이다. 

 

셋째로, 설교자는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실체적인 경험이 있어야 된다. 이 부르심은 4단계의 부르심으로 구체화 될 수 있는데, 첫째로, 기독교인으로 신자로 부르심을 받아야 하고 거듭나야 하고 둘째로, 목회적 직무로 초청하는 하나님의 은밀한 개인적인 초청이 있어야 되고 셋째로, 직무를 감당할 자격을 갖추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적 부르심이 있어야 하고 넷째로, 교회의 부르심이 있어야 된다. 그렇지만 CHAT GPT는 이 네 가지 부르심 가운데 어떤 부르심도 받은 바가 없다. 다섯째, CHAT GPT는 특정한 목회자만 이용하는 도구가 아니고 모든 교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장치이다. 

 

목회자가 CHAT GPT를 통해서 작성된 어떤 설교를 들은 교인이 같은 CHAT GPT에게 설교에서 들은 몇 개의 지시어를 주고 설교문을 작성해 달라고 하면 목회자가 행한 설교와 동일하거나 거의 유사한 내용의 설교문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목회자의 설교가 목회자 자신이 준비한 설교가 아니라 CHAT GPT가 작성한 설교문을 그대로 읽은 것임이 확인된다. 목사들이 CHAT GPT를 이용하는 것보다 평신도 가운데 CHAT GPT를 이용하는 수법이 월등하게 탁월하다. 이 사실이 확인된 순간 목회자는 사기꾼으로 찍히게 되고 목회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다. 

 

목사가 CHAT GPT를 이용하지 않고 손수 작성한 설교인 경우 CHAT GPT의 매끈한 설교의 가 아니고 굉장히 어리숙하고 문법도 좀 틀리고 문장도 그렇게 매끄럽지 않고 그렇지만 자기가 연구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작성을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 교인들이 CHAT GPT로 돌려봐도 안 나온다. 그럴 경우 목사는 설교자로서 권위가 떨어지는가? 오히려 교인들은 자신들의 목사를 CHAT GPT를 의지하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고 자신들을 구체적으로 생각하면서 설교문을 작성했다고 여길 것이다. 그것을 1년, 2년 계속해서 해온다면 인정받게 된다. 신뢰가 형성된다. 설교의 내용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두 가지이다. 복음과 성도의 삶이다. 그러나 매일 똑같은 이야기만 하면 지루하니 약간씩 양념을 쳐서 달리 하는 것이다.  

 

매주 복음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고 또 이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책임을 전해야 한다. 같은 내용을 매주 해도 성도들에게는 새롭게 인식될 수밖에 없다. 성도는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 주에 와서 또 혼나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설교는 항상 새로운 것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설교를 반복하고 매주 반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가 살아가야 하는 원리는 무엇인가를 매주 반복하고 지속적으로 끈기 있게 전하는 설교가 좋은 설교이다. 다양한 설교를 하는 목사가 목회에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성공한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면 단순하고 심플하다. 재미없는 설교를 하는데 실패하지 않는다. 단순하고 심플하지만 핵심을 놓치지 않는 설교, 좋은 설교를 위해 CHAT GPT를 이용할 필요가 있다. 

 

CHAT GPT는 사람이 결코 다룰 수 없는 천문학적 분량에 방대한 데이터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사람이 접근하기 불가능한 영역에 있는 정보까지 처리하고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CHAT GPT를 통해서 설교문 자체를 얻지 않고 설교문 자체에 대한 정보들을 얻는 것은 활용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 해석이나 신학적 지식을 획득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CHAT GPT를 통해서 정보를 얻었다 할지라도 최종적으로 작성하는 것은 자기 말로 써야 한다. 또 설교 준비할 때 다른 사람들이 쓴 강해서라든지 주석서를 참고한다. 그러나 최종 설교문은 그 강해서에서 얻은 정보를 이해한 것을 내 말로 쓰면 된다. 

 

그럼 얼마든지 참고할 수 있다. CHAT GPT에 종교와 신학의 영역에서 방대한 데이터가 입력이 된다. 문제는 종교와 신학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데이터가 입력이 되는데 CHAT GPT에게는 어떤 데이터가 참된 종교와 신학에 관한 것인가의 여부를 판별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입력된 데이터 중에 바른 종교관과 바른 신학에 관한 내용은 절대 소수다. 종교의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 불교, 유교, 이슬람교, 소수 종교들, 무속 신앙의 자료들이 대거 입력이 된다. 신학의 경우에는 정통 신학, 바른 자료들도 입력되겠지만, 정통 신학을 비판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데이터가 압도적으로 많고 다양한 이러한 종파들의 자료들도 방대하게 입력될 것이다. 

 

CHAT GPT에게는 옳은 종교와 신학을 분별하게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종교와 신학에 관한 질문을 하면 어떤 답변이 나오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고 즉 CHAT GPT를 통해 얻은 정보가 오히려 설교자들을 혼란 속에 빠뜨릴 수 있고 이런 점을 이용해서 신학적인 자유주의자들의 개념들, 사상들이 CHAT GPT를 오염시킬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신학의 영역에서 방대한 저술을 토대로 진행한 연구 결과는 신학을 올바르게 선도하기보다는 변질시키고 혼란에 퍼뜨려왔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이 중간기 시대 유대 랍비들이 600년간에 걸친 연구를 통해서 방대한 유대교 사상체계인 탈무드와 구약성경의 주석인 미드라쉬라는 결과물을 산출해냈는데 이 방대한 작업의 결과는 구약성경을 심각하게 왜곡해서 전혀 다른 종교를 생성하는 것으로 귀결이 됐다. 

 

그래서 삼위일체 신관은 유일신관으로, 은혜구원을 행위구원으로, 메시야가 영적 왕국을 수립하는 것을 정치적 초인으로서의 메시야로 전락했다. 또 유대인 랍비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 조항들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 조항인가를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결국 율법을 600년 동안 연구했는데 나중에 최종적인 결론은 원래 의미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초대교회 교부들 중에도 가장 방대한 연구를 하여 200권 이상의 책을 저술한 오리게네스는 이상한데로 빠졌고 20세기에 들어와 방대한 신학서적을 저술한 칼 바르트는 정통신학과 다른 길을 갔다. 자유주의신학자들이 종교사학파의 입장을 가지고 신약의 기독교를 해명하고자 했다. 이들이 새관점학파인데 이들은 결국 이신칭의를 버리고 언약적 신율주의로 갔다. 가톨릭이 공로주의로 간 것도 이중칭의론으로 간 것도 다 정통신학에서 벗어난 것이다. 외경들을 정경으로 받아들이다 보니 이중칭의론으로 가게 된 것이다.  

 

CHAT GPT를 무분별하게 사용하여 습득한 지식은 오히려 혼란에 빠지게 되고 다른 신학으로 이탈했던 전철을 밟을 수 있다. CHAT GPT는 출처를 밝히지 않는다. 진실한 정보와 거짓된 정보를 판별하기 어렵게 되고 편향된 관점에서 서술된 잘못된 정보들이 객관적으로 공정한 진실로 등장할 위험이 있다. 설교는 진리를 전달해야 되는데 CHAT GPT가 데이터의 출처를 밝히지 않음으로써 CHAT GPT가 제시한 답변이 진리, 진실인가의 여부를 확신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진리 전달을 핵심으로 하는 설교의 역할은 치명상을 입게 된다. 출처를 밝히지 않은 CHAT GPT의 답변을 그대로 인용했다가 그 내용의 원인 저자가 저작권법을 가지고 문제를 제기하면 설교자는 본의 아니게 표절자로 전락할 수 있고 또 설교는 공적인 연설이므로 개인의 사적인 정보를 본인의 허락 없이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원칙을 어기게 된다.

 

우리는 지금 살아 있는 영혼, 살아 있는 실체, 살아 있는 삶을 다루는 굉장히 어마어마한 직분, 소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들인데 이런 현실에 대해서 전혀 접촉이 없는 환각에 불과한 CHAT GPT에 너무 의지해서 끌려갔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우리의 지조가 있는데 말이다.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가? 신학적인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고 어떤 위험성이 있는지 다루어야 한다. 설교자는 구원받은 백성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라는 중차대한 문제를 다루는 엄청나게 고귀하고 중요한 직분을 맡은 자라는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CHAT GPT에 끌려가지 않고 필요할 때 이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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