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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승 목사의 아들 한원석 목사, “광주전남 선교역사로 박사학위” 취득“유진 벨 선교사의 학원사역이 광주 지역사회와 교회에 끼친 영향 연구 -광주 중앙교회를 중심으로-
특히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와 같은 미션스쿨이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던 역사적 사례와 나병 환자 구제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헌신적 사역은 무엇이었는가? 또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선 기독교 신앙 수호의 역사와 그것이 현대 한국 사회에 미친 지속적인 영향력은 무엇이었는가? 이어 현재 미션스쿨이 직면한 교육 자율성 위기를 조명하며, 설립 당시의 신앙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미래 세대와 교회를 세우는 데 필수적인 요건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해 광주중앙교회 한원석 목사는 선교신학적 차원에서 2024년 총신대학교 목회신학전문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원석 목사의 논문인 “유진 벨 선교사의 학원사역이 광주 지역사회와 교회에 끼친 영향 연구 -광주 중앙교회를 중심으로-(A Study of the Influence of Missionary Eugene Bell's Academy Ministry on Gwangju Community and Church)”라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본 연구의 핵심은 미국 남장로교 소속 유진 벨(Eugene Bell) 선교사의 학원 선교 사역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광주 및 전라도 지역사회와 교회, 특히 광주중앙교회에 미친 심대한 영향을 규명하는 데 있다.
연구에 따르면, 유진 벨의 선교 전략은 교육과 의료를 복음 전파의 핵심 통로로 삼는 통합적 접근을 특징으로 한다. 그는 목포의 영흥·정명학교, 광주의 숭일·수피아여학교 설립을 주도하며 근대 교육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 학교들은 단순한 교육 기관을 넘어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지역 사회의 지도자를 양성하고, 3·1운동과 같은 민족 운동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는 등 사회 변혁의 구심점이 되었다.
특히, 학원사역은 교회 성장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광주중앙교회는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에 대한 재정적·인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자체적으로 유치원과 별학교(야학 등)를 운영하며 교육 사역을 확장했다. 이러한 헌신은 교회의 양적 성장과 질적 성숙으로 이어졌음이 통계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유진 벨의 학원사역은 광주 지역의 근대화, 민족의식 고취, 기독교 확산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폐교 등 수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미션스쿨이 남긴 유산은 해방 이후에도 지역 사회 리더들을 통해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본 연구는 선교사의 교육 사역이 어떻게 한 지역의 역사와 교회의 성장에 깊이 뿌리내릴 수 있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1891년 북장로교 소속 언더우드 선교사가 미국 내슈빌에서 열린 대회에서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 이에 감동받은 남장로교 신학생들(테이트, 레이놀즈, 전킨 등)이 조선 선교사 파송을 자원하고 기도하며 결단했다. 이들의 열정과 언더우드 형제의 헌금 등으로 1892년, 남장로교는 7인의 선교사(테이트 남매, 전킨 부부, 레이놀즈 부부 등)를 조선에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한국의 개신교 선교 초기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 타 교파 선교부와 협의하여 선교 지역을 분할하였으며, 미국 남장로교는 충청도, 전라도, 제주도를 담당하게 되었다. 1894년, 레이놀즈와 드루 선교사가 약 6주간 전라도 지역을 탐방하며 선교본진기지 후보지를 물색했다. 초기 후보지로 군산, 전주, 목포, 해남 우수영, 순천 등이 제안되었다.
1895년 2월, 테이트와 레이놀즈가 전주에 선교부를 설립하며 본격적인 사역 시작되었다. 군산 선교부 개설은 1896년 4월, 드루와 전킨이 군산에 두 번째 선교부를 설치. 초기에는 소규모 어촌이라 폐쇄 위기도 있었으나, 드루 선교사의 노력과 군산항 개항으로 선교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군산 선교의 부진을 대체할 새로운 선교본진기지로 전라남도의 행정 중심지였던 나주가 선정되었다. 유진 벨이 책임을 맡아 1897년 3월부터 부지 매입을 시도했으나, 동학농민운동을 자체적으로 진압하며 외부 세력에 극도로 배타적이었던 나주 양반 및 관리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건축 방해, 협박 등 신변의 위협이 계속되자, 남장로교 선교부는 나주 선교부 설립을 포기하고 1897년 10월 1일 개항한 목포로 선교본진기지를 이전하기로 결정하였다. 1898년 3월, 유진 벨은 목포에 도착하여 선교부 부지를 매입하고 목포양동교회의 기원이 되는 예배를 시작하였다. 개항항의 특성상 이주민이 많아 교회가 빠르게 성장하였다.
1898년 11월, 의사 선교사인 오웬(C. C. Owen)이 합류하여 '목포 진료소'를 개설. 진료소는 복음 전파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으며, 훗날 '프렌치 기념병원'으로 발전하였다. 교육 사역: 1899년, 여성 선교사 스트래퍼(E. Straffer)가 합류하여 여성과 아동 교육을 시작. 이는 1903년 유진 벨이 설립한 영흥학교(남학교)와 스트래퍼가 시작한 정명학교(여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그러나 시련도 계속되었다. 1901년 4월, 아내 위더스푼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유진 벨이 일시 귀국하는 등 위기를 겪었으나, 1903년 복귀하여 사역을 재개했다. 목포 선교가 안정되자, 더 큰 내륙 도시이자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던 광주에 새로운 선교본진기지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1904년 12월, 유진 벨과 오웬은 광주 양림동으로 이주하였고, 12월 25일 성탄절에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양림리교회(광주중앙교회, 광주제일교회 등의 모체)가 시작됨으로 광주 선교가 시작되었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 따라 조선인 지도자(조사)를 양성하고 이들의 자발적 헌신과 리더십을 통해 교회를 확장하였다. 광주에서도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숭일남학교(1908)와 수피아여학교(1908)를 설립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학원 선교 사역이 전개되었다. 먼저 목포의 영흥·정명학교였다. 1903년 유진 벨과 스트래퍼에 의해 시작되어 목포교회의 지원으로 운영되었다. 성경을 필수 과목으로 하며, 근대 학문(산학, 지리, 역사, 과학 등)과 실용 교육(근로, 바느질 등)을 병행함. 학생들의 교회 출석과 노방 전도를 의무화하였다.
1919년 목포 4·8 만세운동에서 두 학교 학생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선교사들은 학생들의 안전을 우려하여 만세운동 참여를 만류함. 정명여학교 유애나(니스벳) 교장은 학생들을 보호하려다 사고로 순직하기도 함. 이는 당시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원칙과 학생 보호라는 현실적 고민을 보여주었다.
다음은 순천 매산학교이다. 이 학교는 1910년 순천 선교부에서 '은성학교'로 시작하여 1913년 정식 개교하였다. 시련과 저항이 계속되었다. 1915년 조선총독부가 사립학교에서 성경 교육을 금지하자, 이에 항의하는 의미로 1916년 자진 폐교하였다. 1921년 '매산남학교'와 '매산여학교'로 분리하여 재개교했으나, 1937년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며 다시 폐교됨. 이는 신앙 교육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남장로교 선교부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다음은 광주의 숭일남학교와 수피아여학교이다. "불신자에게는 전도를, 신자에게는 교육을"이라는 원칙 아래, 기독교 지도자 양성을 최우선 목표로 삼음. 입학생의 60% 이상을 기독교인 자녀로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숭일남학교 (崇一學校)는 1908년 유진 벨이 자택에서 3명의 학생으로 시작. '유일신 하나님만 섬긴다'는 의미로 명명되었다. 프레스톤 교장 재임 시절 미국인 친구의 후원으로 1911년 광주 최고층의 현대식 교사를 신축. 기숙사를 건립하여 원거리 학생들을 수용하고, 이들은 모두 북문안교회에 출석하며 교회 성장의 기반이 되었다.
이어 수피아여학교 (Speer Girls' School)이다. 이 학교는 1908년 미국 스피어(Mrs. M. L. Speer) 부인의 기금으로 설립. 여성 교육을 통해 가정과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1919년 3월 10일 광주 만세운동에서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제작·배포하고 시위를 주도하는 등 핵심 역할을 하였다.
3·1운동 이후에도 비밀결사대 조직, 광주학생운동 동참, 문맹퇴치 운동 등 지속적으로 항일·애국 활동을 전개하였다.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는 신앙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를 거부하였고, 이로 인해 1937년 강제 폐교당했다. 이는 남장로교 미션스쿨의 신앙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한원석 박사는 본 논문에서 이러한 역사적 전개 상황 속에서 학원사역이 교회와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에 관해 논술하고 있다. 먼저 지역사회에 대한 영향이다. 오웬 선교사가 시작한 진료소는 서양 의술을 보급하고, 특히 나병 환자 치료에 헌신하며 소외된 이들에게 인술을 베풀었다.
유교적 제사 중심의 장례 문화를 기독교식 추도 예배로 바꾸는 데 기여하였다. 미션스쿨 학생들은 3·1운동, 광주학생운동 등 항일 운동의 중심에 서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선교사들이 지은 서양식 건물(오웬 기념각 등)은 새로운 건축 양식을 소개했으며, 광주 최초의 서양 합창단 공연이 열리는 등 문화 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이어 광주중앙교회 성장에 미친 영향이다. 1904년 양림리교회로 시작하여, 1906년 광주읍성 내 북문안교회로 이전. 이후 북문밖교회(→광주중앙교회)와 남문밖교회(→광주제일교회)로 분립하며 성장하였다. 광주중앙교회는 숭일·수피아 학교 운영을 위한 재정을 지속적으로 지원하였다.
교회 자체적으로 광주 최초의 유치원(1922년)과 야학, 강습소, 기숙사 등 '별학교' 시스템을 운영하며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였다. 광주야간신학교(현 광신대학교)를 설립하여 목회자 양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학원사역은 다음 세대를 교회로 이끄는 통로가 되었으며, 미션스쿨 학생과 교사들은 교회학교와 성가대 등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교육을 통한 교회의 사회적 기여는 긍정적 이미지를 형성하고 복음 전파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였다.
한원석 박사는 논문에 제시된 통계표를 제시하며 학원사역이 활발했던 시기에 광주중앙교회의 교인 수가 꾸준히 증가했음을 보여주며, 교육 사역이 교회 성장의 중요한 동력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1962-1997의 광주중앙교회는 정규오 목사와, 변한규 목사에 의해 지속적인 양적 성장하였다. 필자(소재열 목사)는 정규오 목사가 광주중앙교회 담임과 변한규 목사가 부목사로 시무하던 1978년에 금남로에서 위치한 광주중앙교회에 예배와 철야기도에 참석하여 기도했던 경험이 새롭다.
전남제일노회는 지난 2025년 4월 23일 오후 광주 광신대학교 은혜관 3층 대예배실에서 한기승 원로목사 추대 및 한원석 담임목사 위임식이 있었다.
총회에서 활동한 한기승 원로목사는 간암으로 투병하다가 2025년 5월 23일 오후 6시 5분 향년 66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광주중앙교회는 한기승 목사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한원석 목사는 광주전남지역의 선교신학 박사로서 그 역할을 감당하게 됐다.
그는 논문의 감사의 글에서 “전라도 지역에 선교를 담당했던 미국 남장로교 소속의 유진 벨 선교사의 학원 선교 사역이 광주 지역사회와 교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현재 제가 몸담고 있는 광주중앙교회를 중심으로 알아보고자 한 연구였다”라고 언급한다.
한 박사는 “본 논문을 통해서 120여 년 전부터 하나님께서 한 선교사를 통해 이 지역에 이루어 오신 거룩한 구원 역사”를 살폈다고 했다. 한기승 박사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한원석 박사는 광주에서 호남지역의 역사와 선교의 산실인 광주중앙교회를 통해 귀하게 쓰임받을 것으로 보인다. 광주전남지역의 역사신학과 선교신학에 귀한 연구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소재열 목사(리폼드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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